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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으로 돌아오는 순간, 모든 것 망각하는 유학생

김성재 박사는 이공계 학생들도 자신의 연구성과를 널리 알리기 위해서는 글쓰기를 활용한 의사소통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 "이공계 학생들도 글쓰기 공부해야" 김성재 박사는 이공계 학생들도 자신의 연구성과를 널리 알리기 위해서는 글쓰기를 활용한 의사소통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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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김포공항의 마법'이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나. 아니면 '인천공항의 마법'이라도….

미국 보스톤 케임브리지에 위치한 MIT대의 '글쓰기와 의사소통센터'. '미국의 글쓰기교육, 그 현장을 찾아서'란 주제로 현장탐방기사를 쓰기 위해 이곳을 방문한 기자는 MIT대 전자컴퓨터 공학과 박사후 과정에 있는 김성재 박사(32)에게 '김포공항의 마법'에 대한 사연을 들었다.

"'김포공항의 마법'이란 말이 있다. 이젠 '인천공항의 마법'에 걸렸다고 해야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수많은 미국 유학생이 영어 논문 때문에 고생을 하고도 귀국한 뒤에는 그 개선책을 촉구하는 데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한국으로 귀국하는 순간 그 모든 것을 망각하고 만다."

김 박사는 "문화과학기술의 중심은 영어권에 있기 때문에 아무리 연구성과가 좋아도 영어논문으로 작성하여 해외 저널에 싣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며 "한국이 과학기술 분야에서 국제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석·박사 과정 학생들의 영어논문 작성을 도와주는 글쓰기센터를 반드시 설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박사는 또 "이공계 대학에 진학하려는 학생들은 자연계열 특성에 맞는 독서와 글쓰기, 논술 공부를 해야 한다"라며 "멀리 내다본다면 대학입시에서 자연계 논술을 폐지하는 것은 시대 흐름에 맞지 않다"고 지적했다.

김성재 박사는 포항공대 학사·석사·박사 출신으로 2005년 12월부터 MIT대 전자컴퓨터 공학과 박사후 과정에서 나노유체역학을 연구하고 있다.  다음은 김 박사와 나눈 일문일답.

- MIT대 '글쓰기와 의사소통센터'에서 지도받는 게 만족스러운가.
"아주 흡족하다. 문장 표현과 글의 구성, 그리고 문법 오류까지 정확하게 봐 준다. 심지어 글씨 크기, 글씨체까지 다 조언해 준다. 인사말과 맺음말도 점검해 준다. 학술 논문이나 자기소개서, 이력서뿐만 아니라 구두 발표 지문도 완전히 뜯어 고쳐준다. 학부나 대학원생뿐만 아니라 졸업생, 교직원 그리고 이들의 가족까지도 무료로 이용하게 한다."

- MIT대 글쓰기 도우미들을 어떻게 평가하나.
"영문학 또는 영어학에 학위를 갖고 있어 글을 봐주는 능력이 뛰어나다. 보고서나 논문의 취지를 10분 정도 설명하면 곧바로 이해한다. 그 다음에 학생들이 전달하려는 중심내용을 잘 드러낼 수 있도록 손질해 준다. 좀더 우수한 글이 되도록 안내해 주는 기술이 훌륭하다."

- MIT대에서는 왜 글쓰기교육을 중시한다고 생각하는가.
"MIT대에는 전 세계에서 우수한 인재가 몰려온다. 그런데 아무리 훌륭한 연구를 해도 논문을 쓸 때 명확하게 표현하지 못할 수가 있다. 그러면 그들의 창의적인 아이디어, 바꿔 말하면 그들의 천재성이 영어 때문에 묻힐 수 있다. 바로 이런 일을 막기 위해 MIT대에서는 전 학년에 걸쳐서 글쓰기를 정규과목으로 두고, '글쓰기와 의사소통센터'까지 설치한 것이다. 과학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는, 값진 연구 성과를 세상에 제대로 알리기 위해서는 글을 활용한 의사소통 능력이 필요하다. MIT대에서는 바로 그런 능력을 발휘하는 데 적잖은 투자를 하는 것이다."

"값진 연구 성과 알리려면 글쓰기 능력 필요"

- 그렇다면, 국내 이공계 대학의 석·박사 과정 학생들은 어떤 실정인가.
"영어 논문은 고사하고 한국어 논문을 쓰는 데도 어려움이 많다. 자연계열 학생들은 글쓰기 공부를 별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수한 논문은 영어로 작성하여 국제적인 저널에 발표해야 효과가 있다. 하지만 국내 이공계 석·박사 과정 학생들은 아무리 좋은 연구성과가 있다고 하더라도 영어로 논문을 쓰는 데 한계가 있다. 영어 논문 작성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을 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영어 논문 교정을 봐주는 업체에 맡기기도 하지만 질적으로 만족스럽지 않고, 비용도 무척 많이 든다."

- 비용이 얼마나 드나.
"영어 논문을 교정받는 데 장당 20~30달러다. A4 용지로 20~30장을 쓰다보니 400~900달러까지 든다. 교수 한 명이 1년에 4편의 영어 논문을 교정받는다면 1년에 3600달러까지 들 수 있다. 포항공대에는 230명 정도의 교수가 있다. 한번 계산해 보라. 영어 논문 교정 받는 데 적잖은 돈이 들어간다. 만약 교정전문업체에만 의존한다면 1년에 약 8억 원 정도가 여기에 소요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인터넷이나 우편으로 교정 받으면 서로 의사소통도 되지 않고 질적으로도 떨어진다. 효과가 미미하다는 것이다."

- 한국 대학에서는 글쓰기 지도를 받지 못했나.
"대부분 대학에 글쓰기 특강이 있지만, 학생들은 다른 전공 수업도 받아야 하고, 자신들의 연구 활동이 바빠 실제로 여기에 관심을 기울이기 힘들다. 또한 대규모로 진행하는 강의 만으로는 논문 쓰는 데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면 된다."

- 그러면, 교수들이 영어 논문을 꼼꼼하게 봐 줄 수는 없나.
"교수들도 바쁘다. 어느 학교든 마찬가지다. 영어 논문의 문장까지 검토해 줄 여유가 교수들에겐 없다."

- 우리나라 이공계 석·박사 과정의 학생들이 반드시 영어로 논문을 써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현대 국력은 군사력이 아니다. 문화과학기술력이 국력이다. 억울하지만 문화과학기술의 중심은 영어권에 있다. 영어로 논문을 써서 권위있는 해외 저널에 실어야 인정받을 수 있다. 그래서 거기에 필요한 실력을 닦아 놓아야 한다."

- 그러면 어떻게 해결하면 좋겠는가.
"MIT와 같이 영어 논문을 검토해 줄 수 있는 글쓰기센터를 대학에 설치하면 된다. 1대1로 첨삭지도를 받는 공식적인 글쓰기센터를 만들면 좋겠다. 영어 글쓰기가 필요한 학교는 반드시 제도 지원을 해야 한다. 글쓰기센터를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다. 글쓰기센터가 필요한 근본 이유는 국가경쟁력 확보에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무작정 과학기술 분야에 투자하지 말고, 그것이 꽃을 피울 수 있도록 영어 글쓰기 실력이 있는 인재를 기르자는 말이다."

"영어 글쓰기 실력 있는 인재 기르자"

- 글쓰기 도우미의 자격 조건을 이야기한다면.
"원어민이어야 한다. 꼭 이공계 출신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영어 보고서, 영어 논문을 정확하게 봐 줄 수 있으면 된다. 정말로 영어 글쓰기를 제대로 하는 사람을 초빙해야 한다."

- 미국 유학을 다녀온 사람들은 글쓰기 센터가 필요하다는 점을 다 알텐데 왜 지금까지 개선되지 않았나.
"'김포공항의 마법'이란 말이 있다. 이젠 '인천공항의 마법'에 걸렸다고 해야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수많은 미국 유학생이 영어 글쓰기, 영어 논문 작성법 때문에 고생을 하고도 귀국한 뒤에는 그 개선책을 촉구하는 데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한국으로 귀국하는 순간 그  모든 것을 망각하고 만다."

- 한국으로 귀국한 뒤에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한국에 돌아가면 글쓰기센터가 필요하다고 주장할 거다. 영어 글쓰기가 필요한 대학은 글쓰기센터를 마련해야 한다. 대기업에서 대학교에 건물을 지어주는데 차라리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글쓰기센터를 지어주면 좋겠다. 그런 점을 교육당국과 대학당국에 일깨워 주고 싶다."

- 영어로 보고서나 논문을 잘 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으나, 우선 국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 우리말을 잘 하는 사람이 영어도 잘 할 수 있다. 책도 읽고 글도 많이 써 봐야 한다. 영어 공부만 한다고 저절로 영어 글쓰기 실력이 느는 게 아니다. 국어 실력을 밑바탕에 깔아야 한다. 그래야 영어 논문을 잘 쓸 수 있는 토대를 닦을 수 있다."

MIT대 전자컴퓨터공학과 김성재 박사(왼쪽)가 글쓰기 도우미 아만다 소벨 씨에게 영어 보고서 작성에 대한 도움말을 듣고 있다.
▲ "이렇게 고치면 더 좋겠지요." MIT대 전자컴퓨터공학과 김성재 박사(왼쪽)가 글쓰기 도우미 아만다 소벨 씨에게 영어 보고서 작성에 대한 도움말을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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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글쓰기 잘하려면 우선 국어 공부부터 열심히"

- 결론으로 자연계열 학생들에게도 글쓰기 공부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인데.
"그렇다. 이런 이야기를 고등학교 자연계열 학생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자연계라는 이유로 국어와 글쓰기, 독서, 논술을 소홀히 하면 곤란하다. 과학기술 분야에서 성공하려면 국어 실력, 글쓰기 실력을 닦아 놓아야 한다. 정말로 이것을 명심했으면 좋겠다. 다만 자연계열에서 다루는 글쓰기, 독서, 논술은 어문계열의 그것과는 다른 방식이어야 한다."

- 한국에서는 상당수 대학이 정시모집에서 자연계 논술을 폐지하는 추세다. 어떻게 생각하나.
"그렇게 하면 안 된다. 멀리 내다본다면 자연계열 학생들에게도 논술고사를 실시하는 게 좋다. 그래야 학생들이 독서와 글쓰기 공부를 할 게 아닌가. 대입에서 논술고사가 없어져도 논술 공부를 해야 한다. 책도 읽고 생각도 하고, 자꾸 써 봐야 한다. 그래야 대학과 대학원에 진학한 뒤에 연구 성과를 낼 수 있다. 졸업 뒤에 업무를 할 때에도 글쓰기 능력은 여전히 중요하다. 국가경쟁력과도 연관된다. 한마디로, 이과생이 논술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이과생이라고 해서 독서·토론·논술을 하지 말라는 생각은 옳지 않다. 하지만,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그 논의 주제가 너무 문과적이지 않았으면 한다."

- 글을 잘 쓰기 위한 비결은.
"독서가 정답이다. 글의 구성에 신경 써 가면서 읽어야 한다. 책은 물론 미디어, 인터넷 정보, 다큐멘터리도 좋은 정보다. 가급적 소리내면서 읽는 게 좋다. 주장에 대한 논리적인 근거가 무엇인지 파악하면서 읽으면 좋다. 그 다음에 글을 많이 써 보고, 글을 잘 쓰는 사람에게 첨삭지도를 받는 게 좋다. 그 누군가에게 지적을 받아가면서 문장력을 키울 수 있다.
독서와 글쓰기를 하여 언어능력을 키우면 바로 여기서 창의적인 연구 능력이 나온다. 남의 글도 잘 평가할 수 있다. 날마다 일기라도 쓰면 인격 수양에도 좋고 언어능력이 자생적으로 생긴다. 내가 쓰는 표현에 대해서 성찰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아주', '잘' 등과 같이 애매모호한 표현 대신 좀더 구체적인 표현을 쓰게 된다."

- MIT대에 오기 전에는 글쓰기 공부를 어떻게 했나.
"학창 시절부터 날마다 일기를 썼다. 그 과정에서 이런 표현을 쓰면 좋지 않겠구나 하고 생각하고 그것을 자제했다. 예전에 쓴 편지를 보면 유치해서 웃음이 나온다. 최근에 쓰는 일기는 표현이 명료하다. 많이 발전한 것이다."

"'아주', '잘' 등과 같은 모호한 표현 대신 구체적인 표현 쓰도록 노력"

- MIT대에서 공부하는 데 경제적인 어려움은 없나.
"학생마다 차이가 있지만 한 학기 등록금과 생활비가 약 5000만 원 정도 든다. MIT대에 오는 일부 학생은 대기업 혹은 정부기관에서 장학금을 받고, 박사후 과정은 MIT에서 더 많은 지원을 받는다. 경력과 가족 수, 자녀 수에 따라 지원금이 달라진다."

- MIT대에서 공부하면서 인상 깊은 점은.
"교수들도 매 학기 평가받고, 점수가 낮으면 퇴출 당한다. 학생도 교수를 평가하는 것이다. 다른 데 비해서 경쟁이 치열하다. 그리고 학생들도 교수에게 평가되고 퇴출 당할 수도 있다. 인맥이나 학연에 의한 것이 아닌, 말 그대로 능력에 의한 평가를 한다."

- 한국 교육의 문제점이 무엇이라고 보나.
"획일성이 문제다. 초등학교에서부터 아침 조회 시간, 학생들을 운동장에 정렬해 놓고 훈화를 한다. 남들과 줄을 맞추어야 하고, 같은 옷을 입어야 하고, 같은 스타일로 머리를 잘라야 한다. 다르게 행동하면 체벌을 한다. 이와 달리 미국에서는 다양한 생각을 존중한다. 개인성을 중요시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다. 따라서 출제자가 생각하는 그 이상의 아이디어를 끄집어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어렵다. 미국은 개개인을 구속하거나 일일이 제어할 수 있을 만큼 국토가 작지 않다. 이것은 작은 원인에 불과하다. 여하튼 개개인의 특징, 개성이 없으면 안 된다. 그것이 있어야 살 수 있다."


태그:#과학글쓰기, #이공계글쓰기, #영어논문, #MIT,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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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출신 글쓰기 전문가. 스포츠조선에서 체육부 기자 역임. 월간조선, 주간조선, 경향신문 등에 글을 씀. 경희대, 경인교대, 한성대, 서울시립대, 인덕대 등서 강의. 연세대 석사 졸업 때 우수논문상 받은 '신문 글의 구성과 단락전개 연구'가 서울대 국어교재 ‘대학국어’에 모범예문 게재. ‘미국처럼 쓰고 일본처럼 읽어라’ ‘논술신공’ 등 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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