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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유산답사회에서 지은 답사여행의 길잡이라는 책 시리즈 중에서 <전남> 편을 보면 고흥(高興)에 대해 ‘가까스로 섬을 면한 한반도의 막내’라고 적고 있다. 고흥은 최근 들어서 우주센터 건립 등으로 각광을 받고 있지만 아직 그렇게 유명하진 않은 곳이다.

고흥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자리 잡은 뾰족한 산, 첨산

뾰족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산의 아랫쪽에서 찍었기에 전체적으로 멀리서 본 모습과는 약간 다르다.
▲ 고흥 첨산. 뾰족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산의 아랫쪽에서 찍었기에 전체적으로 멀리서 본 모습과는 약간 다르다.
ⓒ 송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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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에 들어서는 길에 뾰족한 산을 하나 보게 된다. 봉우리 쪽은 바위로 되어 있고, 전체적으로 시원하게 삼각형 모양으로 뻗은 산이다. 이러한 뾰족한 모습 때문에 이 산을 첨산(尖山)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무조건 뾰족하게만 보이는 것은 아니다. 바라보는 방향마다 다 다르게 보인다. 어느 쪽은 턱이 살짝 튀어나온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한쪽에서는 다른 부드러운 능선이 이어져 있는 모습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근처에 있는 두방산, 비조암, 병풍산 라인(?)과는 좀 다르게 삐죽 튀어나온 감이 있다고나 할까?

이 산에는 나무가 얼마 없다. 있다고 하더라도 작은 나무들이 많다. 그러나 비조암과 연결되는 쪽에는 나무가 많다. 이는 몇 년 전, 첨산에 화마가 덮치면서 생긴 상처라 하겠는데, 화마의 상처는 산불의 기억이 잊혀져가는 지금까지나 남아 난쟁이나무들만 남겨 놓았다.

이 첨산은 벌교에서 고흥으로 가는 길에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벌교에서 고흥으로 가는 외지인들은 ‘어라, 이런 뾰족한 산도 있네?’라면서 대수롭지 않게 지나가곤 한다. 하지만 이 산은 사실 붉은 추억을 안고 있는 산이기도 하다. 이 작은 산에서 400여 년 전, 하나의 전투가 있었고, 이 전투에서 붉은 피를 흘리며 순절한 사람이 있었다.

고흥은 전체적으로 목이 좁은 주머니 같이 생겼다. ‘가까스로 섬을 면한 한반도의 막내’라는 말은 그러한 좁은 목 때문에 붙인 이름이라 하겠다. 이 목 부분만 없다면 여지없이 섬으로 인식되었으리라.

그러한 목에서도 가장 중심이 되는 부분이 첨산이다. 고흥군에서 목과 머리가 되는 부분은 동강면, 대서면 그리고 남양면이다. 이 중 동강은 벌교와 순천 쪽으로, 대서는 보성과 조성 쪽으로 그리고 남양면은 동강면 아래에 있어 확실히 말하자면 이쪽이 고흥의 목 부분이라 하겠다.

첨산은 동강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고흥으로 진입하는 길을 바라볼 수 있다. 첨산의 정상에서는 단순히 조성, 벌교, 동강, 대서, 남양이 보이고 끝나는 것이 아닌, 득량만과 순천만까지 한 번에 바라볼 수 있다.

고니시 유키나가, 나로도를 향해 퇴각하다

첨산은 주위의 여러곳이 조망된다. 벌교와 조성, 동강과 대서, 남양, 그리고 심지어 순천만과 득량만까지 보인다.
▲ 첨산에서 바라본 동강과 순천만. 첨산은 주위의 여러곳이 조망된다. 벌교와 조성, 동강과 대서, 남양, 그리고 심지어 순천만과 득량만까지 보인다.
ⓒ 송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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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약 400여 년 전, 정확히 1597년 일본은 정유재란(丁酉再亂)을 일으켰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조선침략의 야욕을 버리지 못하였고, 협상안에 불만을 느껴 재침을 감행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조선은 임진왜란 때의 무력한 모습이 아니었다. 그러한 일본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항하면서 일본은 당황하게 되었고, 결국 일본군은 퇴각하게 되었다. 1598년, 일본의 장군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나로도를 향해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자신이 머무르고 있던 순천왜성에서 벗어나 고흥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나로도는 현재 우주센터가 지어지고 있는 섬으로서 고흥반도 아래 남동쪽에 위치한다. 이곳은 고려시대 몽골에 의하여 말들이 길러졌기 때문에 나라에서 말을 관리하는 섬인 나라도에서 그 명칭이 유래되었고, 아직도 고흥 사람들은 나로도라기보다 나라도라고 많이 부르고 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이곳을 통해 일본으로 퇴각하려고 한 것이며, 조선은 이러한 일본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지긋지긋했던 전쟁이 끝나가는 시점, 정유재란의 노을이 짙어져가던 시기였다.

이 상황에서 일본을 가만히 둘 수는 없다. 그동안 국토를 유린했던 일본군을 용서하기도 힘들 뿐더러, 이들이 병력을 온전히 가져간다면 또다시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그렇기에 이들이 퇴각하기 전 쐐기를 박을 필요가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고향에서 머무르던 한 사내가 의병을 일으켰다. 일본군 퇴각을 저지하려는 목적에서 말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걸쳐 활약한 송씨 삼형제

그 사내의 이름은 송대립(宋大立 : 1550~1598)이었다. 송대립의 자는 신백(信伯)이요,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그는 3형제로서 큰형이었으며, 그의 동생으로 송희립과 송정립이 있었다. 이 3형제는 홀어머니인 선씨(宣氏)의 슬하에서 자라났는데, 송대립은 이이와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고 한다.

이 3형제는 모두 임진왜란을 맞게 되었고, 같이 참전하게 된다. 송대립, 송희립, 송정립은 이순신의 휘하에 들어가 수군으로 활약하게 되었다. 이 중에서 송대립은 1594년 늦은 나이로 진중 무과시험에 합격하여 훈련부장이 되었다.

KBS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방영한 노량해전의 모습이다.
▲ 노량해전. KBS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방영한 노량해전의 모습이다.
ⓒ KBS 불멸의 이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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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8년, 고니시 유키나가는 군사를 이끌고 고흥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과거 이순신 아래에서 싸웠던 송대립은 고향에 있다가 의병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 의병들을 모아 첨산으로 향했다. 이때 송대립의 동생이었던 송희립과 송정립은 이순신장군의 아래에 있었고, 이들은 노량해전에서 활약하게 된다. 노량해전에서 송희립은 이순신장군이 전사하자 북채를 잡고 끝까지 독전하였으며, 송정립은 전사하게 된다.

송대립과 고니시 유키나가는 첨산에서 싸움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애초에 송대립과 고니시 유키나가간의 싸움은 쉬운 싸움이 아니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당시 이름을 알리던 명장이었고, 송대립이 이끄는 군사는 비록 조국을 위해 분투하긴 하였으나 제대로 훈련을 받은 경험이 적은 의병이었다.

수적인 열세와 훈련 부족 등으로 결국 첨산에서의 운명은 일본에 기울게 되었다. 그리고 송대립 장군도 이곳에서 전사하게 된다. 후에 이 공적을 인정받아 병조참의에 증직하고 숙종 대에 정려를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송대립, 송희립, 송정립 삼형제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큰 활약을 하였다. 그리고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이 중에서도 송희립은 이순신의 오른팔이었고, 그는 후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정유재란 때 순절한 송대립과 그의 아들이자 노량해전 때 순절한 송심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전라남도 기념물 110호)
▲ 송씨 쌍충정려. 정유재란 때 순절한 송대립과 그의 아들이자 노량해전 때 순절한 송심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전라남도 기념물 110호)
ⓒ 송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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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가문의 내력 때문일까? 송대립의 아들 또한 과연 범상치 않았다. 송대립의 아들은 송심으로서 송대립이 전사하던 때, 불과 9살에 불과하였다. 그는 아버지처럼 나라를 위해 죽을 것을 결심하였고, 후에 병자호란 때 활약하게 된다. 병자호란 당시 송심은 화의가 성립되고 돌아가는 후금군을 추격하게 되었고, 그들과 분전하다가 결국 전사하게 된다.

첨산. 이 산은 어릴 적 송대립과 그 형제들이 뛰어 놀았던 마을 뒷산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산에서 뛰어놀며 호연지기를 길렀고, 비록 홀어머니의 아래에서 자랐으나 국가를 위해 충성해야한다는 진정한 충신이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그 때문에 전쟁에서 큰 활약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첨산의 붉은 추억은 바로 이 충신의 추억이다. 첨산은 묵묵하게 지금도 서 있지만, 이곳에서는 한때 붉은 피로 얼룩졌을 것이다. 그 붉은 피가 있었기에, 조선은 존재할 수 있었으며, 지금의 우리 또한 이렇게 지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덧붙이는 글 | 2008년 1월 1일 고흥 첨산에 갔다와서 쓴 글입니다.



태그:#첨산, #고흥, #송대립, #정유재란, #첨산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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