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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이 익어간다
 밀이 익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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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 8일 어버이날.

하루 전부터 "내일은 마을에서 밥 먹어"라는 소리를 들었다.

"왜요?"
"어버이날인께."

들판의 밀은 하루가 다르게 익어간다. 밀이 익어갈 무렵이 어버이날이었고 달포 기다리면 들판은 황금물결을 이룰 것이다.

녹차잎을 넣고 돼지고기를 삶고 있다
 녹차잎을 넣고 돼지고기를 삶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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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장에서 사 온 돼지고기를 지정댁이 마을 정자 앞에서 삶고 있다. 오늘 지정댁은 돼지수육 담당인 모양이다. 당신 스스로 손자까지 둔 어버이지만 시골에서 이런 마을 공동행사를 위한 일손과 그 밥상을 받을 사람은 거의 동일하다.

녹차 잎을 넣고 삶는 돼지고기. 마을의 집들은 대부분 녹차를 재배한다. 녹차에 대한 여론이 별로 좋지 않은 탓도 있지만 녹차 잎 파는 일이 녹록지 않다.

"언능 와. 고기 다 되얐구만."
"예, 사진 좀 찍구요. 엄니들은 회관에 있어요?"

정자를 힐긋 보고 마을회관으로 이동했다. 여자들은 모두 마을회관에 모여 있다. 다른 때 마을모임보다 많은 사람들이 보인다. 대구댁이 겉절이를 버무리다가 아는 체를 한다. 대구댁이 항상 겉절이를 만들었던 것 같다.

"삼촌 맛 좀 바바이."

태생적 경북 억양과 후천적 전라도 억양이 믹스된 묘한 느낌의 대구댁 억양. 한 바퀴 휘 둘러 본다. 대략들 아는 얼굴들. 미소로 인사를 대신한다. 그리고 셔터를 누른다.

이제 "사진은 왜 찍어!"라는 소리를 듣지 않는다. 그 대신 '그 녀석 또 왔군'이라는 표정이다. 먹는 날이면 카메라 들고 오는 그 녀석.

지정댁은 돼지고기 삶고, 대구댁은 겉절이 버무리고

남자들은 정자에서 음식을 기다리고...
 남자들은 정자에서 음식을 기다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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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은 대부분 마을 정자에 자리를 잡고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사오십 대 젊은 남자들은 바닥을 청소하거나 곧 시작될 음식 나르기를 준비하고 있다.

이장님이 보이지 않는다. 횟감 장만하러 읍내로 나갔다고 한다. 정자에 앉은 노인들은 지나가는 공사 차량 운전자들에게도 빠짐없이 잠시 후의 마을 모임에 참석하라는 소리를 하고 계시다.

"와서 괴기들 먹고 일혀!"

지난 가을에 시작했던 마을 오폐수관 공사의 예정된 공기는 이미 지났지만, 막상 실제 일은 쉽게 끝이 날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골목 안의 집들부터 연결해서 나와야 하는데 못자리 시기가 되었는데도 골목 안으로 포클레인이 진입하지 않고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애꿎은 흙먼지 죽인다고 물차만 왔다 갔다 하는 중이다.

지정댁 등은 돼지고기를 건져낸 모양이다. 식히고 썰면 되는 듯한 분위기다. 대략 경험상 이런 정도면 30분 후면 '파뤼~'가 시작되는 것이다.

운조루 입구. 시골에서 아이들 보기는 쉽지 않다.
 운조루 입구. 시골에서 아이들 보기는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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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서 천연기념물에 해당하는 아이들도 마을의 들뜬 분위기를 감지한다. 아침에 할머니 할아버지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드렸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날 가슴에 카네이션을 훈장처럼 달고 있는 노인들을 거의 보지 못했다.

하늘은 좀 흐렸고 바람은 잠잠했다. 밖에서 먹고 놀기 적당한 날씨다.

운조루로 발걸음을 옮긴다. 며칠 사이에 꽃은 다시 바뀌었다. 생각해 보면 그 자리에서 꽃이 바뀌는 것인지, 순서를 달리하며 꽃들이 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꽃이 피어야 그 나무의 존재를 인식하니 초록은 동색인 모양이다. 이름 모를 토종과 서양종 꽃들이 화단을 장식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집들은 대문을 열어두고 있다. 사람들은 회관과 정자로 나갔다. 당신이 마을에 들어섰을 때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다고 지나치게 방심하는 것은 좋지 않다. 누군가는 당신이 마을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지켜보고 있다. 방문객의 눈에 주민은 보이지 않지만 사는 사람들 눈에는 항상 방문객이 보인다. 그것이 시골이다.

고기가 다 익었다, '파뤼~'가 시작됐다

도마 옆에서 얻어 먹는 고기가 제일 맛있다.
 도마 옆에서 얻어 먹는 고기가 제일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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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장면에서는 칼자루 쥔 사람 옆에 착 달라붙어 있는 것이 좋다. 맛 좋은 부위를 도마 옆에서 얻어먹을 수 있다. 오늘은 개인적으로 가까운 지정댁이 칼자루를 잡았으니 특혜를 받을 만도 하지만 사진 찍으랴 음식 운반하랴 나도 나름으로 바쁘다.

"엄니 내장은 없소?"

아니 왜 대답이 없는 것인가! 글고 그 아래위로 꽃가라 패션은 뭐요? 엄니는 카네이션도 필요 없겠네요.

"염병하고 자빠졌네. 아, 호랭이 물가것네!"

지리산 자락에서 회 구경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지리산 자락에서 회 구경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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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님과 곡전재 형님이 읍내에서 회를 장만해서 막 들어선다. 봄숭어, 병어, 오징어회다. 양이 짐작했던 것보다 넉넉하다.

"하이고 이게 얼만 어치요?"
"00만원."
"엥! 뭐가 그리 싸요?"
"어버이날에 마을 어르신들한테 선물한다고 구라 좀 쳤제. 여수서 올라 온 놈인디 미리 말 안 혔다고 타박을 하더만. 장만한다고 애 먹었어."

대략 15접시 정도의 회가 차려졌다. 어찌되었건 반갑다 회야! 지리산 자락에서 너 보기가 쉽지 않구나! 조금만 기다려라, 사진 찍고 양껏 사랑해 주마. 회 구경하기 싶지 않은 지리산 자락에 등장한 봄 숭어에 갑자기 돼지고기는 잠시 홀대받는 분위기다.

"뼈보다 고기가 너무나 많구만."
 "뼈보다 고기가 너무나 많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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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하던 분들까지 모두 불렀다. 맥주와 소주 한 박스를 들고 와서 참석했다. 같이 자리하면서 공사가 왜 늦어지는지 설명을 하기도 하고 질문도 받는다. 자연스러운 대화다. 이런 것이 좋다. 신뢰를 쌓는다.

문제도 있다. 서로에 대한 냉정한 비판의식은 점점 희박해진다. 공사가 늦어지는 이유를 마을 주민들은 알고 있다. 오폐수관 공사 설계에서부터 문제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 설계도를 변경할 수 있는 과단성을 지자체에게도 시공업체에도, 뻔히 도급을 받았을 작은 업체에도 기대할 수는 없다. 그것이 시골이다.

회 접시가 비워지고 소주잔이 몇 순배 돌고 속도는 느리지만 손은 다시 잠시 물려두었던 돼지고기를 잡고 있다. 갈비 쪽을 들고 뜯는 중에도 덕담이 흔하다.

"뼈보다 고기가 너무나 많구만."
"거시기… 수육은 막 삶아서 요로코롬 소금에 쿡 찍어 먹는 거이 젤루 맛있당께."

상차림에 수고한 사람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은 이런 방식의 언어로 전달되었다.

고기와 회로 한상 차려내니, 어 군침 돈다 

"다른 말(마을) 사람들이 뻘건색으로 주차금지라고 쓰진 걸 보고 흉하다고 해쌉디다."
 "다른 말(마을) 사람들이 뻘건색으로 주차금지라고 쓰진 걸 보고 흉하다고 해쌉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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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과 술을 먹을 만큼 먹은 후 이날 모임의 취지에 대해서 곡전재 형님이 인사 형식으로
어르신들께 보고를 드린다.

"자주 모셔야는데 죄송합니다. 앞으로 젊은 사람들이 잘 하것습니다."

오래 된 마을에서 각 집안마다 암묵적인 역할이 있는 듯하다. 현손들은 자신의 그 역할을 마다할 수 없다. 하지만 이는 모두 고향을 떠나지 않은 경우에 가능한 일이다.

이장님과 개발위원들, 암묵적으로 역할이 주어지는 사람들은 읍내에 거주하고 있더라도 때가 되면 마을회관에 모여 일의 진행 방향에 대해 논의를 하는 듯하다. 이 모든 집행은 지자체나 각 국가기관에서 지원하거나 동재(洞財)에서 지출하거나 추렴한다.

하루 전 날 오늘 행사를 알리러 온 운조루 형님께, "빈손으로 가기 그런 날인데요?"라고
여쭈어보니 "마을에서 내는 것이여"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어버이날도 어버이날이지만 마을 정자 옆으로 마을 입구에 해당하는 구역에 대해 조경작업 중이다. 왜 조경작업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최 선생님이 설명을 하신다.

위 사진은 2007년 가을이다. 정자 계단의 저 붉은 스프레이 '주차금지'가 참 보기 흉했다. 최 선생님은 뜻밖에 '주차금지'에서부터 말씀을 풀어나갔다.

"다른 말(마을) 사람들이 뻘건색으로 주차금지라고 쓰진 걸 보고 흉하다고 해쌉디다. 그래 아 이 사람아, 정자 앞으로 관광버스다 뭐다 매연을 뿜어대니 어느 날 화가 나서 말 사람들이 그냥 그리 갈겨 버렸는디 사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찾아오는 사람들 행태가 참 야속하기도 한 거이 있네."

마을 정자를 중심으로 새 단장을 하고 '주차금지'를 지워 낸 상징적인 마을공사의 목적은 이 마을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좀 더 기분 좋은 휴식 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공사였다는 말씀이다.

이제 외부인이 찾아와서 휴식을 취하고 간식이라도 먹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은 어차피 사는 사람이나 방문하는 사람이나 질서 좀 지키고 기분 좋게 살자는 말씀이다. 이장님이 옆에서 마감을 하신다.

"저는 박수나 한번 쳐 불랍니다."

마을정자 옆으로 소나무밭을 조성 중이다.
 마을정자 옆으로 소나무밭을 조성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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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마을 정자 옆으로 수백 평의 소나무밭을 조성하고 있다. 가운데 줄로 한 줄 더 심어질 것이고 잔디가 심어질 것이다. 조경이 완료되고 나면 방문자들은 나무 그늘 아래 잔디밭을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기념하고 어버이날을 통해 어르신들께 보고를 드리기 위한 것이 오늘 마을 모임의 목적이다.

여름 시즌 전에 조경을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다. 소나무는 운조루에서 '낸' 것인데 운조루 뒤켠의 동산에서 간벌한 것이다. 나무가 너무 빽빽해서 간벌을 해 내어야 할 지경이었으니 나무를 옮기는 작업은 큰 문제는 없었다.

오가는 술잔 속에 진지한 대화 오가더니 노래판으로!

'그래봤자 우리 없는 당신들은 쭉정이여!'
 '그래봤자 우리 없는 당신들은 쭉정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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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대운하에 필적하는 국책 프로젝트에 관해 설명 중인데 여성동지들은 도마의 고기를 이미 마감해 가는 국면이었고 '그래봤자 우리 없는 당신들은 쭉정이여!'라는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실제 농사일의 8할이 여자들의 손으로 이루어진다. 젊은 남자 한두 명이 기계를 이용해서 큰 모양을 완료하면 일 년동안 그것을 지키고 가꾸는 일은 여자들 몫이다. 많이 드씨요이잉!

노래 소리가 들리기에 마을회관으로 카메라를 들고 이동했다. 금강댁이 한 가락 뽑는 중이다. '사진 안 되야!'라고 거부했지만 손가락에 걸친 마이크 선의 자태로 보아 하니 언젠가 들었던 금강댁의 노래 솜씨에 관한 풍문이 사실이었더라.

"삼촌도 한자리 혀."
"음… RATM이 몇 번이죠?"

지정댁 마당에서 열매가 익어간다.
 지정댁 마당에서 열매가 익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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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은 음식도 술도 길게 갈 분위기였다. 부른 배를 추스르고 먼저 일어섰다.

지정댁 마당의 앵두(이 지역에서는 '버찌'를 이렇게 부른다)가 익어간다. 지리산닷컴이 이곳에 자리한 지 1년이 되어간다는 소리가 아닌가. 벌써 그리 되었는가….

어버이날 하루가 그렇게 저물어간다. 여기는 구례군 토지면 오미동.

(2편 못자리 현장 기사가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위 기사는 http://www.jirisan.com 의 '큰산아래이야기'에 동시 수록되어 있습니다.
지리산닷컴으로 가시면 보다 큰 사이즈의 사진과 조금 다른 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태그:#어버이날, #못자리, #마을회관, #품앗이, #농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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