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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광주민중항쟁 28주년이 되는 해다. <오마이뉴스>는 1980년 5·18 당시 고교생의 신분으로 항쟁에 참여했던 한 '고교생 시민군'의 회상기를 연재한다. 세월이 흘러 '고교생 시민군'들은 성인이 되었지만 그들의 활동에 대한 기록과 평가는 아직 미흡한 상태다. <오마이뉴스>는 이 연재가 '고교생 시민군'의 활동 내용을 통해 5·18을 성찰하는 귀중한 기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편집자주>

 

내가 탄 버스는 송정리 중간쯤에 이르러 앞차를 따라 영광 통으로 우회전했다. 영광군 방향으로 가는 도로에 우리 차 외에 두 대의 시위대 버스가 가고 있었다. 우리는 어제 영암과 나주 등지를 다녀왔기 때문에 3코스를 택했다. 나머지 시위대 차들은 다른 코스를 택해 떠났다.

 

시위대 차들은 송정리를 지나 용봉탕으로 유명한 황룡강의 다리를 건넜다. 지금은 송산유원지가 있는 다리아래 강둑에서는, 어린애들이 광주의 참상을 아는지 모르는지 평화롭게 뛰어놀고 있었다. 차창 밖 멀리 보이는 산은 유난히 푸르렀고, 스치는 들녘은 봄의 생기로 가득했다.

 

시위대원들도 이제는 긴장이 풀어진 듯 웃음과 잡담으로 요란했다. 나도 옆자리에 앉아있는 학교 친구인 준수와 얘기를 나누면서 무료함을 달랬다. 조금 전 계엄군과 대치했을 때 긴박했던 상황을 설명하면서 아찔한 순간이었음을 상기했다.

 

서부 전남을 가다

 

차량시위대는 금세 영광읍에 도착했다. 다시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불렀다. 차체는 여전히 박자를 맞추는 도구 역할을 충실히 했다. 우리는 영광읍을 관통하는 도로를 여러 차례 왕복하면서 광주소식을 전했다.

 

영광읍은 외부 시위대로선 우리가 처음이었는지, 많은 주민들이 도로변에 나와 구경했다. 노래와 구호를 멈추고 중간 중간에 광주의 상황을 알릴 때는 묘한 전율이 일기도 했다. 더 자세히 알려야겠다는 일념으로 빠르게 말할 때는 흥분해 말문이 막히곤 했다. 영광 주민들은 얼핏 광주소식은 들었지만, 우리의 자세한 설명에 그럴 수가 있느냐면서 분노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어떤 노인네는 두 손을 치켜들고 만세를 외치기도 했다.

 

차량시위대는 계속해서 영광읍을 관통하는 도로를 왕복하면서 광주소식을 전했다. 시위대원들은 읍내 페인트 가게에서 페인트를 구입해 차체 왼쪽과 오른쪽에 '전두환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하라'는 글씨를 대문짝만하게 썼다. 한층 더 시위대 차량처럼 보였다. 홍보효과도 크리라 생각됐다.

 

우리들은 오늘 밤까지 함평·무안을 거쳐 목포까지 가야했다. 이 때문에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영광주민들의 환송을 뒤로 하며 읍내를 빠져 나왔다. 함평으로 가는 도로를 지나면서 마주 오는 차가 있으면 잠깐이나마 멈추게 하고 광주의 참상을 전했다. 함평에서도 영광처럼 광주의 참상을 전하고 무안으로 이동했다. 무안에 도착했을 때는 주변이 조금씩 어두워졌다.

 

무안부터는 도로가 포장되어 있어 먼지를 뒤집어쓰지 않았다. 소음도 적어 좋았다. 무안에서는 영광·함평과 달리 비교적 질서 있게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쳤다.

 

시위대원들은 벌써 지친 탓인지 목소리가 우렁차지 않았다. 그러나 생기만은 가득했다. 무안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다른 지역보다 더 적극적이었다. 전남 제2의 도시인 목포와 인접해 있어 광주소식을 빨리 접했나 보다. 벌써부터 대한통운 12t 트럭과 소형트럭·버스에 가득 탄 주민들이 우리들처럼 구호를 외치고 다녔다.

 

터미널 부근에서는 집회도 있었다. 우리는 무안읍내에 있는 가게에서 제공해준 빵과 우유로 허기진 배를 채웠다. 주민들과 함께 시위를 하다가 밤 8시쯤 돼 목포로 출발하려는데, 주민들이 우리들에게 가지 말라고 했다. 목포입구 지산이란 곳에 군부대가 있기 때문에 진입하다가 잡힐 것이라고 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통제를 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도로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지키고 있다고 주민들이 말했다.

 

우리는 망설이다가 "그래도 목포로 가야한다"면서 군부대를 피해 목포로 가는 길을 물었다. 그들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친절하게 일로읍 쪽 우회 길을 상세하게 말해줬다.

 

 

일로읍 간첩소동

 

우리는 목포 입구의 군부대를 피해 무안주민들이 알려준 우회도로를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무안에서 일로읍으로 가는 길도 다른 지역처럼 비포장 도로였다. 노면상태가 좋지 않아서인지 유난히 덜컹거렸다.

 

피곤하여 별다른 생각없이 자고 있을 때였다. '탕' 하는 단발의 총소리가 요란하게 차내를 울렸다.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내 앞쪽에 앉아있던 대원이 그만 칼빈 소총을 오발을 했다. 다행히 총구가 천장을 향하고 있어 사람은 다치지 않았다. 그러나 차 천장은 총알이 뚫고 지나간 흔적이 확연히 드러났다. 여기저기에서 욕설과 함께 주의하라는 말들이 쏟아졌다. 나도 소총 소지에 자신이 없는 대원은 경험자에게 인계하라고 거들었다.

 

우리 차는 3대의 차 가운데 중간에 위치했다. 앞차가 일으키는 먼지 때문에 전조등을 켰어도 전방주시가 무척 어려웠다. 그래도 우리 차는 한참 앞을 지나가 버린 앞차의 흔적을 쫓아 달렸다.

 

일로읍 외곽도로를 막 지나갈 때였다. 앞차가 멈춰 있었다. 우리 차도 멈추었다. 앞차의 시위대원들이 모두 내려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모두 하차하라"는 전갈이 왔다.

 

앞차의 시위대원들은 우리에게 "방금 간첩이 나타나 앞에 보이는 산으로 도망갔으니 잡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우리는 그저 먼저 도착한 시위대원들의 행동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시위대원들은 토끼몰이식으로 캄캄한 산을 올라갔다. 대부분 시위대원들은 무기가 없기 때문에 주위에서 주은 몽둥이와 돌멩이를 무기삼아 '간첩 수색'에 나섰다.

 

준수와 나는 칼빈 소총을 든 대원 옆에 바싹 붙어 올라갔다. 의도적으로 함성을 지르면서 산을 수색해 어둠의 공포를 벗어나려고 애를 썼다. 우리가 수색한 산은 그다지 높지 않고 숲도 우거지지 않은 민둥산이나 다름없었다. 정상까지 올라갔어도 사람이라곤 우리 대원들 외에는 없었다. 밤중에 사람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설령 수상한 사람이 있었다 해도 캄캄한 밤에 어떻게 잡으랴. 산을 내려오면서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간첩이 등에다 '간첩'이라고 글씨를 써붙이고 다닌 것도 아닌데, 캄캄한 밤에 도로를 지나가면서 어떻게 간첩이 있음을 알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시 차에 탑승하려고 하는데, 대원들이 그 사람을 꼭 잡아야 한다고 했다.

 

잠시 후, 간첩소동의 진상을 알 수 있었다. 간첩이라고 지목하고 쫓아갔던 사람은 우리 앞차에 탄 시위대원이었다. 그는 칼빈 소총을 가지고 있었다. 일로읍을 지날 때 그가 소변을 본다고 말해 차를 멈추었다. 총을 어깨에 메고 금방 오줌을 눌 것 같은 표정으로 차에서 내렸으나, 곧바로 도망가 버렸다는 것이다.

 

모두 차에서 내려 이름도 모르는 대원을 불러 봤지만 헛수고였고, 도로 옆 야산으로 도망갔을 가능성이 높아 수색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총을 가지고 도망칠 정도이면 분명 무슨 일을 저지를 가능성이 컸기 때문에 꼭 잡아야 했다.

 

 

이미 점화된 불꽃

 

다시 차를 타고 30여 분 달렸더니 목포의 야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어둠을 헤치고 계엄군을 피해 목포시에 도착했다는 기분에 마음이 홀가분했다. 덜컹대던 비포장도로에서 깔끔하게 포장된 목포시내로 들어가니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대원들은 시내 홍보를 위해 다시 목청을 가다듬었다. 노래를 부르면서 시내를 질주하다 목포역 광장에서 집회가 있다는 대자보를 발견하고, 목포역으로 향했다. 목포역 광장에는 수천여 명의 시민들이 운집해 집회를 하고 있었다. 우리도 차에서 내려 집회에 참석했다.

 

목포역 광장 집회는 목포 청년회의소(JC)와 목포지역 재야단체 회원들, 대학생들이 공동으로 주최했다. 목포역 광장에 설치된 임시 연단에서는 여러 사람들이 차례로 연설을 했다. 이들은 연설을 통해 가시적인 민주화 일정을 밝힐 것과 광주참상에 대한 보고 및 신군부의 사과 등을 촉구했다.

 

야간조명 아래 진행된 이날 집회는 가히 축제 분위기였다. 우리는 운집한 시민들 사이를 헤집고 연단 쪽으로 갔다. 그리고 우리들 중에서 대표 몇 명이 주최측 집행부 사람들에게 광주에서 내려온 시위대원들이라고 소개했다. 그들은 매우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환영했다.

 

밤이 깊어지자 집회는 끝났다. 시민들도 무리를 지어 집회장에서 빠져나갔다. 목포역 광장은 군데군데 설치된 횃불만이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우리들은 이형래 회장 등 목포 JC 지도부와 함께 하룻밤을 묵을 여관으로 갔다. 목포역에서 500여m 거리에 있는 여관은, 그리 크지 않은 2층 목조건물이었다. 낡은 건물이었으나 아늑하게 보였다.

 

학교친구인 준수와 나는 2층 방을 택했다. 여관 계단과 복도를 다닐 때는 삐걱삐걱 소리가 나서 신경이 쓰였다. 우리들은 네 평 남짓한 방에 대여섯 명씩 들어갔다. 방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방은 비좁았지만 서로 어울려 잡담을 나누면서, 휴식다운 휴식을 취했다.

 

광주를 떠나온 이후 한번도 갈아 신지 않아서인지 양말에서 지독한 냄새가 풍겼다. 옷은 털어도 먼지가 계속 나왔다. 대원들은 좁은 여관 세면장에 몰려들어 양말을 세탁하고 오랜만에 세면을 했다. 대원들은 수건이 모자라서 돌려가며 닦았다. 수건은 금세 물방울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젖어버려 몇 번씩 짜서 얼굴을 닦았다. 수건은 냄새가 나고 비위생적이었지만, 그런대로 기분은 상쾌했다.

 

여관집 부엌에서는 아주머니들이 백여 명이 넘는 대원들의 때늦은 저녁식사를 준비하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아주머니들은 여관 인근에 사는 주민들인데 자원봉사를 하러온 것이다. 도마를 두드리는 경쾌한 소리가 더욱 시장하게 만들었다. 우리 방은 준수와 나를 제외하고도 네 명이 더 있었다.

 

잠시 후 아주머니들이 밥상을 들고 올라왔다. 상이 부족해서 어떤 방은 밥그릇과 찬그릇만 나오는데도 있었다. 그래도 우리 방은 동작 빠른 내 덕분에 상에서 밥을 먹을 수 있었다. 모든 방에 배식이 끝나자 왁자지껄 떠들던 소리는 간데없고 밥 먹는 소리만이 요란하게 들렸다.

 

모두들 말도 없이 먹기 바빴다. 나도 예전에 시골 일꾼들이 먹었던 큰 스테인레스 밥그릇 두 개를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이 먹어치웠다. 친구 준수도 잔뜩 배가 고팠나보다. 역시 빈 그릇 두 개를 만들었다.

 

덧붙이는 글 | 이 회상기를 쓴 임영상은 80년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이후 그는 <광주매일> 기자를 거쳐 행정자치부 장관 정책보좌관과 건설교통부 장관 정책보좌관을 역임했다.


태그:#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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