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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고개역에 내렸다. 지하철 4호선 당고개역 행은 많이 타 보았지만 실제 당고개 역에 내린 건 처음이다. 산이 바로 눈 앞에 있다. 수락산(水落山). 지난 14일 저녁 6시경, 아직 컴컴해지지 않은 시각, 산행을 마치고 내려온 듯한 행인들이 삼삼오오 오가고, 크고 작은 식당들은 손님맞이 준비를 하는 모습이다.
 
한나라당 홍정욱 후보의 당선인사 플래카드도 저만치 보인다. 저녁 7시가 가까워지자 파란 점퍼를 입은 사람들 몇 명이 나타난다. "노회찬 의원 오늘 여기 나오시는 거 맞지요?" 맞다. 저기 보이는 연두색 점퍼를 입고 검은 얼굴을 한 사내, '낙선인사'를 하기 위해 퇴근길 당고개역에 등장한 노회찬. 아침 출근길에는 근처 7호선 마들역에서 인사를 했다고 한다.
 
 
일렬로 나란히 선 운동원들이 외친다. "노회찬입니다. 고맙습니다.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저녁 7시가 넘자 당고개역 출구로 나오는 행인들이 늘어난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냥 지나치는 사람들도 많지만,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있는 노회찬에게 다가와 악수하고 위로와 격려의 말을 건네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다.
 
"떨어져서 어떡해요" "한 달만 더 일찍 오지" "희망을 가지세요" "고생하셨어요" "서운하시겠어요" "맘 아파요" "우리 가족은 다 찍었는데" "축하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허연 머리를 한 어느 행인은 "아직 젊으니까 괜찮아. 4년 후엔 꼭 될 거야"라며 노회찬의 어깨를 감싼다. 언론의 조류 바이러스 보도가 심하다며 즉석에서 민원을 제기하는 행인도 있다.
 
"여기 당고개역에서 나오시는 분들 중에 남양주 가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런 분들은 선거구가 여기가 아니니까 선거운동 기간 동안엔 인사를 드려도 반응이 없었는데 지금은 인사를 많이 받아 주시네요."
 
노회찬의 설명이다. 저녁 8시 반이 되자, 당고개역 출입구 인사를 마치고, 주변 일대를 누비기 시작한다. 주로 식당들. 삼겹살, 감자탕, 꼼장어, 순대, 족발, 곱창, 막창, 호프, 중국집, 이른바 '서민'이 애용할 만한 모든 종류의 식당이 다 있는 것 같다.
 
노회찬과 이미 구면인 듯 노회찬이 들어가 인사를 건네는 식당 주인들은 당고개역 행인들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애석함을 표한다. "도대체 왜 떨어졌는지 원……부아가 치밀어서……" 어느 식당에 들어서니 식당 안을 빼곡히 채운 사람들이 노회찬을 향하여 수고했다며 일제히 박수를 쳐 준다. 노회찬에게 술과 안주를 권하며 함께 자리하기를 청하는 사람들이 많다. "예전에 용접 일을 직접 하셨다면서요?"라고 말을 거는 이도 있다.
 
"선거운동하면서 여기 일대를 몇 번을 다녔는지 몰라요. 권하는 술잔 다 받아 마시느라 욕 보셨지요."
 
노회찬을 수행하는 박규선. 노원 지역에서 8년째 거주하고 있고 전에는 민주노동당원이었다는 그는 중증장애인활동보조인 활동을 하면서 노원시민신문에 장문의 체험수기를 올리기도 했다.
 
"이번에 노회찬 후보 선거운동을 하면서 처음으로 양복을 맞춰 입었다"는 박규선은 "원래 선거제도를 믿지 않는 사람이지만 노회찬이란 인물에게 희망을 갖고 선거운동을 도왔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진보라는 말에 알레르기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요. 지역에서 주민들을 만날 때 처음부터 거창하게 진보라는 표어나 구호를 내세울 게 아니라 조기축구회, 산악회, 부녀회 같은 일상활동을 평소에 꾸준히 하면서 신뢰를 심는 게 중요합니다."
 
 
당고개역 주변 순례 중에 숨을 돌리는 노회찬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 평일이지만 술 한 잔 하시는 주민들이 꽤 계시네요.
"오늘은 월요일이라서 적은 편입니다. 다른 요일엔 훨씬 더 많습니다. 역 주변만 돌아도 한 시간 반이 넘게 걸려요."
 
- 지난 4년 간 국회의원으로서 많은 활약을 하셨습니다만 그때는 비례대표로서 등원하셨고 이번에 지역구에 첫 출마하셨는데요. 아까 동행해 보니 주민들께서 석패하신 노회찬 의원께 애정을 많이 보이십니다.  
"저를 지지해주신 분들께 죄송할 따름입니다. 그분들께 직접 인사를 드리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 KBS 제1TV 일요스페셜에 방송된 <노회찬과 상계동 사람들> 이야기를 꺼내겠습니다. 한 시간짜리 프로그램이 무척 짧게 느껴졌습니다.
"두 달 가까이 취재한 걸 한 시간으로 압축한 거니까요. 대로망을 한 편의 시(詩)로 만들었다고나 할까. 한 시간도 방송으로는 긴 거죠."
 
- 한나라당 홍정욱 후보가 내세운 구호가 '노원의 가치를 높이자'였는데요. 미국으로 조기유학 다녀온 홍 후보를 보면서 학부모들은 자기 자식들도 그렇게 '번듯'하게 자라주길 바라는 마음이 들었을 것도 같고요.
"'노원의 가치를 높이자'는 지난 제17대 총선 노원을 한나라당 후보가 이미 내세웠던 구호입니다. 그때는 낙선했고 이번에 당선되었습니다만. 노원의 무슨 가치를 어떻게 높인다는 말입니까? 다름 아닌 노원의 부동산 가치를 높이자는 거 아닙니까. 당신들도 강남 사람들처럼 만들어주겠다, 이거 아닙니까. 홍 후보는 서민들이 절대 갈 수 없는 길을 걸은 사람이잖아요." 
 
- 노회찬 후보 되면 노원 땅 값 떨어진다는 말도 나오던데요.
"우리 지역구에서 가장 규모가 큰 아파트를 제외하면 다른 아파트 지역에서 제가 다 이겼습니다. 노회찬 되면 노원 땅 값 떨어진다는 말은, 제 공약 중에 전월세 인상 억제가 있다 보니(10년의 범위내에서 재계약시 전월세 인상률 연5% 범위내로 제한 및 임대료 과다인상 등 임대인의 부당행위에 대한 시정명령제 및 처벌규정 도입) 일부 부동산업자들이 제가 당선되면 자기네들에게 불리할까봐 만들어낸 말입니다."
 
- 방송 기획의도는 분명 서민을 대변하는 진보신당의 노회찬 후보에게 호의적이고 긍정적인 태도를 바탕에 깔고 있었습니다만, 보고 나서 아쉬운 점이랄까 더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방송을 보면 노회찬을 찍는 이유보다는 안 찍는 이유가 더 부각되어 있습니다. 물론 노회찬을 찍는 사람들의 입장은 기본으로 깔고 있다고 가정할 수 있지요. 어느 주민께서 그 방송에 나간다고 인터뷰했는데 안 나갔다고 저에게 직접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 요약하자면, 뉴타운 개발을 기대하는 지역 주민들이 결국 한나라당 후보를 택해서 노회찬이 낙선했다는 결론이지 않습니까.
"노회찬이 왜 졌느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외부에서 보는 입장과 직접 싸움에 임한 사람의 입장이 같을 수는 없습니다. 뉴타운을 기대하는 주민들이 돌아섰다는 식으로만 설명해서는 제가 얻은 40%의 의미를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뉴타운 개발을 기대하는 주민도 있지만, 불신하는 주민들도 엄연히 있습니다. 모든 서민들이 다 뉴타운 개발을 기대하는 건 아닙니다.
 
과거에 이 지역은 통합민주당이 45%, 한나라당이 40%, 진보정당이 3% 나온 곳입니다. 여기서 제가 40%를 얻었습니다. 전통적인 민주당 몰표지역(임채정 국회의장이 연속 4선을 기록했다)인 여기에서 한나라당 후보는 늘 얻은 대로 얻을 만큼 얻어갔습니다. 그런데 저는 여론조사에서 줄곧 나온 것보다 못 얻었어요. 민주당 후보가 선거전 막판에 역전극 운운 하며 표심을 몰아 표를 가져가는 바람에 딱 그 만큼 저는 한나라당 후보와 차이가 났습니다. 제 패배를 이렇게 설명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뉴타운을 기대해서 서민후보를 뽑지 않았다, 이렇게 단적인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결론을 내려 버리면, 정작 서민대중은 진보정당을 택하지 않고 늘 가진 자의 정당을 택한다는 식의 통념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분패했지만, 저는 이번에 노원에서 선거운동을 하면서 그런 통념이 옳지 않다는 희망을 보았습니다. 저는 서민의식을 가진 진정한 서민들을 노원에서 발견했습니다."
 
- 4월 2일 진보신당 공동대표 심상정 의원이 부친상을 당하면서 노 의원께서 경기도 고양시 덕양 갑의 심 의원 지역구에 가서 선거운동을 하셨는데요. 본인의 지역구 활동 하기에도 바쁜 판국에 그렇게 하기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여론조사에서 계속 이기니까 여유가 있어서 저러나 보다, 그렇게 보일까봐 염려는 되었습니다만, 부친상을 당한 심 의원을 응원하고 덕양 주민들에게 심 의원이 어려운 상황이라는 점을 직접 알리면서 당 전체에 힘이 되기 위해 그렇게 했습니다. 그 전에도 시너지 효과를 내기 위해 심 의원과 제가 합동 유세를 하거나 서로의 선거구에 가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혼자 아이디어 차원에서 해 보긴 했었는데, 선거 막판에 부친상이 나서 그렇게 가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 '효녀 심청 다음이 효녀 심상정입니다' 하시던데요. 덕양 갑 주민들 반응은 좋았습니까?
"예, 심 의원 부친상 때문에 제가 다닌다고 하니까 뭐라 하실 이유가 없지요. 거기서 노원구민을 만나 인사하기도 했습니다."
 
- 제17대 4·15 총선에서 민주노동당 사무총장으로 활약하신 때가 꼭 4년 전이네요. 김종필을 꺾고 비례대표로 당선되신 직후 민주노동당사 앞에서 지지자들의 환호 속에 연설하신 게 기억납니다. 
"그때보다 후퇴는 아닙니다. 지금 도달했어야 할 지점에 도달을 못해서 그렇지 그때보다 심화된 게 사실입니다. 진보가 반성하고 달라져야 합니다. 투표 안 한 국민들을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투표율이 높았더라면 진보세력이 더 득표했을 거라고 안이하게 가정해서는 안 됩니다. 왜 국민들이 투표장에 나오지 않을까 그 점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진보정당이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국민들을 일으켜 세우는데 실패했습니다. 국민을 설득하지 못하고 끼리끼리 노는 진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대중의 바다 속을 헤엄쳐 다니느냐, 잠수함처럼 동호회로 존재할 거냐, 기로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진보는 끼리끼리 노는데 익숙해져 있어서 걱정이 많이 됩니다. 실질적으로 선거구민들 속에 뿌리를 내려 진보정서의 대중화를 이뤄야지요."
 
- 어제 방송에서 '힘을 다 쏟겠다, 만약 조금이라도 힘을 남겨 놓으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다'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후회는 없으십니까?
"후회는 없습니다(속삭이듯 작은 소리로)."
 
짧은 대화를 마치고 그는 다시 주민 속으로 들어갔다. 지난 3월 16일 진보신당 창당대회에서 노회찬은 "반드시 살아 돌아오겠다"고 포효했다. 그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심상정 역시 마찬가지로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두 사람 중 그래도 한 사람은 되지 않겠느냐는 지지자들의 기대와 희망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앞으로 최소 4년 동안 우리는 노회찬과 심상정 없는 국회를 지켜보아야 한다.
 
당선자가 된 한나라당 홍정욱 후보는 자신은 '말꾼'이 아니라 '일꾼'이라 했고, 홍 후보의 사무소 개소식에 온 한나라당 원희룡은 노회찬이 상대를 잘못 만났다며 홍정욱을 치켜세웠으며, 유세장에 온 한나라당 대표 강재섭은 노원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려면 힘 있는 한나라당의 후보를 뽑아야 한다고 했다.
 
한편 같은 한나라당 출신 서울시장 오세훈은 14일 서울시는 더 이상 뉴타운 추가 지정을 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일꾼을 자처한 이가 어떻게 자신의 말을 지킬지, 과연 누가 '일꾼'이고 누가 '말꾼'인지 두고 볼 일이다. 
 
노회찬이 방송 인터뷰에서 한 말들을 떠올린다. 진보신당이 노회찬과 심상정 이 두 사람에게만 의존하는 게 아니냐는 질문에 "노심당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지금 노심초사인 상태입니다"라고 답변을 시작했다. 또한 요즈음은 촌철살인 어록이 조용하다며 어록 하나 남겨 달라고 인터뷰어가 주문하자, 하도 살인사건이 많이 나서 본인은 살인업계를 떠났다며,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이 되자, 물은 길이 없다고 멈추는 법은 없다, 는 말을 남겼다.
 
시대의 '말꾼' 노회찬이 비록 제18대 국회에는 못 나타나도 진보신당에서 노원구에서 앞으로 어떻게 지낼지 이제부터 다시 두고 볼 일이다.
 
 

덧붙이는 글 | 인터뷰를 한 공숙영 기자는 인터뷰전문웹진 퍼슨웹(www.personweb.com)의 편집장을 지냈고 현재 대학원에서 '국제법과 인권'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태그:#노회찬, #진보신당, #제18대총선, #노원 병, #당고개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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