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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의 고향 완도'를 표방하는 장보고 기념관은 청해진의 유물 뿐 아니라 장보고의 일대기와 국제무역활동 등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 장보고기념관 내부 전경 '장보고의 고향 완도'를 표방하는 장보고 기념관은 청해진의 유물 뿐 아니라 장보고의 일대기와 국제무역활동 등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 문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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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동양학자인 라이샤워는 장보고를 '해양상업제국의 무역왕'이라 극찬을 했습니다. 삼국통일 이후 어지러운 신라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장보고는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묻혀 있다가 1990년대 완도와 장도의 유적 발굴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더구나 드라마 <해신>의 놀라운 시청율이 거기에 한몫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겁니다.

드라마 '해신' 소세포 촬영장은 해신 이외에 수많은 사극이 촬영되고 있습니다.
▲ 드라마 '해신' 소세포 세트장 드라마 '해신' 소세포 촬영장은 해신 이외에 수많은 사극이 촬영되고 있습니다.
ⓒ 문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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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해신> 촬영을 위해 장보고의 고장인 완도에는 불모리에 신라방 세트장과 함께 소세포에 청해포구, 장보고 본영세트장이 들어서 있습니다. <해신>이 한창 촬영할 당시에는 거리에 해신 깃발이 나부낄 정도로 완도는 장보고의 땅이었습니다. 두 세트장이 드라마를 통해 장보고의 위상을 드높였다면, 이제 그와 청해진의 역사를 깊이 들여다 보는 것은 어떨까요?

완도의 동쪽인 장좌리 앞바다에는 장보고가 해적들을 소탕하고, 중국과 일본의 해상로를 거머쥐고 국제무역을 주도한 청해진이었던 장도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장도는 장군섬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곳에서는 토성의 흔적과 큰 건물터와 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되는 와편들이 많이 발굴되었습니다. 장보고가 완도를 거점으로 청해진을 설치한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관측을 용이하기위해 설치한 고대에서는 거금도,약산도,신지도 등이 한 눈에 보입니다.
▲ 장도의 고대에서 바라본 신지도 관측을 용이하기위해 설치한 고대에서는 거금도,약산도,신지도 등이 한 눈에 보입니다.
ⓒ 문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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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장도 주변은 신지도, 고금도, 약산도 등 크고 작은 섬들이 마치 울타리처럼 둘러쳐져 있어서 천혜의 요새인 데다 중국과 일본을 잇는 해상요충지로서 일본으로 가는 길목이기 때문입니다.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해도인', 삼국유사의 '측미하다'라는 표현을 통해 장보고가 섬 출신이고, 그가 완도 출신으로 지형지물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완도를 청해진으로 삼았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청해진은 '바다를 깨끗이 한다'라는 의미로 당시 서남해역을 주무대로 신라인들을 잡아 노예로 팔던 해적들을 소탕하고, 국제무역을 통해 새로이 길을 연다고 하는 장보고의 의지와 야망을 담고 있습니다. 장보고는 문헌상으로 '궁복', '궁파', 일본과 중국에서는 한자가 다른 '장보고'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중국 당나라로 건너간 장보고는 서주절도사 소속의 무령군에서 활동하다가 특출난 무예 실력을 인정받아 30세때 무령군 소장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장도의 내성문에서 바라보면 외성문과 바닷길 건너 장좌마을이 보입니다.
▲ 내성문에서 바라본 외성문과 장좌마을... 장도의 내성문에서 바라보면 외성문과 바닷길 건너 장좌마을이 보입니다.
ⓒ 문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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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당나라에는 공·사무역 발달과 함께 해상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생긴 신라사람들의 집단거주지인 신라방이 있었고, 신라방을 통해 신라, 중국, 일본 뿐 아니라 서역에 이르는 교역활동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던 시대였습니다. 당나라의 무령군 소장이던 장보고는 신라로 돌아가 그러한 내용을 피력하고,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게 되는데, 이때가 바로 통일신라 흥덕왕때인 828년입니다.

이 당시 신라의 상황은 왕권다툼이 심하던 때로 실제로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한 이후 죽임을 당할 때까지 10여년 남짓 동안 흥덕왕, 희강왕, 민애왕, 신무왕, 문성왕 등 5명의 왕이 교체될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중앙정부의 피바람이는 왕권다툼이 이어지면서 지방통제력이 떨어지고, 해적들이 창궐해 해안지역 약탈과 신라인을 잡아다 노예로 팔아넘기는 일이 빈번해지게 됩니다. 흥덕왕이 장보고의 청해진 설치 요구에 부응한 데에는 해적소탕을 위한 적법한 정당성도 있겠지만, 나날이 떨어지는 중앙통치력에 대한 적절한 대응책이자 어쩔 수 없는 선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장도는 하루에 두번 들어갈 수 있으며, 아직까지는 물때를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 장보고 기념관 앞에서 바라본 장도 장도는 하루에 두번 들어갈 수 있으며, 아직까지는 물때를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 문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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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해진의 중요 유적인 장도를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루 두번 열리고 닫히는 물길을 잘 알아야 합니다. 아직까지는 물때에 맞춰서 들어가야 하지만, 물길을 따라 다리를 놓을 예정이라고 하니 장도를 들어가기 위해 물길에 맞춰야 하는 번거로움은 줄어들 듯 합니다. 장도에는 거의 정비가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외성문과 내성문, 고대 등의 건물들과 장도를 한바퀴 에두르는 긴 토성의 흔적이 복원되어 있습니다.

장도로 들어가기 위한 유일한 문으로 외성문을 지나면 내성문과 정찰이 가능한 고대가 차례로 들어서 있습니다.
▲ 장도의 외성문 장도로 들어가기 위한 유일한 문으로 외성문을 지나면 내성문과 정찰이 가능한 고대가 차례로 들어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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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성문은 장좌마을에서 짧은 바닷길을 건너면 만나는 첫 번째 관문입니다. 섬인 지리적 여건과 함께 동남북 면은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외성문은 성을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만약의 사태로 외성문이 무너질 경우 2차적인 방어벽이자 지휘를 할 수 있는 내성문과 성벽의 모서리나 돌출 부분에 세워 먼 곳을 관측하고 지휘에 용이한 곳에 설치한 누각인 고대 등을 차례로 만날 수 있습니다. 고대에서는 신지도와 거금도, 그 사이에 있는 약산도까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습니다. 신지대교의 완공으로 섬아닌 섬이 되어버린 신지도와 주황빛의 신지대교 모습이 환하게 다가옵니다.

올해 정식 개관하는 장보고 기념관은 1층 기획전시실과 2층의 제 1,2전시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 장보고 기념관의 전경 올해 정식 개관하는 장보고 기념관은 1층 기획전시실과 2층의 제 1,2전시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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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도 인근에는 얼마 전에 개관한 장보고 기념관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한시대를 풍미한 해상무역의 1인자였던 만큼 장보고 기념관의 건립은 늦은감이 없지않아 있습니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청해진 유적과 유물이 집중적으로 출토되고 있는 이곳에 들어선 것은 장도의 유적탐방과 함께 장보고가 남긴 자취를 여실히 보여줄 수 있어 그나마 다행입니다.

7.9m 크기의 장보고 무역선이 장보고 기념관 입구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 장보고기념관 입구의 장보고 무역선 7.9m 크기의 장보고 무역선이 장보고 기념관 입구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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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 로비에는 장보고가 왕성한 해상무역에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길이 7.9m의 무역선이 복원 전시되어 있고, 장보고의 해상무역활동을 새긴 대형 목조 벽화가 걸려 있습니다. 주요 전시실은 2층의 1, 2 전시실입니다.

1전시실은 '장보고의 흔적을 찾아서'라는 주제로 완도 장좌리와 죽청리 일대의 발굴 유물과 문헌속에서 나타나는 장보고의 모습을 직접 느껴볼 수 있는 공간입니다. 2전시실은 장보고선단의 바닷길, 해상실크로드의 항해루트를 돌아보고, 장보고의 무역활동을 디오라마로 담아 놓은 곳입니다.

장보고 기념관은 화사한 섬유조명속에서 청해진 유적을 둘러볼 수 있습니다.
▲ 장보고 기념관 2층 1전시실 전경 장보고 기념관은 화사한 섬유조명속에서 청해진 유적을 둘러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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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 기념관은 입체적이고 화려한 것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 2층 1전시관 입구에 들어서면 일반 전시관이나 박물관에서 보지 못한 화사한 조명들을 먼저 만납니다. 시시각각 색깔이 바뀌는 섬유조명 속에 숨어있는 청해진 유물들을 보게 되면 그 신비스러움에 절로 젖어들게 됩니다. 조명 속에 숨어 있기도 하고, 투명한 발 밑을 통해 유물을 볼 수도 있습니다.  마치 꿈 속을 거닐 듯 1200년 전의 살아있는 청해진을 만나는 듯 합니다.

장보고의 해양개척정신을 통해 미래를 제시한 2층 제2전시관의 전경입니다.
▲ 장보고를 통해 미래비젼을 볼 수 있습니다. 장보고의 해양개척정신을 통해 미래를 제시한 2층 제2전시관의 전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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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한사람으로서 노예로 팔려가는 신라인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해적을 소탕하여 국제무역의 1번지로 자리매김하게 했던 장보고의 큰 뜻만 있었다면 10년 남짓이라는 청해진의 짧은 역사를 더 늘일 수도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어쩌면 날로 커져가는 청해진의 규모에 적잖이 놀란 신라 중앙귀족들의 견제와 제거 노력은 당연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염장의 차가운 비수에 허망하게 무너져 내린 청해진의 꿈…. 짧은 영욕의 세월만큼 청해진은 장보고의 암살 이후 순식간에 혁파되고, 청해진의 사람들은 지금의 김제땅인 벽골군으로 강제이주되는 비극을 겪게 됩니다.

1200년 후 되살아난 장보고의 역사. 바다를 깨끗이 청소할 해적도, 해상무역중심지로서 다시 자리매김 할 수는 없지만, 장도와 장보고 기념관은 라이샤워가 말했던 것처럼 해양상업제국의 무역왕, 장보고를 재조명해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 될 수 있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3월 30일에 다녀왔습니다.



태그:#완도, #장보고, #장도, #청해진, #장보고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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