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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9일 일요일 낮. 반가운 전화벨이 울린다. 활빈당님의 전화.

 

"지금 어디세요?"

"집인데요."

"오늘 불갑사 바람꽃 산행 가실까요?"

"좋아요."

"지금 몇시지요? 2시까지 댁으로 갈게요."

 

손전화를 닫으며 나는 벌써 마음이 들뜬다. 내 들뜬 목소리가 내 집 앞에 사는 사촌아우에게 쪼르르 달려간다. 수화기를 놓으며 나는 산행 준비에 부산하다. 카메라 챙기랴, 삼각대 챙기랴, 렌즈 이것저것 점검하랴, 평소의 내가 아니다. 이미 내 마음은 바람꽃에 가 있다.

 

2시 정각 사촌아우와 함께 활빈당님의 차를 보해장성공장 정문 앞에서 얻어타고 출발. 활빈당님의 갤로퍼는 소리도 요란하게 달리기 시작한다. 차 대우가 좋지 않아서란다. 활빈당님, 벗에게 전화를 하며 웃기시는 말씀.

 

"지금 뭔 지랄하고 계세요?"

 

나는 혼자 속으로 킥 웃는다. 아 저렇게 재미있는 대화법도 있구나. 한 수 배웠다. 한 40분을 달리니 불갑사 경내에 들어가는 주차장 입구에 '마님 내외'가 반가운 얼굴로 마중을 나오신다. 맛있는 군밤 한 봉지는 선물. 불갑사를 왼쪽으로 끼고 산행에 오르니, 산 중턱에는 석산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일명 상사화. 잎과 꽃이 절대로 만나지를 않아서 이름도 상사화란다. 그 화려한 홍색 상사화가 지천이라니 생각만 해도 눈이 부시다.

 

白羊꽃

 

봄에 난 백양잎새 여름내 기지개 켜

한 생을 다하고는 이울고 만 미련을

안으로 삭이고 녹여 주홍으로 벌었네

 

봄살이 아사녀는 자취도 없는데

늦잠 깬 가실엔들 아사달 서러움을

몸 벗은 대궁에 담아 저렇게도 피었나

 

봄여름 아사녀가 애간장을 녹이다가

잎새는 꽃무릇 나기도 전 시들어도

못 만날 아사달 닮아 금주황을 뽑내나

 

백양 잎새 하 그리워 병이 된 저 想思花

서로들 딴 누리 안 벌거벗은 대공 끝에

붉으레 부끄럼 담아 사랑홈을 전하나

 

 

불갑사 저수지를 오른쪽에 끼고 산길로 접어드니, 아 그곳 물길의 깨끗함이여. 잡목 숲의 나무 잔가지 하나하나가 물 속에서 제 모습을 뽐내고 있는 게 아닌가! 아니 잔가지가 춤을 춘다고나 할까?

 

 

산길을 굽어 도니, 아, 이미 그곳에는 선착 바람꽃마니아들이 여기저기 땅에 엎드려 접사에 여념이 없는 것이 아닌가! 멀리서 보기에는 그저 낙엽이 뒹구는 매마른 숲에 곳곳에 돌들이 튀어나온 평범한 산야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눈을 내리깔고 보니, 새끼손톱보다 작은 꽃들이 흰 양자를 여기저기 드러내고 있다. 이름하여 '변산바람꽃'.

 

 

나라고 질세라, 카메라를 꺼내고 삼각대를 들고 덤빈다. 어쩌면 그 연약한 작은 꽃 속에 저런 절묘한 아름다운 세계가 열려 있을까 싶다. 시샘하듯 두 꽃잎이 서로 등지고 섰다. 세 꽃잎이 마주 하고 섰다.

 

 

따스한 봄바람 속 나서서 허위더위

행여나 속삭일까 혹시나 안아줄까

어쩌면 변산바람꽃 그 이름도 하얗네

 

 
접사를 한답시고 무릎을 꿇고는 찰칵, 내가 무슨 뱀이라고 배밀이로 찰칵, 그것도 모자라 옆으로 드러누워 또 한 컷 찰칵. 여기서 찰칵, 저기서 찰칵. 모두들 열심이다. 꽃들은 말이 없고…. 우리 활빈당 부회장님 어느새 내 곁에 오셔서는 그 매력 독특한 웃음으로 날 놀리신다.

 

"그러니까, 평소에 잘 하셔야지요. 지금 그렇게 무릎 꿇고 빌 일을 왜 하셨냐구요. 얼마나 잘못 했으면 그럽니까?"

 

활빈당 그러거나 말거나 모른다아

구도가 어떠하고 접사가 저떠하고

그것이 문제로구나 한 컷씩만 더 찍자

 

삼형제가 저렇게 너부죽이, 화사하게 세 얼굴을 드러내는데, 나더러 무릎 아픈 타령을 하라신다. 귓가에나 들어오겠는가. 어림 서푼어치도 없는 일.

 

 

"그래 말입니다. 많이 잘못 했지요."

 

내 대답은 건성이다. 눈 앞에 널려 있는 그 신기한 작은 꽃잎. 변산바람꽃이여. 웬만큼 찰칵 했으면 자리를 뜨잔다. 아쉬운 눈길을 그곳에 남겨두고 우리는 발길을 돌린다. 바삭바삭 산길을 걷는 기분이 그만이다. 공기는 청정, 꿈에 그리던 변산바람꽃의 환영을 받고 축복까지 줄사탕으로 얻은 지금, 무엇이 부러우랴.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건, 어느 고수 마니아께서 하시는 한탄.

 

작년엔 이 지역에 변산바람꽃밭을 이루어 여기 저기 널려 있었는데, 금년에 이렇게 조금 밖에 없단다. 누군가 손을 내밀어 자기만 좋자고 캐갔다는 얘기. 야생화는 야생화로 자라게 내버려 둘 수는 없는 것일까?

 

개울을 건너고 산길을 돌아 양지쪽 산마루에 이르니 그곳에도 마니아들이 찰칵에 여념이 없다. 나도, 우리 일행도 질세라 카메라를 드리민다. 아! 이것이 바로 '노루귀'

 

 

새하얀 그 자태를 안으로만 여미다가

살포시 안아두고 겨우내 꾸어온 꿈

이제사 드러내나니 삼형제의 소망을

 

 

왔는가 천상에서 고운 임 만나려고

새하얀 꽃잎꽃잎 두 귀를 쫑긋쫑긋

그 모습 노루를 닮아 노루귀란 말인가

 

 

저 빛깔 저리 고운 연분홍 꽃잎사귀

하느님 속옷자락 나 몰래 훔쳐두고

어쩌나 가여운 중생 헤실바실 기꺼워

 

 

꽃잎사귀 쫑긋쫑긋 노루귀를 닮아서 이름도 노루귀라. 그 이름 달아준 그 임 기지도 뛰어나겠다! 한참을 찰칵거리다 눈에 들어온 연분홍꽃. 그 이름은 '꿩의바람꽃'이란다. 아래로만 드리운 잎에 매달린 덜 벙근 꽃술. 그 꽃술은 겸손을 담아담아 아래로만 핀단다. 어느 아낙네 찰칵이가 아래로만 피는 게 아쉬워 꽃술을 들어올리려 애를 쓰는데, 고수께서 한 말씀 일깨워 주신다.

 

"그 '꿩의바람꽃'은 아래로만 핍니다. 그게 자연스러워요. 위로 피지 않으려는 꽃을 굳이 올리면 부러지고 말아요."

 

그렇다. 인생사도 그렇다. 물흐르듯이 되는 대로 가게 두면 모든 게 이루어진다.  道法自然이라 했다. 도란 자연을 법한다는 뜻. 곧 도란 자연의 이치를 본받는다는 말이다. 도라는 것이 별거냐. 저절로 그렇게 되어가는 것을 따라하면 그것이 바로 도라는 거다.

 

無爲而治者는 其舜也연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다스린 사람은 바로 순임금이로구나. 억지로 무엇을 하려 하지 않고도 백성을 다스린 사람은 순임금이라는 얘기다. 곧 무리를 하지 말고 순리대로 풀어 가라는 말이다. 우리 인생도, 우리의 사회도, 정치도 무리 없이 물 흐르듯이 저절로 굴러가게 놓아 두면 만사형통이 아닐까 싶다.

 

한 세상 살다 보면 지 잘났다 떠드는데

잎사귀 하나에도 깃들인 그 진리를

아뿔사 꿩의바람꽃 내 마음에 새기네

 

 

불갑산 뒷산 산굽이도 고마워 마음은 그곳에 두고두고 오고파. 저물어 가는 해를 나무라며 우리 일행은 하산길에 오른다. 무심한 해님은 석양에 뉘엿뉘엿 이 마음 아실까 모르실까? 아마도 모르실 거야. 저 멀리 산 넘어 석양이 타오르고 우리 일행은 하산을 서두른다. 오늘은 석양 빛이 유난히 곱다. 조화옹의 은총을 듬뿍 받은 포만감 때문일까? 마음은 어느새 大塊를 품안에 보듬은 포만감으로 터질 것만 같다. 저 멀리 저수지 수면 넘어 불갑사 전각들이 즐비하다.

 

 

빼놓을 수 없는 넉두리. 불갑사 주차장에서 우리는 헤어져야 하는데, 일행 중 대령님 왈,

 

"보리밥집에서 만날까요?"

 

내 대답.

 

" 기냥 가도 좋고, 보리밥 먹어도 좋고."

 

조금 비겁하지요? 이것도 저것도 아니잖아요? 결국은 '할매집'에서 우리는 만났다. 불갑사에서 그 집은 유명하다는 보리밥집. 보리밥에 동동주까지 한 잔 걸치고 행복 속에 우리는 내일을 기약하고 제 각각 제 갈 길로.

 

그런데 가다 보니, 뒤늦게 출발했던 '마님' 차 아니, 대령님차가 샛길로 우리를 앞지르지 않는가! 그리고는 사창까지 우리를 '캄보이'까지 해주신다. 헤어지는 길목에서 노란불 깜박깜박까지 받고 우리는 행복, 또 행복. 감사, 또 감사.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내내 오늘만 같아라.


태그:#불갑사, #변산바람꽃, #꿩의바람꽃, #노루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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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와 시와 문학과 야생화 사진에 관심이 많아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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