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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휴가 못다 한 이야기 시청

 

고등학교 2학년 한국근현대사 수업에서 평소 영상을 많이 활용했다. 대부분의 영상이 수업에 부분적으로 활용하기 쉽도록 필요한 부분만 편집해서 보여주는 형태였다.

 

하지만 때로는 한 시간 분량의 영상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여주는 경우도 있다. 편집된 영상은 영상 전체에서 전해주고자 하는 메시지를 제대로 전달해주지 못하고, 교사의 설명을 보완해주기 위한 자료에 머무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MBC PD 수첩 <화려한 휴가 못다 한 이야기> 상영 시간은 48분이었다.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다 그려내지 못한 진실을 전사모 회원, 5·18 희생자 유가족, 영화 출연자, 진압군으로 참가했던 군인들 등의 다양한 사람들과의 인터뷰, 그 외의 자료를 통해 자세하게 밝혀주고 있다.

 

그래서 한 시간은 온전히 영상을 보여 주고, 다음 시간에는 영상을 보고 느낀 소감을 쓰도록 했다. 영상을 보여주기 전에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간략한 소개 정도만 했다. 영상을 본 뒤 소감을 쓸 때도 아이들이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 정도만 해주었다. 아이들 스스로 느끼고 아이들 스스로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시청 소감문 쓰기

 

영상 수업에 이어지는 소감문 쓰기 시간에도 아이들은 진지했다. 5·18 민주화운동의 전개과정을 살펴보기 위해 근현대사 교과서를 뒤져가면서 아이들은 자신의 생각을 하얀 백지 위에 차근차근 써내려갔다. 이제 아이들이 쓴 글을 살펴보자.

 

그동안 5·18이라고 하면 학교 시험공부 하면서 광주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이라고 외운 것이 다였는데, 이처럼 처참하고 잔혹한 학살이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5·18에 광주에 파견됐었다고 마치 자랑인양 위협하고 다녔던 000선생님을 떠올리니 어이가 없다. 솔직히 내가 그때 광주에 있었더라면 과연 그 운동에 참가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무서워서 집안에서만 있었을지 모른다.

 

5·18은 비단 이 사건 하나만의 문제를 가지고 논할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의 문제를 깨닫고 고쳐나가야만 한다. 위대한 일을 하다 돌아가신 분들의 자손들은 힘들고 어렵게 사는 반면 인간 이하의 짓을 하고도 대대손손 떵떵거리며 살 수 있는 이 썩은 사회를 하루빨리 뜯어고쳐야 한다. 과거 친일파 숙청의 실패도 모자라서… 더 이상은 우리 사회의 정의가 양보되어서는 안 된다. <2-1, 이 00>

 

우리 아버지는 80년 당시 11공수에서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셨다. 아버지께서는 진압군으로 참가하신 것이다. 어느날 밤 행선지를 알 수 없는 기차에 올라 단지 '빨갱이 때려잡으러 간다'는 얘기만 듣고 광주에 도착하셨다고 한다.

 

광주에서 시위 군중을 봤을 때 그들이 광주 시민인지, 북한군인지, 빨치산인지 알 길도 없이, 계엄군의 손에 국가의 안전이 달렸다는 말만 들었다고 하셨다. 그들은 당시 상관의 명령에 의해 시민들에게 발포를 했고, 그들 나름대로 군인으로서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했다.

 

나는 당시 계엄군을 싸잡아 비판하는 말들을 수없이 들었지만, 난 우리 아버지를 포함한 당시 계엄군을 옹호하는 발언을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다. 내가 죄인이고 우리 아버지가 범법자라고 여기는 듯한 시선은 따가웠고, 난 어렸을 때부터 이 일에 괜히 많이 부끄러움과 상처를 안고 자랐다.

 

5·18이 가슴 아픈 대한민국의 역사임을 부정하는 이는 없다. 다만 이 사건을 바라봄에 있어서 냉정하고 균형잡힌 시각이 요구된다. 시민군의 입장도, 군부 세력의 입장도, 계엄군의 입장도 모두 그들 나름대로의 논리와 설득력을 갖춘 주장들이다. 누구는 민주화를 이끈 영웅이고, 누구는 국민에게 총질한 죄인으로 규정하는 편견을 버리고 아픈 역사를 치유하고자 하는 공정한 시각과 따뜻한 마음을 갖추길 바란다.<2-3. 양00>

 

아이들의 글을 읽으면서 5·18의 아픔이 내가 사는 주변에서도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수업 시간에 공수부대원으로 광주에서 진압활동을 했다는 걸 자랑스럽게 얘기했다던 선생님 얘기, 5·18 진압군으로 참가한 아버지 때문에 진압군을 욕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상처를 받으며 지냈다는 얘기, 영상을 보고 집에 가서 얘기하던 중에 아버지가 진압군이었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얘기, 당시 부모님 모두가 광주에 머무르다 계엄군에게 큰 봉변을 당할 뻔 했다는 얘기….

 

모두 알려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사는 이들이다. 5·18의 상처는 그들의 가슴 속에도 시퍼렇게 살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태그:#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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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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