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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 축령산, 한 사람이 혼자 힘으로 20여 년 동안 가꾼 숲
 장성 축령산, 한 사람이 혼자 힘으로 20여 년 동안 가꾼 숲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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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령산 어귀에 있는 금곡 마을, 초가집과 돌담길이 있어서 가끔 영화나 드라마 촬영지로 쓰인다.
 축령산 어귀에 있는 금곡 마을, 초가집과 돌담길이 있어서 가끔 영화나 드라마 촬영지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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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버스는 전남 목포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불길한 징조는 감지되지 않았다. 몇 달 전부터 짜놓은 계획에 맞추어 항구에 닿으면, 제주도 가는 배를 탈 예정이었다. 그러나 6차선 도로를 달리던 버스는 처음에 모였던 군산의료원 앞으로 되돌아왔다. 계약을 한 여행사가 실수를 해서 배를 탈 수 없게 된 거다.

이것은 회군인가? 위화도에서 목적지를 '급' 바꾼 이성계는 4년 동안 살육을 한 뒤에 나라를 세웠다. 야망도 살상력도 없는 내가 발길을 돌린다면, 기다리고 있는 건 일상뿐이다. 더구나 미국에서 들어온다는, 30개월을 넘긴 수상한 쇠고기 걱정까지 하고 있을 터다.   

함께 관광버스에 탔던 사람들 중 아무도 대놓고 성질내지 않았다. 망설이다가 저마다의 길로 갔다. 이희복·이화재 부부와 대학생인 주희·진우, 길림과 큰아들 지섭, 나와 우리 아이 제규, 이렇게 8명은 다시 길 위에 섰다. 나는 생각나는 대로 장성 축령산, 담양 소쇄원, 보성 차밭을 말했다. 만장일치였다.

오래 전, 내가 처음 축령산에 찾아갈 때는 장성에서 군내 버스를 탔다. 기사 아저씨는 금곡마을에 가려면 차에서 내려서도 한참을 걸어가야 한다고 했다. 버스는 종점에서 멈추지 않고 나를 데려다주기 위해 일부러 산 밑 마을까지 달렸다. 그 뒤로 축령산은 수도원에 간 친구랑 2번, 아이랑은 3번 왔다.

제주도 가려다가 축령산으로 가게 된 사연

장성 축령산
 장성 축령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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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곡마을, 진우와 주희 남매
 금곡마을, 진우와 주희 남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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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곡마을은 초가지붕과 돌담을 보존하고 있어서 영화나 드라마 촬영 장소로 쓰이기도 한다. 우리는 마을을 천천히 걷고 나서 축령산 안으로 들어갔다.

까불고 있는 우리에게 숲 해설사 류광수 님은 '작업'을 걸어왔다. '백만 스물두 그루'쯤 되는 나무들을 가리키며 딱따구리 흔적을 찾을 수 있느냐고. 기꺼이 말려들었다.

딱따구리는 나무에 구멍을 파서 둥지도 틀고 알도 낳는다. 그래서 나는 따스하고 우아한 구멍을 찾고 있었다. 아이들은 손도끼로 비껴 내리쳐서 상처 입은 듯한 나무를 찾아냈다. 그게 딱따구리가 쪼아댄 자리였다. 바닥에 떨어진 나무를 만져봤다. 생긴 게 북어포 같은데 느낌도 가볍고 푸석푸석했다.

딱따구리가 쪼아놓은 나무. 나무는 북어포처럼 푸석푸석하고 가벼워진다.
 딱따구리가 쪼아놓은 나무. 나무는 북어포처럼 푸석푸석하고 가벼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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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령산을 가꾼 임종국 선생의 수목장. 저 작은 느티나무와 함께 선생은 살고 있다.
 축령산을 가꾼 임종국 선생의 수목장. 저 작은 느티나무와 함께 선생은 살고 있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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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광수 님에게 축령산을 창조한 임종국 선생에 대해서 들었다. 선생은 1956년부터 20여 년 동안 나무를 심고 가꾸었지만 살아 생전 칭송을 받거나 부귀영화를 누리지 못했다.

나는 축령산에 올 때마다 '나무를 심은 한 사람의 숭고함'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이제는 선생의 아내나 자식들이 겪었을 경제적 팍팍함도 와 닿는다. 임종국 선생은 지금 느티나무가 되어 있다. 수목장을 해서 선생은 나무와 함께 자라고 있다.

울울창창하고 진중한 생명력을 가진 나무들도, 딱따구리가 쪼아댄 다음에 미생물이 제 집 삼아 드나들면 가벼워진다. 그리고는 사라진다. 사람도 마찬가지, 영원한 것은 없다.

임종국 선생의 숭고함에 무릎을 꿇다

'작업' 걸기의 고수, 숲 해설가 류광수 님에게 이야기를 듣고 있다.
 '작업' 걸기의 고수, 숲 해설가 류광수 님에게 이야기를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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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숲에서 나와 조금 헤맸다. 이희복 선생님의 네비게이션만 탓할 수는 없었다. 디지털은 인간의 기능을 집어삼킨다. 이제는 전화번호를 외우지 못해 떠듬떠듬, 노래는 가사를 몰라 흥얼흥얼. 그러니 지도를 보고 길 찾는 것도, 일생 처음 겪는 일처럼 버벅버벅. 그나마 소쇄원 가는 길이 수많은 공사로 영 딴판이 되었다는 게 핑계거리.

소쇄원은 대나무가 둘러싸고 있다. 대나무는 한 달 만에 키가 다 자란다. 어느 선비는 길 가다가 똥이 마려운데 체면 구겨질까 봐 대숲에 들어갔다. 갓은 벗어서 죽순에 걸어놓았다. 선비가 볼 일을 다 보고, 갓을 찾는데 글쎄, 저~ 위에 있더란다. 대나무는 그 정도로 빨리 자란다는 남도 사람들의 '뻥', 귀여운 허풍이다.

담양이 아니어도 전라남도에는 대나무가 흔했다. 어릴 적, 우리집에는 마당이 끝나는 끄트머리부터 다시 대나무 밭이었다. 어두컴컴해서 으스스 했다. 어느 날 이른 아침에는, 전날 잃어버린 대나무 화살을 찾으러 갔다가 대숲 속에 핀 나리꽃, 그 안에 맺힌 이슬을 오래 들여다 본 적도 있다. 

소쇄원은 대나무 숲길을 걸어가야 만난다.
 소쇄원은 대나무 숲길을 걸어가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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볕이 따가워지고, 바람이 따습던 봄날도 생각난다. 학교 들어가기 전이었지만 그 때 이미 '심란하다' 기분을 알고 있었다.

엄마하고 아빠하고 부부싸움을 해서 각각 방을 하나씩 차지하고 있는데 낯선 사람들이 왔다. 우리나라 사람처럼 보이는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했다. 안방 문을 열고 아빠가 나왔다. 서른 살도 안 됐던 젊은 가장은 그 사람들의 질문에 "예스!" 라고 했다. 작은 방에서 들리던 엄마 웃음소리는 통쾌했다.

1970년대 말, 서울말은 외국어처럼 낯선 때였다. 사람들은 각자 나고 자란 곳의 말을 했다. 제주도에서 대나무를 사러 온 사람들은 자기 동네 말을 썼고, 아빠는 그 말이 다른 나라 말인 줄로만 알았다.

소쇄원 대나무는 얼마만큼 빨리 자랄까

400여 년 전에 소쇄원은 흐르던 시냇물을 '후지르지' 않고 지었다.
 400여 년 전에 소쇄원은 흐르던 시냇물을 '후지르지' 않고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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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쇄원은 흐르던 시냇물을 '후지르지' 않고, 경사진 곳을 판판하게 다지지 않고 지었다. 집 주인 양산보는 조광조의 제자였다. 그는 조광조가 '주초위왕' 사건으로 떨려나와 죽음을 맞자 둘 데 없는 마음을 다스리며 소쇄원을 지었다. 후손들에게는 아마 이런 유언을 남겼으리라.

"우리집에 오는 사람들한티 잘 허고, 돈일랑은 받지 마라이."

짐은 그걸 짊어질 어깨를 선택해서 내려앉는다 해도, 400여 년 전에 조상이 남긴 말씀을 오롯이 지키는 건 어렵다. 손님 대접은 격식이 필요하고 돈이 든다.

그래서일까. 소쇄원에 드디어 입장료가 붙어 있었다. 남의 집을 공짜로 드나드는 게 살짝 민망했는데 떳떳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제월당 토방에서 맘 놓고 폼을 잡으며 사진 찍었다.    

입장료를 내서 떳떳해진 우리는 제월당 마당에서 폼 잡고 사진을 찍었다.
 입장료를 내서 떳떳해진 우리는 제월당 마당에서 폼 잡고 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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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장성 축령산, #담양 소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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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소년의 레시피』 『남편의 레시피』 『범인은 바로 책이야』 『나는 진정한 열 살』 『내 꿈은 조퇴』 『나는 언제나 당신들의 지영이』 대한민국 도슨트 『군산』 『환상의 동네서점』 등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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