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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아무것도 못해. 당신에게 다가갈 수 없어. 하지만 그렇게 해왔어. 멈추지 못해.”

 

아내(윤소정)는 28년 만에 출옥한 남편(이남희)과 함께 피아노 2중주를 치면서 숨가쁘게 외친다. 악보 없이 즉흥적으로 손 가는 대로 두드리는 건반의 불협화음 속에서 두 사람은 마침내 자신의 뜨거운 속내를 털어놓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난 당신을 도울 거야.”

 

일본의 사회파 극작가 사카테 요지의 작품을 김광보씨가 무대에 올린 연극 <블라인드 터치 Blind Touch>는 일본의 오키나와 반환투쟁 중 적극 시위에 나섰다가 경찰 서장을 죽였다는 죄목을 뒤집어 쓰고 무기수로 복역하던 남자가 반정부 반제국주의 운동가인 여인과 옥중 결혼한 지 16년 만에 가석방으로 출옥한다는 설정에서 시작한다. 

 

연극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현재의 오키나와는 15세기 초 류큐 왕국이 독자적인 생존을 모색한 일본 속의 섬나라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일본 본토로부터 지속적인 수탈을 당하다가 메이지 유신 이후 오키나와 현으로 일본에 편입되고 만다. 그러다 2차 세계대전 동안 한때 일본과 미국의 전쟁터로 변했다가 결국 미군에 의해 장악되는 비운을 겪는다. 

 

1969년에야 일본은 오키나와를 되찾아 왔다. 그러나 지금도 일본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기지의 70% 이상이 오키나와 전체 면적의 2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귀청을 찢는 전투기의 굉음이 일상화한, 전쟁의 기운이 상존하고 있는 땅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에서 줄기차게 이뤄지고 있는 미군기지의 반대운동과 평화적 저항운동은 ‘미군기지 반대’란 실천적 과제를 해결해야 할 전세계 민중들의 연대와 변혁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한 지 이미 오래다.

 

오키나와 반환협정 반대투쟁 중 공권력의 철퇴를 맞은 남편은 옥중에서 결혼한 지 16년 만에 아내와 한 방에서 마주보고 앉는다. 28년 만에 자유의 공기를 호흡한, 그러나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남편을 향해 “국가 폭력에 시달려 키가 작아진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아내의 농담 섞인 대사에 묻어두고 싶은 슬픔이 반짝인다.

 

오랜 감옥 생활 후 자격증은커녕 그 흔한 운전면허증도 없다는 자격지심 때문에 과민한 불안감에 시달리는 남편은 이제는 별볼일 없는 사회무능력자다. 그러나 혁명을 위해 싸웠다는 자부심 그리고 “팔레스타인 청년들의 자살 테러를 막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냐”는 무기력한 양심의 소리까지 듣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옥중 결혼 투쟁을 승리로 마치고 마침내 늦깍이 신혼을 맞은 중년부부이건만 남편의 현실 부적응과 투쟁방식의 차이 때문에 부부는 사사건건 의견 충돌을 빚게 된다. 그 과정에서 ‘엘비스 프레슬리는 미국 자본주의 상징이잖아요’란 대사도 등장한다.

 

주로 일상의 소소한 생활상을 코믹하게 다루는 소극장 연극계의 주류 속에서 시류 비판적인 대화를 자연스레 나눌 수 있는 중년 부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을 만난다는 것은 행운이다.

 

<블라인드 터치>에선 아차 방심하는 순간 자신들을 옭죄어 오는 자본주의의 상투적 사고방식, 그 틀을 깨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운동권 부부의 일상이 사실적인 연기 속에 녹아 있다. 여기에 사카테 요지가 구사한 감칠맛 나는 대사와 미묘한 심리 묘사는 자칫 지루할 수도 있는 2인극에 템포와 리듬을 불어넣는다.

 

현실을 반영하되 주장하지 않는 연극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김광보씨의 연출은 '제국주의 타도' 등 강도높은 사회적 비판성으로 경직될 위험성이 있는 연극을 ‘중년 부부의 알콩달콩한 사랑’의 형식에 깔끔하게 담아 놓았다.

 

이런 연출 의도 때문인지는 몰라도 우리나라 대다수 관객에게 생소한 오키나와 문제에 대한 배경 설명이 제대로 부각되지 못했다. 관객이 남편의 고통에 공감하기 보다는 사랑을 지키려고 하는 아내의 행동에 더 익숙하게 감응하는 까닭은 거기에 있다.

 

이는 사카테 요지가 ‘작가의 말’에서 밝힌, “이제까지 세상 흐름에 편승하지 않고 살아온 사람들이 있다는 걸 인정하고, 그들을 본받아서 근본적으로 변혁해야 한다”라는 일관된 메시지가 제대로 전달됐을까 하는 우려를 낳기도 한다. 

 

이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이번 16일까지 무대에 오르는 <블라인드 터치>는 극단의 명가 <산울림>의 2008년 해외 문제작 시리즈 제1탄으로서의 제 구실은 해냈다고 본다. 최악의 내각을 앞세워 출범한 이명박 정권이 걸음마를 걷기 시작한 요즘, 관객을 즐겁게 하는 연극 이상으로 정치적 사유를 자극하는 연극이 더욱 절실한 필요성으로 다가왔다는 확신을 느끼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일본 운동권 부부의 사랑 이야기


태그:#블라인드 터치, #사카테 요지, #김광보, #오키나와, #미군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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