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지난 5일 별세한 독립운동가 조문기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의 노제가 11일 부민관 폭파 의거 현장인 중구 태평로 서울시의회 본관 앞에서 엄수되고 있다.
 지난 5일 별세한 독립운동가 조문기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의 노제가 11일 부민관 폭파 의거 현장인 중구 태평로 서울시의회 본관 앞에서 엄수되고 있다.
ⓒ 남소연

관련사진보기


조국 독립과 민족사 광정을 위해 평생을 바친 독립운동가 고 조문기 선생의 영결식이 2월 11일(월) 오전 10시 서울 성공회 대성당 성프란시스홀에서 겨레장으로 엄수된다. 겨레장은 고 문익환 목사 장례 이후 두 번째이다.

시민사회와 독립운동계, 학계, 정계를 망라한 각계 원로 중진으로 구성된 "독립투사 고 조문기 선생 겨레장 장례위원회"는 이날 오전 7시 대학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발인을 하고, 생전 고인이 이사장으로 몸 담았던 민족문제연구소를 들른 뒤 성공회 대성당으로 이동, 영결식을 거행할 예정이다.

영결식을 마친 후에 부민관 폭파 의거 현장인 서울시의회 본관(중구 태평로)에서 다시 노제를 지낸 후 오전 11시 서울을 출발하여 수원 자택을 경유해 오후 3시 대전 국립 현충원 애국지사 제3묘역에서 안장식을 거행한다. 유족으로는 부인 장영심 여사, 딸 조정화, 사위 김석화, 외손녀 슬아, 슬샘, 양자 조강협이 있다.

조문기 선생은 누구인가

조문기 선생은 1945년 7월 24일 일제강점기 마지막 의열투쟁으로 널리 알려진 '부민관 폭파 의거'의 주역이다. 1944년 소년의 몸으로 일본강관주식회사에서 3000여 명의 조선인 노동자가 참여한 '조선인 멸시 규탄 파업'을 주도했다. 선생은 1945년 1월 조국으로 돌아와 항일비밀결사 단체인 '대한애국청년당(약칭 애청)'을 조직하고 친일파 거두인 박춘금과 총독부 주요 인사들을 처단할 계획을 세웠다.

박춘금의 '대의당' 집회 광고를 보고 7월 24일 친일거두가 총집결한 아세아민족분격대회장인 부민관 폭파 의거를 결행했다. 이 의거는 가혹한 전시체제하에서 숨죽여 지내던 민중들에게 저항정신을 일깨웠으며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가 굳건히 살아 있음을 만천하에 과시하였다.

해방 후에도 선생은 '대한애국청년당'을 재결성하고 '인민청년군(대한청년군)'을 조직, 조국의 완전한 독립과 통일을 위한 투쟁을 중단하지 않으셨다. 1948년 6월 2일 이승만의 단독정부수립 기도에 저항하여 '인민청년군 사건'을 일으켰고, 그 결과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분단과 상처투성이 조국에서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한 선생은 10년 정도 연극배우로서 유랑생활을 하신 적도 있다. 1959년 다시 '현실'로 돌아온 선생은 난데없이 '대통령 암살, 정부 전복 음모 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갖은 고초를 겪었다. 이때 당한 고문으로 허리를 다 펴지도 못하는 심각한 후유증을 평생 겪으셨다.

독립운동가 고 조문기 선생
 독립운동가 고 조문기 선생
ⓒ 오마이뉴스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선생께서 "독립이 되었어도 그 독립은 친일파들의 독립이요, 해방이었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후에도 선생은 온 가족이 굶기 일쑤였던 생활고 속에서도 독립유공자로 이름 올리기를 끝내 거부했다. 부인까지 몸져눕게 되자 보다 못해 사위가 몰래 독립유공자로 등록해 선생은 1982년에야 '건국포장'을 받았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하고 1983년부터 '광복회 독립정신 홍보위원회' 홍보위원이 되어 전국 순회강연을 다녔고, 1991년부터 8년간 광복회 경기도 지부장을 역임했다.

1991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출범하자 "친일청산은 바로 오늘의 독립운동이다"라는 신념으로 투신, 1999년 민족문제연구소 2대 이사장에 취임하여 오늘까지 친일청산을 위해 온힘을 쏟아오셨다. 정부가 개최하는 3·1절이나 8·15 광복절 행사에 참석하기보다 진정한 조국독립을 위해 거리의 투쟁을 선택하셨던 선생의 마지막 소원은 '친일인명사전' 편찬이었다.

그러나 2006년 11월 혈액암 진단을 받아 자택이 있는 수원과 서울을 오가며 항암치료를 받던 중 몸이 더욱 쇠약해져 치료를 중단하고 요양병원에 장기 입원하셨다. 최근 다소 병세가 호전되었으나 갑자기 악화하여 지난 2월 1일 중환자실로 옮기셨다가, 2월 5일 5시경 향년 82세로 별세하셨다. 생전 선생이 그토록 고대하던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불과 6개월 남짓 앞두고 별세함으로써 후진들의 애통함을 더하고 있다.

"나의 독립운동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독립운동사는 독립운동가만의 역사가 아니다. 미래를, 후손을 위한 운동이다. 과거사 청산은 친일파 청산부터 첫 발을 내디뎌야 하고, 친일파 청산이 안 된 지금의 한국사회는 여전히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선생의 어록에서)
11일 조문기 선생 겨레장 관련 사항
장례일정

7:00  발인식
7:30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출발
8:20  민족문제연구소 도착, 노제
9:00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소 출발
9:50  성공회 대성당 도착
10:00 영결식 거행
10:40 부민관(현 서울시의회 본관)에서 노제 거행
11:00 서울 출발 수원자택 경유, 대전 묘역으로 운구
14:30 대전 국립현충원 도착
15:00 안장식 거행

공고  

독립투사 고(故) 조문기선생 겨레장

조국 독립과 민족사 광정(匡正)을 위해 평생을 바친 독립운동가 조문기(趙文紀) 선생께서 2008년 2월 5일 오후 5시 향년 82세로 별세하셨습니다. 

빈  소 : 서울대병원(서울 대학로) 장례식장 1호
발  인 : 2008년 2월 11일(월) 오전 7시
노 제1 : 2008년 2월 11일(월) 오전 8시30분 민족문제연구소(서울 청량리)
영결식 : 2008년 2월 11일(월) 오전 10시 성공회 대성당 성프란시스홀(서울 정동)
노 제2 : 2008년 2월 11일(월) 오전 10시40분 부민관폭파의거 현장(현 서울시의회 본관)
안장식 : 2008년 2월 11일(월) 오후 3시 대전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3묘역
유  족 : 부인 장영심, 딸 조정화, 사위 김석화, 외손녀 슬아 슬샘, 양자 조강협
호  상 : 조택기 류종하
연락처 : 빈소 (02) 2072-2091, 2 / 민족문제연구소 (02) 969-0226 / 누리집 www.minjok.or.kr

고인의 약력

1926 경기 화성 출생
1944 일본강관주식회사 파업 주도, 지명 수배
1945 대한애국청년당 결성
1945.7.24 부민관 폭파 의거
1948 단독정부 수립 반대운동(‘인민청년단 사건’) 옥고
1951 <황금좌><고려> 등에서 극단 활동
1959 ‘이승만 대통령 암살, 정부전복음모 조작사건’으로 투옥
1982 건국포장
1983-1988 광복회 독립정신 홍보위원
1990 건국훈장 애국장
1991-1999 광복회 경기도지부 지부장
1999 (현)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2001 (현) 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이사장

장례위원회 

▲ 고문 :

강만길 강희남 구중서 고광돈 고은 고종훈 곽태영 권오헌 김국주 김상근 김우전 김자동 김창국 김채룡 김태영 김호일 리영희 박문 박상유 박영석 박용길 박정기 박중기 박현서 박형규 배다지 백기완 백낙청 서영훈 석근영 성대경 손장섭 송기인 송월주 신경림 신용하 염무웅 원동석 윤경빈 윤규섭 윤병석 윤석진 이관복 이규재 이기형 이대성 이돈명 이명한 이만열 이소선 이신재 이연복 이우성 이이화 이재정 이종찬 이준호 이창복 이해동 임명선 임방규 장두석 전기호 정광훈 정창렬 조동걸 주종환 지    선 최도균 최   염 한상범 한승헌 한완상 한준수 현기영 홍근수 황갑수 황승일 황의병

▲ 공동장례위원장 : 임헌영  윤경로  오종렬  최병모  함세웅

▲ 장례위원 :

강기갑 강내희 강요배 강정구 강창일 고승하 구양근 권낙기 권영길 권오창 김금옥 김동진 김민영 김삼열 김삼웅  김서중  김시업  김영수  김용태 김원웅 김유선 김은주 김장하 김정륙   김정명신  김준형  김지희

김채현 김학윤 김홍명 김흥현 남만우 남윤인순 노동은 단병호 명진 민만기 민성진 박석률 박성준 박순희 박원순 박정곤 백승헌  법   륜  법   타 서  승 서중석 석원정 신영복 신태섭 심상정 안병옥 안병욱 안홍순 여태명 오연호 오정환 원희룡 유기홍 유민 윤금순 윤기진 윤덕한 윤범모 윤준하 이강실 이건영 이문옥 이범증 이병하 이석태 이석행 이성순 이수호 이승호 이영 이영순 이용식 이장희 이종걸 이학영 이항증 이해학 이희자 임명진 임종대 임진택 장병화 장영달 전병덕 전종훈 정상모 정재돈 정진한 조덕원 조성우 조정래 주봉희 주섭일 진관 진광수 진영옥 채희완 천영세 최순영 최용규 최재성 표명렬 한도숙 한명수 한명숙 한상열 한수산 한충목 허   연 허영구 현애자 홍세화 홍순권 황상익 효   림

▲ 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모임(전현직) :

김희선 강성종 강혜숙 고진화 권오을 김낙순 김부겸 김성호 김영춘 김영환 김충환 김태년 김태홍 김효석 노웅래 노현송 문병호 문석호 문학진 박기춘 박명광 박상돈 박상희 박시균 박영선 배기선 서상섭 서재관 설송웅 설훈 송광호 송영길 신기남 신중식 심재권 안영근 양승조 양형일 오영식 오제세 우상호 우원식 원유철 원혜영 유선호 윤원호 윤호중 이강래 이광재 이목희 이미경 이상수 이용희 이인영 이종걸 이호웅 이화영 임종석 전갑길 전병헌 정동영 정동채 정세균 정장선 정청래 제종길 조배숙 조정식 천정배 최규식 최용규 최철국

공동집행위원장 : 이봉원 박석운 조세열
총무위원회 임명호 박수현 방학진
조직위원회 이건 한용진 홍소연
홍보위원회 정희섭 박한용 한선범
의전위원회 김민수 서우영 김재훈
운구위원회 김용삼 김종대 육철희
치산위원회 차영조 박기서 류현선

▲ 집행위원 :

강범희 강성률 강태식 김태현 고동주 고정휴 권성원 권철 길윤형 김경일 김경현 김근태 김기승 김남수 김대기 김대웅 김덕영 김덕진 김도형 김도훈 김동명 김동민 김동수 김동춘 김명구 김민철 김사열 김상균 김상기 김상철 김상태 김석규 김성보 김성종 김성혁 김성호 김순석 김순흥 김승교 김승태 김애화 김영만 김영훈 김용일 김용한 김우용 김은식 김익한 김인식 김일수 김일진 김장호 김재민 김점구 김정인 김종천 김지철 김진한 김철희 김하욱 김학철 김형목 김호룡 김홍진 김희곤 김희수 나기주 남기형 남요원 남주우 노경채 노시선 노인호 도면회 도종환 도진순 류시현 문만기 문병준 문영주 민경우 민삼홍 박노정 박도 박만호 박맑음 박승철 박영철 박인근 박인배 박정치 박종린 박종화 박주권 박찬승 박철하 박태균 박해전박혜경 박환 반병률 방기중 배동식 배항섭 백남현 변은진 서용원 서용희 석태진 성효숙 손병휘 손석춘 송규진 송복남 송재석 송진복 신명식 신용승 신용옥 신주백 신창헌 신현호 신화승 안건호 안지중 안진 양수철 양영국 양원근 양윤모 양태조 양해동 엄창휘 여인철 여환권 오길성 오미일 오병택 오영섭 오유석 오한흥 오형민 우대형 우문숙 원병호 유동성 유은호 유흥근 윤석진 윤선자 윤용황 윤원일 윤종일 윤창현 윤천근 윤해동 윤흥만 음성일 이경란 이규봉 이규중 이기훈 이덕우 이동수 이동일 이동철 이린 이명화 이상의 이상인 이세일 이수봉 이승렬 이애숙 이영철 이용길 이용위 이용창 이우구 이윤 이윤갑 이윤옥 이은희 이정학 이재명 이재오 이정은 이종락 이종숙 이준식 이준영 이지원 이철민 이철수 이태헌 이태호 이호헌 이효인 임경석 임기환 임대식 임만택 임은숙 임정택 장대현 장석흥 장세윤 장신 장완익 장이근 전상숙 전영복 전우용 전재진 정규학 정길화 정대연 정도상 정병욱 정병준 정비파 정명수 정숭교 정연하 정용섭 정용욱 정운현 정윤택 정재정 정준모 정태헌 정하진 정해구 정해랑 조국 조동걸 조동기 조세현 조재곤 조현종 조현철 주제준 주진오 지수걸 진경호 진태준 차선혜 최기영 최병문 최수전 최열 최영옥 최옥영 최용철 최재흔 최정규 최현수 하원호 한긍희 한동민 한상구 한상권 한상도 한송본 한시준 한철호 한호석 한화교 허달용 허수열 허영란 홍갑표 홍성담 홍소연 홍원식 황구화 황규철 황보윤식 황영선 황평우   

독립투사 고(故) 조문기선생 겨레장 장례위원회


태그:#조문기, #민족문제연구소, #친일파, #친일인명사전
댓글

1949년 친일파에 의해 와해된 반민특위의 정신과 친일문제 연구에 평생을 바친 故 임종국 선생의 유지를 이어 1991년에 설립되었습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