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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으로 빚은듯 어여쁘게 핀 꽃
▲ 배꽃 손으로 빚은듯 어여쁘게 핀 꽃
ⓒ 이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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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추억으로 이끈 시조 한 수

지금 안성에는 하얀 눈 세상이다. 나풀나풀 날아서 나무 위에 사뿐히 내려 앉은 것 같은 흰빛. 배나무 가지마다 하얗게 피어난 그 꽃, 이화다. 이화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있으니 단연 월백이다. 그러나 한낮에 무슨 월백! 더구나 카메라가 이화에 월백한 분위기를 제대로 살려 줄 수나 있을까? 차라리 내 가슴에 담긴 월백으로 이화를 비추는 게 낫지. 그러면서 주저리주저리 시조를 외워댄다.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 제
일지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못 들어 하노라

휘영청 달 밝은 밤이라면 더 좋았겠다.
▲ 배밭 휘영청 달 밝은 밤이라면 더 좋았겠다.
ⓒ 이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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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 선생님이 눈 지그시 감고 애송하시던, 고려 문신 이조년의 시조다. 이 시조가 교과서에 나와 우리도 외웠다. 간혹 우리 중 누군가가 말썽을 피우거나 선생님 마음에 충격을 안겨 드렸을 때 선생님은 이 시조의 마지막 연을 애달프게 읊으시며 간밤에 잠못 이룬 사연을 들려주셨다.

벌써 30년을 넘긴 세월. 나는 그때의 선생님 나이를 훌쩍 넘겼고, 선생님은 여전히 독신인 채로 나를 응원해 주신다. 얼굴은 달라졌지만 전화기 속의 음성은 예전 그대로인 채 가끔씩 그 세월로 돌아가 인자하게 나를 다독여 주신다. 이젠 내가 선생님을 걱정하며 '다정도 병인 양하여'를 외칠 차례. 중학생이던 그때로 돌아간 듯 다시 마음 속으로 시조를 되새김질 해보았다.

길 양쪽으로 늘어선 하얀 물결, 얼핏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과수원에서 서성서성 오가며 일 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아주머니 두 분과 아저씨 한 분이다. 어째 일을 하는 모습이 긴 막대기로 배꽃을 슬슬 더듬어 가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상하다. 어릴 적 우리집도 과수원을 했는데 저런 장면은 처음이다. 물론 우리집은 포도 과수원이었지만.

배꽃의 아름다움 뒤엔 늘 이런 수고로움이 있다.
▲ 인공수분 배꽃의 아름다움 뒤엔 늘 이런 수고로움이 있다.
ⓒ 이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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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배꽃 수정을 사람 손으로 해야 하다니...

궁금해서 다가가 물어 보았다.

"지금 무슨 일을 하시는 거예요?"
"배꽃 수정을 하는 겁니다."
"예! 수정이요?"
"이거 본래 벌이 해야 하는데 벌이 없으니까 이렇게 사람 손으로 해줘야 합니다."

이런 광경은 처음 보았다
▲ 과수원 이런 광경은 처음 보았다
ⓒ 이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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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앞에 찬 사각통을 손으로 가리킨다. 이 통에 수분이 담겼다면서. 암꽃에 수분을 넣어 주는 작업이란다. 신기하기도 하고 '인간의 손으로 참 여러가지를 하는구나' 놀랍기도 한 순간이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배꽃의 환송을 받으며 이번에는 공도면에 있는 농협목장으로 향했다. 낮은 언덕을 오르자 농협연수원이라는 건물이 나온다. 조류 인플루엔자 때문에 출입을 막으면 어쩌나 가슴이 조마조마 하면서 안으로 들어서자 벌써 카메라를 멘 사람들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아련한 추억이 떠오르는 길
▲ 호밀밭 아련한 추억이 떠오르는 길
ⓒ 이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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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오늘의 목적지는 더 가야 나타날듯. 예전에 본 그 그림이 아니란다. 비좁은 밀밭 사잇길로 해서 모퉁이를 돈다. 점점 더 넓은 밀밭이 나오더니 드디어 광활한 초원지대가 눈앞에 펼쳐진다. 녹색의 초원 지대 끝으로는 하얀 배밭도 있다. 군데군데 미류나무와 소나무가 서 있고, 길 양옆으로는 냉이, 민들레 등 들꽃이 잔뜩 피어 있었다.

밀밭 너머에는 하얀배꽃이...
▲ 호밀밭 밀밭 너머에는 하얀배꽃이...
ⓒ 이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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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흔했던 봄풍경이다
▲ 봄풍경 예전에는 흔했던 봄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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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고향 신작로 길처럼 넓은 비포장 길도 있어 이채로웠다. 사람들은 동심으로 돌아간 듯 팔을 힘껏 내저으며 호밀밭 사잇길을 걸어 나갔다. 아직은 일러서 호밀밭 이랑이 나를 감춰주지는 못하지만 녹색의 이랑 속으로 숨어들던 어린시절도 떠올랐다. 이건 수채화로 꾸민 그림엽서 같은 분위기다.

우편엽서에서 본 듯한 풍경
▲ 황톳길 우편엽서에서 본 듯한 풍경
ⓒ 이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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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호밀밭은 밀이 영글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는단다. 이 광활한 호밀밭은 5월 중순쯤이면 벨 예정이란다. 지금은 초록이지만 점점 누런색을 띠게 될 것이고 그러고 나면 호밀을 베어 사료로 만든다고 한다. 목장에서 본 누런 한우의 먹이로 쓰이는 것이다.

수확을 위한 게 아니고 사료를 위한 것일지라도 이렇게 드넓은 초원을 보게 되다니 정말 경이로웠다. 옛추억과 함께 황홀한 봄을 구경한 진정 아름다운 하루였다.

덧붙이는 글 | * 배밭은 안성군 대덕면에서 보았고, 호밀밭은 안성 공도읍에 있는 농협연수원, 농협목장 안에 있습니다.

* 4월 19일 다녀왔습니다



태그:#배꽃, #호밀밭, #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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