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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는 아직 외롭다. 2005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주빈국으로 참가했던 대한민국은 그 많은 책을 보내면서도 우리의 자랑스런 전통시인 ‘시조집’ 한 권을 끼워 넣지 못했다. 수많은 예술원 회원이 있어도 시조시인은 축에 끼지를 못하게 하였고 중고생이 배우는 검인정 교과서에서는 게재 작품의 수를 과감히 삭감하는 대담함도 보였다.

 

그러나 이렇게 부박한 시조단에도 숨어 있어서 오히려 빛나는 시인들이 여럿 있다. 그 중 한 사람으로 김일연 시인을 꼽아도 큰 무리는 아닐 듯싶다. 최근에 책만드는집(대표 김영재)에서 출간된 시집 <명창>의 시편에는 행간 가득 따스함이 주조를 이루고 있음을 본다.

 

이미 네 권의 시집을 통해 수준 높은 시조의 모습을 보여준 김 시인의 신간에는 지천명의 아름답고 농익은 생각들이 가시처럼 박혀 있다. 이 가시는 미늘 같아서 쉽게 책장을 넘기지 못하고 되돌아보고, 곱씹어 보다가 밑줄을 긋게 하고 잠시 책을 덮고 눈을 감게 한다.

 

김 시인은 첫 시조집 <빈들의 집>과 <西域가는 길><저 혼자 꽃 필 때에>그리고 네 번째 시조집 <달집 태우기>를 통하여 수없는 ‘사랑’과 ‘그리움’의 양식이나 사고방식에 대해 고민하였지만 새 시집 <명창>에서는 한결 완숙하고 깊어진 면목을 거침없이 보여주고 있다. 이미 이지엽 교수와 박시교 시인이 김 시인의 작품론을 통하여 ‘사랑과 그리움의 화해정신’이나 ‘분출과 절제’라는 제목으로 평한 바 있음은 주목할 일이다.

 

윤기 도는 지렁이가 풀밭에 나와 있다

 

한참 지나 다시 봐도 가만히

누워 있다

 

햇볕에 몸은 마르는데 산새 깍깍 우는데

 

땅 위에

하늘 아래

장마 끝 환한 풀잎에

 

비이슬 묻어 있는 바람결 귀를 묻고

 

제 몸을 비우고 있는 크고 검은 지렁이

 

- ‘풍장‘ 전문

 

'이건 또 뭐지' 하는 생각이 드는 작품인데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커다란 부처님 탱화에 진신사리까지 박혀 있음을 알게 된다. 단지불회(但知不會)의 깨달음을 지렁이가 인간에게 설하고 있다. 세상 어디에 이렇게 엄청난 지렁이가 있을 수 있을까?

 

시인은 지렁이의 안위가 걱정되어 "햇볕에 몸은 마르는데 산새 깍깍 우는데"하며 발을 동동 구르고 안달을 하고 있지만 지렁이 보살님은 태연히 결가부좌 하신 채 미동도 없으시다. 지렁이는 몸에 물기가 마르면 죽을 수밖에 없고 또한 산새들이 제일 좋아하는 먹이가 지렁이 아닌가 말이다. 스스로 자신을 바람에 장사지내는 지렁이의 모습을 발견한 시인의 눈이 해맑고 인자하다.

 

박시교 시인이 시집에 얹어준 김일연론에서 거론한 열 편의 시는 물론 발군이지만 그 외에도 더 많은 시가 행간 가득 따스한 미소를 머금고 좌선 중이다. 특히 다 큰 자식을 둔 어머니가 된 시인은 지천명이 되어 자신의 부모를 다시 바라보고 있다. "온몸이 / 모서리가 된 / 둥근 이름 / 어머니"의 구절과 ‘에미에게’ 라고 제목 붙인 편, 그리고 "연필을 깎아주시던 아버지"와 "단정한 필통 속처럼 누운 가족"의 이야기인 ‘별’은 짠하고 맵게 눈시울 붉히게 하고 만다. 시인은 ‘봄 어느 날’ 에서는 도를 얻듯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살아도

살아봐도

가슴 아픈 날이면

 

밥 잘 먹고 똥 잘 누고 오줌 잘 누면

낫듯이

 

눈부신 세상 밖으로

나를

누고 싶어요

 

- ‘봄 어느 날’ 둘째 수

 

‘나를 누고 싶다’는 표현에 가슴이 먹먹해지고 그렇게 해서라도 새로워질 수 있기를 갈망하는 시인의 소망이 간절하다 못해 가슴이 서늘하다. 그것도 시치미를 뚝 뗀 채 ‘봄 어느 날’이란 제목을 붙여 놓다니, 그래서 더욱 기가 막히는 것이다.

 

정확히는 몰라도 김일연 시인은 지금 지천명의 내리막길을 시속 약 50킬로미터의 과속(?)으로 내닫고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지천명이 이렇게 아름답고 해맑은 눈을 가지게 되는 나이라면 나는 빨리 늙고 싶다. 과연 ‘명창’ 의 경지가 코앞이다.

 

"진초록에 끼얹는 / 뻐꾸기 / 먹빛 / 소리"가 봄날 툇마루에 앉아 꼬박꼬박 졸고 있는 먹당수의 귀에도 선하게 들리는 듯한 김일연 시인의 새 시집은 2008년 벽두 우리 시조단에 개구리 놀라 펄쩍 뛴다는 경칩 같은 시원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명창

김일연 지음, 책만드는집(2008)


태그:#김일연, #명창, #시조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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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한국작가회의, 한국시조시인협회 사무총장. 한국문학평화포럼 사무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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