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천영세 대표 등 민노당 지도부가 9일 오후 영등포당사에서 4개 방송의 출구조사 결과발표를 지켜보고 있다.
 천영세 대표 등 민노당 지도부가 9일 오후 영등포당사에서 4개 방송의 출구조사 결과발표를 지켜보고 있다.
ⓒ 연합뉴스 김병만

관련사진보기


예상대로 한국의 진보세력은 패배했다. 103명의 지역 후보와 10명의 비례대표 후보를 내세운 민주노동당은 권영길·강기갑 두 후보의 신승과 6%의 정당 득표로 비례대표 3석을 합해 모두 5석을 얻는 데 그쳤다. 정당 득표율 13%로 10명이 원내에 진입했던 2004년 총선보다 현저히 '위축'된 형세다.

민주노동당에서 분가해 나온 진보신당의 패배는 더 참담해 보인다. 진보신당은 지역구는 물론 정당 득표에서도 3%를 넘기지 못해 밤이 새도록 단 한 석도 얻지 못했다. 파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와 날카로운 진보논객 진중권이 발을 벗고 나선 데다 진보학자 손호철이 지원하고 멀리 노르웨이에 있는 박노자까지 가세한 진보신당이었다.

그런데도 심상정·노회찬 같은 간판 후보마저 낙엽처럼 떨어지고 말았다. 이것은 '위축'이라기보다는 사실상 '증발'에 가까운 결과라고 해야 맞을 성싶다.

불과 3년 반 전만 하더라도 민주노동당의 정당 지지율이 21.9%를 기록한 적이 있었다. 이번 총선에서 과반의석을 얻은 한나라당과 비교하면 겨우 1.4% 포인트 뒤진 수치였다. 그때만 하더라도 민노당의 의회 진출에 대해 "정치 발전의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응답한 비율이 75.2%에 달했다. 반면에 "좌파급진세력의 원내 진출로 우려된다"고 응답한 비율은 21.2%에 그쳤다.

이는 당시 한국의 유권자들이 민주노동당에 거는 기대가 컸고 우려는 작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달리 말해 민주노동당을 매우 신선하고 건강한 진보세력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떨까? 만약 똑같은 여론조사를 한다면 기대와 우려의 수치가 정반대로 바뀌어 나오지는 않을까?

한국의 진보세력이 쇠퇴하게 된 데에는 복합적인 요인이 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거센 조류를 타고 전염병처럼 번진 물신주의는 진보의 가치를 백안시하도록 만든 주요인이 아닐까 싶다. 불과 수 년 사이에 우리가 체험한 부동산 투기와 펀드 열풍 등은 급격히 이루어진 한국인의 가치관 변화를 읽게 해주는 대표적인 현상이었다.

이에 따라 한국의 진보세력도 급격히 세속화되는 징후들을 나타냈다. 쉽게 말해 진보의 순수 가치를 스스로 외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의 진보세력에서 기득권을 방어하고자 하는 패권집단과 이를 깨부수려는 소수집단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다. 뜻하지 않은 분화를 맞이해야 했고, 그 분화의 결과가 이번 총선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나타난 것이다.

부정확한 대선 패인 분석과 성급한 분당

한국의 진보세력이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으로 쪼개진 결정적인 계기는 지난 대선이었다. 물론 민노당에는 자주파와 평등파의 해묵은 대립이 있었다. 이 대립이 표면화된 것은 자주파의 지원으로 대선후보가 된 권영길의 낮은 득표율 때문이었다. 지난 대선에서 권영길 후보는 3.01%를 얻었다. 이것은 문국현 1인 정당이라고 할 수 있는 창조한국당에도 크게 뒤지는 성적으로서 원내 제3당을 자부하던 민노당의 입지를 여지없이 흔들어 버렸다.

그러나 이것은 민노당이 지난 2004년 총선에서 13%의 정당 득표를 했다는 것만을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슈 제기를 주업으로 삼는 언론들은 때맞춰 민노당의 몰락을 기정사실화하는 기사들을 내보냈다. 하지만 대선의 득표율과 총선의 정당 지지율은 성격이 크게 다르다는 점을 감안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사실 민노당의 권영길 후보는 2002년 대선에서도 3.8%밖에 얻지 못했다. 민노당 지지자들이 대선 때 한나라당의 집권을 막기 위해 당선 가능성이 거의 없는 민노당 후보 대신 열린우리당이나 민주신당에 전략 투표를 했기 때문이다. (YTN 조사에 따르면 지난 대선에서 민노당 지지자 중 64%가 의도적으로 다른 후보를 찍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랬음에도 평등파는 대선 패배의 모든 책임을 자주파에게 지워버렸다. 며칠 후에는 이른바 진보논객이라는 홍세화와 진중권 등의 입에서 험악한 어휘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주사파·광신도·사교집단·기생충 등의 용어가 그것이었다. 어제의 동지들에게 들려준 이런 말들은 '종북주의'라는 기이한 신조어로 집약되면서 결정적으로 분당을 가속화했다.

이번 총선에서 민노당과 진보신당이 얻은 정당 지지율을 합하면 9% 정도가 된다. 물론 지난 총선에서 얻은 13%보다는 적은 것이다. 하지만 창조한국당이라는 경쟁 변수를 감안해 보아야 한다.

이런 점으로 볼 때 한국에는 총선에서 진보정당을 선택하는 10% 내외의 고정 지지층이 여전히 상존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한국 진보의 미래를 희망적으로 만들 수 있는 잠재력이다. 또한, 이것은 분당 없이 총선을 치렀더라면 어떠했을까 하는 아쉬움을 남기는 대목이기도 하다.

유권자보다 아래인 진보 정치인들의 현실 인식

노회찬, 심상정 진보신당 공동상임대표가 9일 오후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18대 국회의원 선거 개표방송을 당직자들과 함께 지켜보고 있다.
 노회찬, 심상정 진보신당 공동상임대표가 9일 오후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18대 국회의원 선거 개표방송을 당직자들과 함께 지켜보고 있다.
ⓒ 유성호

관련사진보기


"원내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심상정·노회찬 후보가 접전을 벌이며 선전하고 창당한 지 한 달도 안 되어 3%에 가까운 정당 지지율을 얻은 것은 기적에 가깝다."(진보신당 이지만 부대변인)

사실 심상정·노회찬 후보가 접전을 벌인 것은 의미 있는 일이기는 하다. 왜냐하면 두 후보는 권영길이나 강기갑의 경우와는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심상정은 신도시인 일산에서, 노회찬은 서울 강북에서 한나라당과 접전을 벌였다. 그런데 신도시는 물론 서울 강북 지역도 이미 자본주의적으로 보수화되었음이 이번 선거를 통해 확인되었다.

하지만 정당이 총선에서 원내 진입을 하지 못한 것이 100%에 가까운 패배라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또한, 창당한 지 한 달도 안 됐다는 것만 내세울 수도 없다. 그런 논리라면 창당한 지 두 달 된 선진당이나 불과 2주 전에 만들어진 친박연대의 선전을 어떻게 평가해야 한다는 말인가? 무엇보다도 진보신당은 패배를 자인할 수 있어야 한다.

민노당의 천영세 대표의 소감도 현실과 심하게 동떨어져 있다. 그는 권영길·강기갑 후보의 당선이 확실시되자 "민노당이 이겼다"고 환호하며 "이 역사적인 뜻을 가슴에 새기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또한, 그는 이번 총선을 "선거혁명"이라고 규정하기도 했다.

불과 4년 만에 의석수와 정당 지지율이 반 토막 나버린 결과를 놓고 "이겼다"고 환호하며 "선거혁명"이라는 과장된 평가를 내리는 그의 의식이 무엇인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이겼다는 환호가 진보신당을 눌렀다는 뜻일까? 평등파들의 입에서 '종북꼴통'이라는 말이 왜 나왔는지 한편으로는 이해되는 구석이 있을 정도다.

자주와 평등은 상보적인 것이다

한국 진보세력의 분열은 자주파와 평등파의 대립 때문이었다. 물론 운동권 내부의 노선 투쟁은 일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민노당은 지난 2004년 총선에서 10명이 원내진출을 이룸으로써 더 이상 운동권이 아닌 민주사회의 진보정당으로 거듭난 것이었다. 그런데 정당이라면 구성원들끼리 '투쟁'이 아닌 '경쟁'을 해야 발전하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지금 한국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의 원인은 복합적이면서 동시적인 성격을 띤다. 우리 사회의 모순은 분단 때문이기도 하며 동시에 자본주의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자주와 평등이라는 두 이데올로기는 우리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려는 수단일 따름이지 결코 목적이 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자주와 평등은 상호보완적으로 지양 또는 지향되어야 한다.

정당이라면 집권 청사진과 국가운영 전략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것은 소수 진보정당이라고 해서 전혀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민노당은 이런 포괄적 개념의 정치를 본격화하지 못했다. 그동안 한국의 진보세력은 개론을 실종시킨 채 각론에만 몰두해왔다. 운동권이나 사회운동단체가 정당으로 변신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탈색되거나 수정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자주와 평등이 내부 투쟁의 수준에만 머무른다면 다시 운동권으로 가는 길 밖에는 남지 않는다. 민노당과 진보신당이 다시 하나가 되어야 할 당위성이 여기에 있다. 하나가 되어 자주와 평등을 상보적으로 조화시켜야 한다. 그래야 집권 청사진도 나오고 국가운영전략도 만들어진다고 본다.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분당의 상징적 두 인물인 권영길과 심상정이 만날 필요가 있다.

"저와 강기갑 의원이 당선되었지만 진보진영의 큰 승리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 진보진영의 대동단결을 위해서는 큰 범위의 성찰이 필요하다."(권영길)

"진보정치는 시련 속에서 영글어간다. 총선 결과가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심상정)

우리는 이 두 사람의 말에서 미구의 희망을 엿볼 수 있다. 다만 분당 과정에서 불거진 종북주의의 상처는 그리 쉽게 아물지는 않으리라고 본다. 아닌 게 아니라 자주파에서 분당의 원인 제공을 한 측면이 있다. 홍세화나 진중권이 거짓을 말하지는 않았을 터이기 때문이다. 물론 주체사상을 비롯한 북한식 방법이 우리의 해법은 아님을 분명하게 천명한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상대를 종북주의로 규정하며 분당을 선동한 것 또한 현명해 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것은 진보주의적인 행태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종북주의자를 골라내는 일은 국가보안법을 믿는 국정원이나 조중동 등의 보수가 더 의욕적으로 잘할 것이기 때문이다.

18대 총선을 통해 '위축'과 '증발'이라는 진보진영의 아픈 자화상을 보았다. 숫자로 드러난 결과는 외면하고 싶은 현실이기에 아픔으로 다가올 수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뼈아픈 결과가 진보의 앞길에 어떻게 작용하는가가 아닐까 싶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더 빛난다고 하지 않던가. 하루빨리 새로운 진보 통합의 전기가 마련되길 기대한다.

덧붙이는 글 | 김갑수는 작가로서 오마이뉴스에 항일역사팩션 <제국과 인간>을 연재 중입니다.



태그:#민노당, #진보신당, #자주, #평등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