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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어둠 속 그물에 매달려 나오는 숭어
 새벽 어둠 속 그물에 매달려 나오는 숭어
ⓒ 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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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을 당기듯 잡아 올린 그물에 통통히 살이 오른 숭어가 바동거린다. 크고 작은 섬들 사이 수천 년 세월을 안고 자리한 갯벌에 보금자리를 잡은 숭어가 봄볕에 물비늘과 함께 눈이 부신다.

숭어는 가을과 겨울에 깊은 바다에서 산란을 한다. 새끼들은 봄이 되면 무리지어 강과 바다가 만나는 하구를 찾아온다. 특히 영산강 하구에서 잡힌 숭어를 으뜸으로 쳤다. 숭어들은 감탕(펄) 속 유기물 등 미생물을 먹고 자란다. 영산강 하구갯벌은 찰지고 기름져 알배기 숭어들이 산란하고 새끼들이 자라기 좋은 곳이었다.

진도 가사도 큰 마을 앞 숭어잡이. 뒤에 보이는 섬은 가사도 옆 주지도
 진도 가사도 큰 마을 앞 숭어잡이. 뒤에 보이는 섬은 가사도 옆 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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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 틀 무렵 해남 북평 앞바다에서 어부들이 숭어를 잡고 있다.
 동이 틀 무렵 해남 북평 앞바다에서 어부들이 숭어를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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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어를 부르는 이름도 가지가지

흑산도에 귀양 온 정약전은 <자산어보>에 숭어를 '치어'라 썼다. 의심이 많아 사람의 그림자만 비쳐도 달아나버려 낚시로 잡기 어렵다고 했다. <동의보감>에는 숭어가 위를 열어 오장을 다스리며 오래 먹으면 몸에 살이 붙고 튼튼해진다고 했다. 또 숭어가 진흙을 먹으므로 백약에 어울린다고 했다.

숭어는 지역마다 이름이 달라 물고기 가운데 방언이 제일 많다. 그 만큼 여러 곳에서 잡히고 민초들의 사랑을 받았다는 증거다. 숭어는 성장 시기에 따라 이름이 다양한 출세어다. 방언만 100개가 넘는다. 모치, 동어, 글거지, 애정이, 무근정어, 무근사슬, 미패, 미렁이, 덜미, 나무래미가 있고 그 외에 살모치, 뚝다리, 모쟁이, 모그래기, 수어 등이 있다.

얼마나 많은 지역에서 잡혔으면 그렇게 많은 이름이 붙었겠는가. 무안에서는 큰 것은 숭어, 작은 것은 눈부럽떼기라고 한다. 작은 숭어에게 "너는 숭어도 아니다"라고 했더니 눈을 부릅떴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이름도 크기별로 각각이다. 알에서 깨어나 얼마 되지 않은 어른 손가락 두께와 크기의 숭어를 '모치'라고 한다. 통째로 묵음 김치에 싸먹거나 소금구이를 해서 먹는다. 20-30센티 정도 자란 것은 '참동어', 3년 정도 되면 '손톱배기', 4년 자라면 '댕가리'라 부른다. 5년 정도 자라면 딩기리, 6년이면 무구럭, 7년이 되어야 '숭어'라 한다. 숭어가 되면 무게만 6kg 정도 된다.

복사꽃 필무렵 숭어회는 찰지다.
 복사꽃 필무렵 숭어회는 찰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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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어회
 숭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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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과 봄 숭어 '고기 맛이 달고 깊어서 물고기 중에서 최고다'

숭어회를 맛보려면 봄철이 제격이다. 복사꽃이 피는 철에 대부도 한 어부가 그물로 잡은 생선 맛을 본 중국 사신이 이름을 묻자 수어(水魚)라고 했다. 그러자 사신이 "수어가 아닌 물고기도 있느냐?"고 하자 재빨리 "백가지 물고기 가운데 가장 뛰어난 물고기여서 수어(秀魚)라고 한다"고 하자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조선후기 학자 조재삼의 <송남잡지>5권 '방언'에 나와 있는 숭어 관련 일화다.

사람만 계절을 타는 것이 아니다. 갯것들 중 철가리를 가장 심하게 하는 녀석이 숭어다. 봄 보리가 필 무렵에 잡힌 숭어가 맛이 좋다 해서 '보리숭어'라고 했다. 가을부터 맛이 들기 시작해 봄에 맛이 절정에 달한다. 입에 쩍쩍 들어붙는다. 겨울과 봄 숭어는 달고 맛이 좋아 최고의 대접을 받는다. '겨울 숭어가 앉았다 나간 자리, 뻘만 훔쳐 먹어도 달다'고 했다.

새벽녘 해남 남창이나 무안 망운 오일장에 가면 싸고 물좋은 숭어를 살 수 있다.
 새벽녘 해남 남창이나 무안 망운 오일장에 가면 싸고 물좋은 숭어를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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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어보>에서도 '고기 맛이 달고 깊어서 물고기 중에서 최고다'라 써있다. 정약전도 복숭아꽃 피는 계절에 숭어 맛을 본 모양이다. 제주 속담 중 '삼월이면 숭어 눈이 어둡다'는 말이 있다. 겨울 숭어는 눈이 밝아 그물을 쳐 놓으면 뛰어 넘어가지만 봄 숭어는 기름이 잔뜩 끼어 눈꺼풀을 덮어 눈이 어둡다. 이 때문에 봄철이 숭어잡이에는 적격이다.

겨울 동안 허한 몸을 다스리고 기름을 보충해야 하는 인간들에게 봄철 숭어만한 보양식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고 보면 인간과 자연의 어울림이 신통방통하다. 그렇다고 숭어가 철없이 사람들의 사랑만 받았던 것은 아니다. 우리 속담 중 '여름숭어는 개도 안 먹는다'고 했다. 사료 값이 비싸고 공급이 어려운 외딴 어촌이나 섬에서는 제철이 지나 그물에 잡힌 숭어를 큰 솥에 넣고 삶아 개밥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숭어알을 갈무리해 '어란'을 만든다.
 숭어알을 갈무리해 '어란'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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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철에 맛보는 숭어회가 민초들 음식이라면, 숭어알을 갈무리해 온갖 정성을 들여 만든 '어란'은 귀족 요리다. 숭어는 그 많은 방언처럼 조선팔도 어디에서나 잡히는 흔한 고기였다. 하지만 지금은 물길이 막히고, 바다와 갯벌이 오염되어 숭어맛을 제대로 보기 어렵다.

그나마 남도바다에서 숭어맛을 볼 수 있어 다행이다.조선시대 '영암어란'을 진상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남도갯벌이 좋았기 때문이다. 영암어란 명성을 잇는 것은 장인을 육성하는 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좋은 재료가 없다면 그 맛을 무슨 방법으로 재현할 수 있겠는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전남새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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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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