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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다. 그리고 참담하다. 이런 자책의 말로 이 글을 시작하자. 무엇이 부끄럽고 무엇이 참담한가? 부끄러운 것은 이 땅의 교사인 나 자신이고, 그 대상은 아이들이다. 참담한 것은 아이들에게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서게 만든 현재의 상황이다.

 

아이들이 촛불을 들고 밤거리에 나서고 있다. 그런데 소위 어른이라고 하는 교육 당국은 그 아이들이 누구의 사주를 받은 게 분명하다며 눈을 빗겨 뜨고 있다. 교육을 책임지는 교육과학기술부 주최 전국 교육감 회의에서는 아이들의 촛불 집회 참여를 막겠다며 하는 말이 기껏 배후에 전교조가 있다는 것이었단다. 중고등학생들이 촛불집회에 대거 참여하고 있다는 기사를 처음 접할 때부터, 언제 배후라는 말이 나올지 궁금했다. 그 궁금증이 미처 한 주일도 넘기지 못하고 현실로 나타났다.

 

일제 공문하달·배후 색출 운운, 달라진 게 없다 

 

교육감 회의 후 각 학교에는 일제히 공문이 하달됐다. 촛불집회에 참여하는 학생들의 안전이 우려되니 참석하지 않도록 하라는 가정통신문을 발송하라는 공문이다. 1987년 유월 항쟁 때도 그랬고, 그 이후에도 아이들이 학교 밖 사회에 관심을 가질 때마다 교육 당국은 언제나 학생들을 차단시키는 데만 열중했다. 이번 공문도 그때의 교육 당국의 태도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조금 다른 점이라곤, 학생 본분에 어긋나니 막으라는 지시가 이번에는 안전이 우려되니 참가하지 않도록 가정에서 지도하라는 말로 바뀐 것뿐이다.

 

경찰은 동맹 휴업 문자 메시지를 보낸 사람들이 누구인지 학생들 조사를 한다고 난리다. 조사를 한다면 분명 또 처벌 이야기가 나올 것은 불문가지다. 역시 배후 세력 운운할 가능성도 농후하다.

 

공자는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과연 이 땅의 어른들은 어른다운가? 아이들의 행동에 의심이라는 잣대를 들이대고, 그것을 교육이라는 그럴 듯한 말로 포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모름지기 어른이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는 어른다워야 한다. 어른다움이란 이해와 사랑에서 나온다. 왜 아이들이 촛불을 들고 나서게 되었는가를 이해하는 마음, 그 아이들이 바로 다음 세대 이 땅의 주인공이 될 존재들이라는 사랑의 마음이 바탕이 담겨 있지 않다면 그것은 아이들에게 우격다짐으로 겁을 주는 것일 뿐이다.

 

아이들이 누구의 사주를 받았다는 인식 자체가 아이들의 주체성을 인정하지 않는 몰이해적이고 비교육적인 발상이다. 아이들은 단지 학교라는 울타리에 갇혀 한 곳만 바라보는 존재가 아니다. 아이들이라고 생각이 없고 현실을 볼 눈이 없는 것이 아니다. 쇠고기 수입 개방 협상이 자신들의 생존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음을 아이들은 직감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정보가 개방되어 있고, 그 정보를 누구보다도 빠르게 흡수하는 아이들이 누구의 사주로 집회에 참석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시대착오적이다. 

 

나도 한때 배후 조종 '전교조' 교사였다

 

교직 초기, 학교 민주화 문제로 학생들이 학교 측과 마찰을 빚은 일이 있었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의견을 대자보로 만들어 교내 곳곳에 붙이곤 했다. 그러자 학교에서는 몇 가지 말로 그 아이들을 덧칠했다. '의식화' '대학생 배후' '전교조'가 그 색연필이었다.

 

당시 나는 그 학교의 몇 안 되는 전교조 교사였다. 맹세코 나는 그 학생들의 배후인 적이 없다. 단지 그 아이들의 생각이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심정적 동조자일 뿐이었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행동 양식을 가지고 있는 주체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심정적 동조조차 백안시되던 그때는 노태우 정권 시절이었다. 그로부터 이십 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그때의 인식에서 한 발짝도 더 나가지 못한 어른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정말 찝찝하다 못해 암담하기까지 하다.

 

요즘의 우리 사회를 지식정보화 사회라고 한다. 지식정보화 사회의 기본은 창의력이다. 창의력이 곧 경쟁력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창의력 있는 교육의 중요성을 교육 당국이 앞장서 강조하곤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창의력은 어디에서 발현되는 것인가?

 

창의력의 기본은 자유로운 사고, 자유로운 행동에서 나온다. 아이들이 촛불집회에 참여하는 것은 현실 문제에 대해 그만큼 많이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다. 시키는 대로 묵묵히 따라만 할 줄 아는 피동적 존재가 아니라, 문제를 인식하고 행동할 줄 아는 능동적 존재가 가장 창의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목소리를 낼 줄 아는 것이야말로 가장 창의적인 행동일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학생들의 촛불집회 참여를 바라보는 교육 관료들의 시선은 지식정보 사회가 아니라 산업사회에 머물고 있다. 그들은 그저 진리는 학교 안에만 있다고 믿게 만드는 지식 중심의 교육에 매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다, 학교조차 입시 몰입의 학원으로 만들려고 하니, 어쩌면 진리는 입시에 있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미안하다" 어른들은 사과해야 한다

 

성숙한 어른이라면, 우선 아이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영어 몰입 교육에, 0교시 수업에, 보충에 자율학습까지 옴치고 뛸 수 없게 만들어 놓은 교육 제도 속에서 너희들을 살게 해서 미안하다고, 거기에 먹을거리마저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이다. 그러고 나서 어른들이 해결할 테니 너희들은 학교로 돌아가라고 해야 아이들에게 어른다운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닐까?

 

'각주구검(刻舟求劍)'이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강물을 건너던 사람이 칼을 물에 빠뜨리자 뱃전에 새겨놓고, 배가 포구에 닿으면 물에 들어가 칼을 찾겠다고 했다는 일화에서 나온 성어다. 시대의 변화에 대처할 줄 모르는 융통성 없는 행동을 가리켜 쓰는 말이다. 옛날의 잣대로 바뀐 현재의 상황을 재단하는 어리석음을 이 성어는 경계하고 있다.

 

지금 이 땅의 청소년들은 현재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지극히 개인적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지극히 집단적이다. 자유롭게 사고하고 자유롭게 행동한다. 자신의 관심 분야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전문적인 마니아다. 

 

이런 신세대 아이들의 변화된 행동 양식을 과거의 잣대로 재단하고 훈계하려는 당국의 태도야말로 또 다른 각주구검이 아닐까?

 

감히 배후로 오해받을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나는 한 마디 하고 싶다. 늘 입시라는 중압감에 시달려야 하는 아이들, 고민조차 없이 청춘의 한 시절을 견뎌내야 하는 사막의 낙타와 같던 너희들이 이렇게 눈 반짝이며 촛불을 들고 나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모습이 세상 무엇보다도 아름답다고, 그리고 그 아름다움이 암담한 우리의 현실을 비춰주는 빛나는 촛불이라고.


태그:#광우병, #촛불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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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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