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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가치에 대한 재평가가 본격 개진되는 니체의 책 <아침놀>
 모든 가치에 대한 재평가가 본격 개진되는 니체의 책 <아침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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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일하고, 행복을 원한다. 또 세상은 '신성한 노동'으로 일궈가는 '행복한 미래'를 약속한다. 하지만 열심히 일해도 행복은 따라잡기 버겁다. 왜 그럴까. 원점으로 돌아가 살펴보자. 노동은 신성한가. 행복의 척도는 무엇이며 누가 결정하는가. 삶의 목적은 과연 행복일까. '신의 피살자' 니체는 노동과 행복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니체는 일찍이 노동을 가차 없이 비판했다. 심신을 피폐하게 만드는 노동과 전쟁을 벌이고 자신의 의지에 따른 고귀한 삶을 살라고 말했다. 니체. 그가 아무리 전승되어 온 모든 것에 의심의 눈길을 던지는 철학자라지만 노동의 '성역'까지 파고들 줄이야. 니체는 왜 노동에 의혹과 경멸의 눈초리를 보냈을까.

니체는 우선 '노동의 존엄성'이라는 근대의 개념적 환각을 비판한다. 노동에 대한 허영심에 사로잡혀 자신이 노예라는 사실을 잊고 때로는 노예보다 낫다는 우월감에 취해 하루하루 살아가는 이들을 '자기기만의 대가'라고 칭한다. 그리고 묻는다. 노동이 그렇게 숭고한 것이라면 노동으로 피폐해진 삶은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나라의 경우를 보자. 1970년대에는 노동의 신성함과 '근면'이 강조되었다. 집집마다 교실마다 '근면' '성실'을 벽에 걸고 이를 최고의 미덕으로 칭송했다. 또한 노동자는 한강의 기적을 일으킨 산업 전사들로 추켜세워졌다.

그런데 바로 그 '근면'으로 많은 노동자들은 손가락이 잘리고, 폐병을 앓았다. 살기 위해 일하는 건지, 일하기 위해 살아야하는 건지 분간조차 어려운 상황에 내몰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의 피폐함'보다 '노동의 숭고함'의 논리가 기세 등등 우세했다. 

노동의 존엄성은 '자기 기만'이다

니체는 이처럼 근대의 노동자가 고대 노동자와 다른 점은 노동에 대한 '독특한 자기 위안'을 갖고 있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니체가 개탄해마지 않는 허영심이다. 평등하지 못함, 공적으로 열등하게 평가되는 것을 가장 잔혹한 운명이라고 느끼는 사랑스러운 허영심 말이다.

그렇다면 영혼과 신체를 변질시키는 활동으로서의 노동이 어떻게 가치를 획득하게 되었을까. 니체의 계보학적 추적에 따르면 노동의 도덕적 가치평가는 자본주의의 비약적 발전과 궤를 같이 한다. 19세기부터 산업화가 완성되는 시점에 이르러서 비로소 노동은 철학 속 주요한 개념으로 자리 잡게 된다. 노동이야말로 창조의 원천, 문명의 원동력으로 추앙받는다.

기독교 윤리학에 따른 노동의 찬양을 통해서 가장 효과적인 삶의 충동들을 길들이며 노예화하고 있다고 니체는 분석한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행해지는 고된 노동을 비판하며 말한다. '노동은 경찰'이라고.

"노동은 극히 많은 신경의 힘을 소모하고, 성찰, 고민, 몽상, 걱정, 애정, 증오를 위해 쓰일 힘을 앗아간다. 그것은 항상 작은 목표를 겨냥하면서 수월하고 규칙적인 만족을 가져다준다. 따라서 끊임없이 괴로운 노동이 행해지는 사회는 보다 안전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안전이 현재 최고의 신성으로서 숭배되고 있다." (<아침놀>에서)

우리 사회가 만든 행복의 척도는?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광우병 쇠고기 수입, 학교자율화 방침, 의료보험 민영화 등 삶을 위협하는 일들에 대해 대체로 덤덤하다. 하루하루 먹고 살기 바쁘다 보니 관심 가질 여유가 없다. 모든 사건은 너무 쉽게 잊혀지고 용서된다. 갈수록 사람들의 관심은 가정의 울타리와 나의 몸으로 축소된다. 명품, 성형수술, 헬스, 고가 유기농 식품 등 삶의 치장을 위해서라면 강도 높은 노동을 감행한다.

그리고 갑갑한 일상탈출을 꿈꾼다. 고달픈 주 5일제 '노동의 감옥'에서 휴가를 받은 사람들로 주말이면 그토록 도로가 막힌다. 노동이 즐겁다면 굳이 휴식이 필요할까. 노동하는 자체가 휴식일텐데. 아마도 이 순환 고리, '행복 강박'과 '노동 강요'로 이어지는 이중성의 회랑은 끝나지 않을 듯이 보인다. 우리 시대의 행복은 곧 돈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자식을 특목고에 보내고자 과외비 마련을 위해 마트 계산원을 하는 어머니들, 대리운전으로 나서는 아버지들을 보라.

야속하게도 '나를 제외한' 세상이 만들어 놓은 행복의 척도는 너무 가혹하고 또 천박하다. 오직 아파트 평수, 자동차의 배기량, 자녀의 특목고 진학, 펀드의 수익률로 행복의 요건이 평정됐다. 각계 전문가와 대기업과 언론이 합작한 '행복의 레시피'로 사천 만의 삶이 공히 요리되고 있다.

이를 지켜보기라도 한 듯 니체는 말한다. "개인의 행복은 어느 누구에게도 알려져 있지 않은 자신만의 고유한 법칙들에서 솟아나기 때문에, 밖에서 주어지는 지침은 그의 행복을 방해하고 저지하게 될 뿐"이라고. 이제 그만 '더 많은 노동이 더 큰 부'를 가져다 줄 것이라는 환상을 깨고, 노동의 숭고함에 대한 찬미를 중단하라고 충고한다.

삶은 행복이 아니라 '삶' 자체를 바란다

그렇다고 니체가 일을 거부한 한량이 아니다. 니체는 직업을 삶의 척추라고 했다. 노동을 하되 그 일에 잘 맞아서 그것에 가장 고통을 적게 받는 사람에게 분배되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저마다의 신체 상태와 취향에 따른 일을 택해야 할 것이다. 자신만의 길을 가는 사람은 누구와도 만나지 않는다고 니체는 말했다. 각자 고유의 길이 있다는 얘기다. 

니체에게 직업의 귀천이란 없다. 연봉은 숫자에 불과하다. 대신에 삶의 비천이 있다. 반복 할수록 즐거움을 잃는다면 그것은 노예의 노동이고, 할수록 힘이 솟고 계속하고 싶은 '놀이'라면 그것은 고귀한 노동이다. 삶은 매번 반복된다는 엄정한 사실을 직시해보면 이는 더없이 현명한 척도이다.

삶은 행복이 아니라 '삶' 그 자체를 바란다. 누가 이를 견딜 수 있는가. 아침마다 새로워지는 창조적 단순성으로 살아가는 자 뿐이다. 마치 아이처럼 노동을 '놀이'로 즐기는 자는 기꺼이 말할 것이다.

"몇 번이라도 좋다. 오, 끔찍한 생이여, 다시 한 번!"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본인 블로그(beforesunset.tistory.com)에도 실렸습니다.



아침놀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박찬국 옮김, 책세상(2004)


태그:#니체, #노동절, #행복, #노동, #아침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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