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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대통령이 2월 25일 오전 국회에서 대통령 취임선서를 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2월 25일 오전 국회에서 대통령 취임선서를 하고 있다.
ⓒ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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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화'와 '실용'.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사와 연이은 3·1절 기념사의 압도적 코드였다.

박근혜 전 대표는 씁쓸하겠다. '선진화'라는 말을 가장 많이, 가장 먼저 썼는데 말이다. 속으로 '저건 내 껀데' 할까? 정동영 전 의장 역시 씁쓸할 것이다. '실용'이라는 말을 많이 썼지만, '비리 내각, 지역편중 내각이 실용이라니' 한탄할 것이다.  

'선진화'와 '실용'이라는 단어로 온통 포장되었던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사는 지루했고, 3·1절 기념사는 거의 부끄러운 수준이었다. '산업화, 민주화 다음 단계가 선진화'까지는 최대한 이해하려 해도, '3·1정신이 선진화로 통하는 실용정신이라는 대목'에 이르면, 정말 낙제점 논술을 보는 것 같았다. 마치 상투적인 그 단어만 써 먹으면 논술 점수 잘 받을 거라 믿는 학생, 어쩌다 어려운 단어 하나 알고는 뜻도 모르면서 신나게 써먹는 아이 같다. 한마디로 진부하다.

개념이나 철학, 원칙이나 논리에 별 관심이 없어 보이는 이명박 정부지만, 부디 논술 시험 좀 보라, '선진화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모든 내각 장관, 청와대 참모, 기관장들. 아침 8시부터 회의한다니, 한 시간쯤 주고 논술 시험 보고 토론하면 좀 제대로 된 방향이 잡히지 않을까?    

나도 여기서 논술 시험 좀 보련다. 선진화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선진화'는 '후진적'을 전제로 열등감을 조장하는 말

'선진화'라는 말 자체는 영 탐탁하지 않다.(내가 26개월여 맡았던 대통령자문위원회 이름이 '건설기술·건축문화선진화위원회'였는데 내가 지은 이름이 아니니 어쩔 수 없었지만, 밖에 나가면 왜 선진화인가에 대해 설명해야 하니 딱한 노릇이었다. 그나마 '건설기술·건축문화'라는 특정 분야의 발전을 뜻하는 것이니 봐줄 만 했다. 한 컨벤션에서 '분야가 문제가 아니라 정치인, 관료, 제도가 후진적이라서 문제다'라 연설해서 우레 같은 박수를 받는 적이 있다. 그렇다. 정치권, 정치인, 관료, 제도가 후진적이라서 그렇게 '선진화, 선진화' 하는지도 모른다.)   

선진화라는 말은 열등감이 깔려있고 열등감을 조장하는 말이다. '후진적'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는 상대 비교적인 말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2월 25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제17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부인 김윤옥 여사와 함께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2월 25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제17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부인 김윤옥 여사와 함께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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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 사회가 지향해 온 '산업화'와 '민주화'는 세계보편적인 가치다. '산업화'란 목표가 뚜렷한 말이고, 가치중립적인 말이다. 영어로 'industralization'이란 17세기 산업혁명 이후 모든 사회의 문명적 가치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정보혁명과 더불어 새로운 굴뚝 없는 산업혁명이 진행되고 있다.

'민주화'는 인류보편적인 고매한 가치다. 영어로 'democratization'이란 18세기 시민혁명 이후 세계보편가치로서 특히 19세기, 20세기 제국주의와 독재화 현상 이후, 거의 모든 나라들에서 추구된 가치다. 하물며 미국에서도 1960년대 이후 새로운 민주화를 이루었다. 민주화란 아직도 '미완의 목표'이기도 하다. 민주화 수준은 지난 10년에 비해 높아졌지만 아직도 안착되지 않은 진행형의 과제다.

그런데 영어에 선진화란 말은 없다. 선진국(advanced nations, developed nations)이라는 말은 있지만, 선진국에서도 선진국, 선진화라는 말은 절대로 쓰지 않는다. 불필요하게 세계의 다른 나라들을 자극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만 이렇게 '선진국, 선진국, 선진화, 선진화' 읊는다.

예컨대 G8을 우리는 '서방선진 8개국회의'라고 번역한다. 영어로 G8은 간단하게 'Group of 8 countries'다. 그 G를 'Global'로 아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저 'Group'일 뿐이다. '8개국 회의'하면 할 것을 '서방선진 8개국회의'라 해야 속 시원한 우리 사회이니 이 열등감의 뿌리를 어찌 할꼬…. 사대주의 콤플렉스, 졸부 콤플렉스, 벼락부자 콤플렉스를.   

'선진화'의 기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진화라는 말을 받아들이고, 선진화의 기준은 도대체 무엇인가 기준을 세워보자. 나의 논술 답안지는 다음과 같다. 

1. 투명하다. 공적 가치가 확고하다.
2. 일정 경제수준을 지속 유지할 산업 기반이 있다.
3. 교육주택의료복지 인프라 수준이 높고, 높일 의지가 있다.
4. 민주주의 완성도가 높고 절차적 합리성이 보장된다.  
5. 법, 제도, 권력의 공정성에 대한 기본적 신뢰가 있다.
6. 공정시장경쟁, 기회균등, 공익적 형평과세 원칙이 투철하다.
7. 패권적인 글로벌 스탠더드에 휘둘리지 않는다. 
8. 성장 동력 발굴에 대한 자기혁신이 강하다.
9. 자국 문화에 대한 긍지와 타문화에 대한 존중이 서있다.
10. 사회적 약자, 소수자들의 국가와 사회에 대한 신뢰가 있다.
11. 지속가능한 생태환경을 지향한다.
12. 세계 평화에 기여한다.

나는 '더 믿을 수 있는 사회, 더 지속가능한 사회, 더 공유하는 사회, 더 소통하는 사회'가 더 좋은 사회를 위한 선진화의 기준이라고 부르고 싶다.    

'후진화'의 기준

하지만 이렇게 좋은 말로만 하면 잘 이해가 안 될 수 있으니, 오히려 '반면교사'적으로 '후진국' 또는 '후진화'의 기준을 다음과 같이 꼽아보면 어떨까? 

1. 부정, 부패, 비리, 부실이 만연해 있다. 
2. 권력 특혜, 탈법, 편법이 끊이지 않는다.  
3. 공정경쟁이 무시되고 독과점이 묵인된다. 
4. 민주주의 절차가 무시된다.
5. 계층 간 격차가 구조화되어 버린다.
6. 교육주택의료복지 수준이 퇴화한다.
7. 국가 및 사회 지도자에 대한 공적 신뢰가 무너진다. 
8. 국수주의적 문화가 횡행하고 무비판적으로 세계문물을 우상화한다.
9. 패권적 세계화에 휘둘린다.
10. 주체적인 성장 동력을 쌓지 못한다.
11. 생태환경을 훼손한다.
12. 세계평화에 위협적이다.

미국은, 두바이는 선진국일까

이런 선진화, 후진화의 기준으로 본다면, 미국은 정말 선진국일까? 부시 대통령 이후로 미국은 후진화하고 있지나 않나. 세계 평화를 가장 앞서서 위협하는 나라가 되어 버렸으니 말이다. 9·11 이후 미국의 극보수화한 분위기에서 한 미국인이 나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미국인이라는 사실이 이렇게 불편해본 적이 없다.(I never was so uncomfortable being American)" 그 인사의 자긍심은 무너지고 있던 거였다. 

이명박 정부가 한참 띄워주는 두바이는 선진국일까? 국회가 없는 나라, 투표권이 없는 나라가 어떻게 선진국인가? 아무리 돈 많은 군주가 모든 국민들에게 생활비를 나눠주고 교육주택의료 복지혜택을 다 주더라도 민주의 기본이 안 된 후진국이 두바이다. 언젠가 두바이의 민주화가 이루어질 때, 현재의 두바이는 모래성이 될 지도 모른다.

5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삼성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인사"라고 지목한 이명박 정부 신임 각료 후보들. 왼쪽부터 김성호 김성호 국정원장 후보자, 황영기 전 우리금융 회장(자료사진).
 5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삼성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인사"라고 지목한 이명박 정부 신임 각료 후보들. 왼쪽부터 김성호 김성호 국정원장 후보자, 황영기 전 우리금융 회장(자료사진).
ⓒ 오마이뉴스·우리은행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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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 사람들이여, '선진화' 논술 시험을 제대로 본 후에 고민해 보기 바란다.

1% 특권층 내각, 5%를 위한 정책, '고소영'-'강부자'-'S라인'-지역편중 인사, 영어몰입교육 강행, 대운하 강행, 대통령과 대기업을 연결한다는 기업핫라인 도입, 삼성 떡값 인사나 공정성 훼손 인사의 의혹을 받고 있는 인사를 원칙과 공정성이 가장 기본인 직책(국정원장,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 청와대 민정수석)에 기용하는 것이 과연 '선진화'로 가는 것인지?

멋모르고 '세계화'를 추진했다가 정작 진정한 세계화의 구조적 실체는 모르고 IMF 외환위기를 당한 '김영삼 정부'를 반면교사로 삼으라. 핵심에 충실하라. 겉멋으로 '선진화'를 국정 목표로 삼았다가 정작 진정한 구조적 선진화는 모르고 대한민국을 후진하게 하는 이명박 정부가 되지 않기를 진정 바란다.

'선진화' 주제 논술 시험. 제대로 좀 치르라. 
'선진화'의 철학과 개념과 원칙과 논리를 세우라.
부디 국민들과 함께 세우라.
부디 국민들 눈높이가 얼마나 바른지 귀를 기울이라.   
'선진화' 립서비스만 하지 말라.
하나하나 국정 현안에서 제대로 실천하라!
그게 '실용'이다.


태그:#선진화, #실용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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