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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하얗게 눈이 내렸고 그 시간에도 내렸습니다. 눈 내리는 아침이면 어디를 갈까하고 고민합니다. 어렸을 때야 참새를 잡겠다고 눈두렁으로 내달렸지만 지금은 달려갈 논두렁이 없으니 어디로 갈까 하고 갈등합니다.

 

멀지 않고 한적한 곳, 눈 맛은 즐길 수 있지만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으니 쉽게 찾아가기에 제격인 곳 중 한 곳이 대전에서는 현충원입니다.

 

정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니 깨끗하고 한적합니다. 나무니 비석이니 할 것 없이 소복을 입은 여인처럼 다소곳한 모습들입니다. 현충지에 도착하니 발자국 하나 없습니다. 여기저기 발자국을 남기며 호국영령이 된 님들의 그림자를 찾아봅니다. 인적이 들리면 쩍쩍 입을 벌리고 다가오던 비단잉어들도 얼음에 가려 보이지 않습니다.

 

현충지를 맴돌다 최규하 대통령이 안장되어 있는 국가원수 묘역으로 갔습니다. 일찍 출근한 경비원들이 눈을 치우고 있고, 우산으로 가린 향로에서는 꾸역꾸역 연기가 솟고 있습니다. 참배객들이 향을 사를 수 있게 하기 위해 불을 피우는 중이라고 하였습니다.

 

국가원수묘역을 내려와 일반 병사의 묘역으로 갔습니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모여 있다면 시끌벅적하겠지만 조용하기만 합니다. 움직임도 없고 소곤거림도 없습니다.

 

 

호국영령들의 마음을 달래려 세워놓았겠지만 그 돌비석에 담겨진 시어에서 철철 눈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조국을 사랑했기에

청춘도 정든 님도 기꺼이 버리고

스스로 장열한 죽음을 택하였는가.

그대 몸은 부서져 가루가 되고

피는 흘러서 이슬이 되었거니

아 용사여 고이 잠들라.

 

정말 그들이 스스로 장열한 죽음을 택하였는지 궁금합니다. 분단된 조국, 졸렬한 국방정책이나 열악한 근무조건이 그들을 사지로 몰아넣었던 것은 아닌 가 모르겠습니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묘역도, 의자도 텅 비어 있습니다. 흘러내리는 눈 물에서 청춘들이 흘린 눈물이 보이고, 불어오는 바람에서 죽어간 청춘들이 토하는 한숨소리가 들립니다.

 

나뭇가지를 흔드는 바람소리에 ‘너무 그러지 마. 네 대통령, 내 대통령이 아닌 우리 대통령이잖아. 선거과정에서는 지지하지 않았더라도 어차피 5년 동안 국정을 책임질 대통령이니 잘 돼야지. 그래야 우리도 잘 되는 거 아녀?’ 하고 말하던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이명박 정부의 초대 내각 후임자의 명단이 발표되면서 시작된 이름타령, 이런 이름을 가진 사람들로 초대 내각을 이룬다고 하니 걱정이지 하며 줄줄이 늘어놓는 억지소리를 듣다 못한 아내가 한 말이 ‘우리 대통령’입니다.

 

대전 현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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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윤수

 

한나라당의 전신, 민정당의 근간이 되었을 국보위원으로 까지 활동하였으니 한나라당의 전통과 업보를 그대로 승수(承受)하고 하였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국무총리 후보 한승수. 대통령의 우익(오른쪽 날개)이라 할 수 있지만 보좌를 잘못하면 익우유(익힌 우유)가 되어 썩은 냄새가 진동할 수도 있는 비서실장 유우익, 남의 가슴에 빨갱이라는 주홍글씨를 서슴없이 써내려가던 통일부장관 후보 남주홍, 한때는 유전무죄 무전유죄, 유식무죄 무식유죄라는 신조어가 횡횡할 정도로 돈 없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게만 경한(무섭고 사나운) 인상을 주었던 법무부 장관 후보 이경한 등을 들먹이며 이름 투정을 하였었습니다.

 

물론 그 정점에 있는 대통령의 이름도 들먹였습니다. '명박이 무슨 뜻인지 알아? 운명이나 팔자가 기구하고 복이 없는 걸 명박하다고 해. 이명박 정부가 명박한 정부가 되면 우리 모두는 필자가 기구하고 복이 없는 국민이 되는 겨'.

 

부모를 때려죽인 원수도, 돈을 떼어 먹고 도망 간 빚쟁이도 아니지만 출생지의 비밀로부터 시작된 수많은 의혹 때문에 이건 아니라고 단정하고 나니 만사가 위선과 거짓으로만 보였던 게 사실입니다. 그렇게 보이니 싫어지고, 싫어지니 미워졌습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면 버선 뒤꿈치까지 미워진다더니 발표되는 이름들조차 그랬습니다.

 

'검은 머리 외국인' 부모들 이름이 득실거리는 내각 명단

 

남한 땅에 빨갱이라는 주홍글씨를 팍팍 써 가던 통일부 장관 후보자가 검은 머리의 외국인(미국 시민권자를 BBK특검에서 이렇게 불렀습니다) 아버지며 탈세의혹 혐의까지 있다는 보도를 보고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검은머리를 가진 외국인의 부모들이 얼마나 검은 머리를 가진 백의민족, 한국인이 살아갈 조국의 미래를 위해 고민하고 헌신할지가 걱정입니다.

 

이런 걱정 저런 고민을 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충원을 둘러보고 나오며 떠올린 말은 바로 ‘우리대통령’. 이름 타령을 하는 필자에게 핀잔을 주듯 아내가 하였던 '우리대통령' 이라는 말입니다.

 

5년 후, 이명박 정부가 끝날 때는 싫어함을 넘어 미워하기 까지 했던 5년 전의 필자가 정말 지나간 미움과 싫어함을 부끄러워 할 수 있도록 올곧은 국정을 펼쳐나가길 기원하는 마음으로 현충원 정문을 나섰습니다. 

 

그렇게 많음에도 숨소리 하나 내지 못했던 흰 눈 속의 호국영령들도 ‘우리 대통령’이 잘 해나가길 기원할 겁니다. 언젠가는 현충원 제일 꼭대기에 자리하고 있는 국가원수묘역으로 오게 될 주인공이니 그 자리에 부끄럽지 않은 우리 대통령이 되길 기원합니다.


태그:#현충원, #내각, #주홍글씨, #빨갱이, #국가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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