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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너 일루와 윷놀자.”

“네~”

 

윷놀자는 할머니 말씀에 아들 녀석은 군소리가 없습니다. 내가 뭐라도 한 마디 부탁하면 어깃장을 놓기 일쑤인데 할머니가 한 마디 하면 뒷말 없이 다 듣습니다. 윷가락 던지며 따라붙는 할머니와 손자가 윷을 던지며 엎치락뒤치락 댑니다. 

 

 

“와~ 다섯 판에서 한 판만 이기다니, 역시 홈그라운드의 힘이 무섭다 무서워.”

 

윷놀이를 끝내자 녀석이 말합니다. 지난 번 할머니가 우리 집에서 하실 때는 매번 지더니 할머니네 집에서는 자기가 할 때마다 진다는 거였습니다.

 

오랜만에 많은 식구들이 또 모였습니다. 시어머니(엄니)가 계시는 곳으로 친척들이 모여 들 때마다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마구 나옵니다.

 

“와, 얘가 누구야? 벌써 이렇게 컸네~”

“정말 몰라보겠다. 이제 엄마 키를 훌쩍 넘었구나!”

 

서로 반가운 시간이 얼추 지나면 이젠 먹을거리를 나눕니다. 이것저것 먹어보라고 건네며 어떤 음식이 몸에 좋은지 알려주기도 합니다. 밥을 먹고 나면 입맛대로 커피나 전통차를 마십니다. 사과나 배를 깎아 ‘여기저기’ 갖다 놓다 보면 슬그머니 웃음이 납니다. 어찌 그리도 격이 맞게 모여 있는지 말입니다. 

 

나는 며느리로 며느리들끼리 모인 곳에서 한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우리가 앉은 자리는 주방 가까운 식탁입니다. 나와 내 아래 두 동서, 그러니까 삼동서는 이제 모두 40대입니다. 젊지도 않고 그렇다고 늙은 나이라고 하기엔 애매한 세대입니다.

 

30대 조카들이 우리가 있는 자리로 하나 둘 모였습니다. 이젠 조카들의 아이들도 초등학생이거나 중학생이 되는 나이가 됩니다. 어느 새 나이로 치면 엊그제만 해도 내 나이였던 곳으로 들어와 있습니다. 속절없이 먹는 나이. 한 두올 흰 머리가 언뜻 눈에 띄더니 어느 새 걷잡을 수 없는 흰 머리카락이 드러납니다. 거침없이 찾아드는 흰머리를 가래로 막았더니 어느 새 옆길로 돌아서 왔더라는 우리네 조상님네의 익살이 떠오릅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올해도 어김없이 윷판이 벌어지고, 아흔이 넘어 이제는 숨도 가뿐 엄니의 손놀림에 힘이 넘쳐 보입니다.

 

거의 다 왔는가 싶으면 어느 새 우수수 쏟아지는 모와 윷이 한꺼번에 세 동을 다 잡아버리고 반전이 되어 버립니다. 상대팀은 풀이 죽어갈 무렵에 또 다시 뒷도(‘빠꾸 도’)를 하거나 함정으로 해 놓은 ‘지옥’ 칸에 빠져서 다시 전세는 상태팀으로 넘어갑니다.

 

그럴 때 마다 집안 가득 웃음과 탄성과 환호가 엇갈려 집안으로 넘쳐납니다. 손주와 할머니가 어느새 3대를 넘어 4대로 이어지고 이 한 가족의 품 안에서 무자년 새해가 힘차게 춤을 춥니다.

 

 

한 해가 가는 길목에 가족들은 지난 헌 해를 털고 새해를 윷판으로 맞습니다. 윷판은 어찌 보면 우리네 인생을 보여주는 듯 합니다. 거의 다 져서 실낱만큼도 희망이 보이지 않다가도 전세가 뒤 바뀌어 갑자기 환하게 바뀌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이건 굽힘없이 온 정성을 다해 살아가는 모습을 오늘 가족의 윷판을 보며 새삼 느끼게 됩니다.

 

손주의 손과 왕할머니의 손을 떠나는 순간 윷은 기껏해야 도, 개, 걸, 윷, 모, 그리고 뒷도가 나오는 여섯 가지 중 하나이지만, 온갖 다채로운 진행과 웃음을 엮어냅니다. 엄니가 벌려놓는 윷판은 명절날 온 가족이 즐기는 놀이입니다.

 

윷판이 벌어질 때마다 주름살로 쪼글쪼글한 엄니 얼굴에는 어쩌면 저렇게 곱디고운 웃음이 들어있는지 정말 신기할 정도입니다. 윷가락을 던지는 가족들의 손놀림에는 벌써 따스한 봄이 와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sbs u포터에 송고예정입니다.


태그:#윷놀이, #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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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가면을 줘보게, 그럼 진실을 말하게 될 테니까. 오스카와일드<거짓의 쇠락>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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