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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대 국회의원 선거날, 회사는 하루 휴업했다. 지난 대선 때는 특근을 나갔는데 이번에는 웬일인지 쉴 수 있었다. 참 희한한 일이다. 자나깨나 생산성 향상을 강요하던 대기업 사용자가 휴업을 다 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믿기지 않았다. 공민권 행사하라고 일을 안 시키다니 말이다.

 

'혹시 무슨 꼼수가 있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친자본 정부의 노동탄압을 알리는 꿍꿍이 같은, 폭풍 전야의 고요 같은. 울산엔 하루 종일 비가 내렸고 나는 오전에 투표하러 갔다. 회사를 하루 쉬고 투표를 하면서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 순수한 생각은 좁쌀만큼도 떠오르지 않았다. 권력과 자본에 너무 당하며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집안도 가난했거니와 공부를 못해 중학교 졸업으로 정규 교육을 끝맺었다. 그리고 10대 후반부터 '사환' 또는 '급사'라는 이름으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야밤에 술집에서도 일했고 식당 종업원도 했다. 88년 ○○종합목재에 입사하면서 부모님이 계신 울산에 정착했다. 당시만 해도 직원 3천 명이 넘는 대기업이었고 ○○그룹에 속해 있어 든든했다. 시급 520원을 받고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10여 년 후 IMF가 터졌고 세상은 흔들렸다. 난 지금까지도 IMF가 무엇인지, 왜 국가가 그 난리를 겪었는지 경제적이거나 정치적인 이유를 모른다. 단지 내가 먹고사는 일에만 신경을 쏟고 있을 뿐이다.

 

목재가 사양산업이 되면서 울산공장은 문을 닫았고 나는 10여 년 동안 다니던 회사를 나왔다. 먹고살기 위해 다른 살 길을 찾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 후 농촌에도 있어 보려 했으나 여의치 못해 서울로 갔다가 2년 후 다시 울산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다행히 지금의 직장을 구할 수 있었다. 그렇게 ○○자동차 사내 하청에 다닌 지 오는 7월이면 8년 째다.

 

누가 비정규직 노동자를 대변할 수 있나

 

세월이 흐를수록 고용이 불안정한 현실이 불안하다. 세상 참 좋아졌다지만, 나처럼 단순 노무직에 종사할 수밖에 없는 사람은 갈수록 더 살기 힘들어지는 것 같다. 자식들이 커가니 돈은 더 드는데, 나는 나이 들어 언제 해고당할지 모르는 상황에 놓여 있어 더욱 그렇다. 업친 데 덮친 격으로 지난 대선에서 친자본 성격이 강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우리 비정규직 노동자 머리 위엔 더욱 짙은 먹구름이 휘감아 돌고 있는 느낌마저 든다.

 

역사상 최대라는 17개 정당이 등록되었고 비례 의석수 포함 299명을 뽑는 선거에 1300여명이 출마하면서 난립구도를 이루었지만 대부분 친자본·친권력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라 우리 같은 비정규직 노동자를 대변할만한 정당이나 후보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이명박 대통령은 "언제든 전화하라"며 기업 총수들에게 직통 휴대전화번호를 넘겼다. 알려진 수만도 102명이나 된다. 그런데 왜 노동자 대표는 단 한 사람도 끼워주지 않는 건지 모르겠다. 또한, 군사정권 시절 '백골단'이라 불렸던 체포조까지 부활시키고 있다. 상위 1% 기득권층의 호의호식을 위해 일하겠다는 발상이 아니면 뭘까?

 

이명박 정권은 신났다, 나는 뿔났다

 

이명박 정권은 신났다. 한나라당이 압승했고 친자본적인 입장에 선 후보들이 대거 당선되었으니. 게다가 진보는 찢어졌으니,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준비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서민과 노동자들의 신음소리를 듣지 못한다. 오직 그들이 보고 듣고 관심을 두는 것은 가진 자만을 위한 것일 터이니.

 

나는 뿔났다. 비정규직 노동자인 나에게 이번 총선 결과는 참담할 뿐이다. 찢어진 진보에 등 돌린 민심까지, 이번 총선을 지켜보면서 희망을 엿볼 수 없다. 앞날에 칠흑 같은 어둠뿐이다. 이번 총선 후 정치권은 어느 방향으로 흐를까. 이명박 정권이 구상한 게 있을 테고 거기 동조하는 세력이 대거 국회에 진입하게 되면 과연 어떤 세상이 될까.

 

그렇다고 우리에게 희망이 없는가? 우리같은 민초들은 다시 희망을 품어야 하지 않을까. 그 서슬 퍼렇던 87년 공안정국에서도 우린 떨치고 일어나지 않았던가. 아무리 그래도 그때만큼 모진 탄압은 못 할 것이다. 물론 더 교묘한 탄압을 할 수도 있다. 찢어진 진보에 쇠락한 진보지만 정신 차리고 하나로 뭉칠 수만 있다면 다시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생존권을 지키는 일에 한마음으로 모이자

 

난 사실 사상이고 이념이고 잘 모른다. 그래서 왜 진보라는 이름이 쪼개졌는지 알 지 못한다. 사상보다 이념보다 더 중요한 것이 생존 문제다. 지금 친자본 권력과 악덕 자본의 총궐기로 노동자의 생존권이 위협받게 될 것이다. 아니 이미 시작되었고 진행 중이다. 더 고단한 노동탄압과 노동착취가 있을지 모르겠다.

 

진보 세력은 지금 사상과 이념을 논쟁할 때가 아니다. 87년도에 전국 노동자가 하나로 뭉쳐 노동단체를 조직하고 민주노총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은 사상이나 이념이 아닌 생존권 지키기에 한마음으로 모였기 때문이었다.

 

진보세력은 사상과 이념을 내려놓고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라. 그것만이 득세하는 친자본 정치를 몰아내고 나같은 비정규직 노동자를 살릴 수 있는 길이자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모두 사는 길이다.

 

진보라는 이름은 보수라는 이름과 다르다. 보수는 찢어져도 흐르지만 진보는 찢어지면 모래처럼 흩어져 사라질 뿐이다. 그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태그:#노동자, #비정규직, #진보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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