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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석(鮑石)이 무슨 뜻이래요?

포석정: 전복 모양의 석조물
 포석정: 전복 모양의 석조물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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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을 일주하려는 사람은 먼저 포석마을로 가야 한다. 이곳에는 큰 주차장이 있어 차를 세우기가 좋다. 차에서 내리면 동쪽으로 문이 있고 그 안에 포석정이 있다. 포석, 포석정, 도대체 포석정이 무슨 뜻일까? 옥편에 찾아보니 포(鮑)자가 절인 생선 포이다. 아니 산 속에 무슨 생선이람?

생각을 하면서 현장에 도착하니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이라는 이름의 석조구조물이 보인다. 유상곡수연은 또 뭐야? 어려운 말 때문에 조금 부담이 된다. 상(觴)자가 어려워 옥편을 찾아보니 술잔 상이다. 그렇다면 유상곡수연은 “흐르는 물에 잔을 띄워 구불구불 돌게 하면서 벌이는 잔치”라는 뜻이 된다. 그런데 이 구불구불 만든 석조물이 전복 모양이라는 것이다. 아하, 그래서 포석이라는 이름이 붙었구나. 이제야 조금 이해가 된다.

포석정에는 38년 전 추억이 있다. 중학교 2학년 때인 1970년 수학여행을 경주로 와서 이곳을 찾았던 기억이 난다. 그때 이곳 포석정에 와서 크게 실망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당시 선생님으로부터 술잔을 돌리며 연회를 베풀던 멋진 장소라고 들었는데, 현장에서 보니 쓸쓸하기 이르데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부 사람들이 발에 붙은 흙을 석조 구조물에 득득 긁어 붙여, 포석정이 이름값도 못하는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포석정의 아침
 포석정의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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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오늘 아침은 우리가 가장 먼저 들어와서인지 포석정이 아주 조용하고 분위기가 있다. 나무들 사이에 구불구불 흘러 도는 돌난간이 시선을 끈다. 그런데 물이 없어 쓸쓸하기는 마찬가지다. 돌난간을 한 바퀴 돌면서 옛 사람들이 즐겼던 연회를 생각해 본다. 그 연회라는 것이 즐거운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반대로 나라의 운명을 바꿔놓은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약 1100년 전인 927년(경애왕 4) 11월, 경애왕은 이곳 포석정에서 연회를 베풀다 참혹한 일을 당하고 말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2, ‘경애왕’조에 따르면 경애왕은 후백제 왕인 견훤의 공격을 받아 이곳 포석정에서 궁궐로 피신하였으나 잡혀 자살하고 만다. 이 포석정 연회는 신라가 멸망의 길로 들어서는 가장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나무에 둘러 싸인 포석정
 나무에 둘러 싸인 포석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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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비빈과 종척으로 더불어 포석정에 가서 잔치하며 즐겁게 놀던 때라 적병이 닥침을 알지 못하였다. 창졸히 어찌할 바를 몰라 왕은 비와 함께 후궁으로 달려 들어가고 종척 공경대부 사녀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쳤다. […] 견훤은 군사를 놓아 신라왕을 찾아내게 하였다. 왕은 비첩 몇 사람과 함께 후궁에 숨어 있다가 군중(軍中)으로 잡혀갔는데 훤은 왕을 핍박하여 자진케 하였다.”
 
포석정을 나오는데 한 떼의 유치원생들이 들어온다. 이들을 인솔한 교사들은 아이들에게 포석정에 대해 하나라도 더 알려주려고 열심히 설명을 한다. 저 한마디가 어떤 아이에게는 큰 감동이 되어 역사를 보는 눈을 생겨나게도 할 테고, 또 삶의 자세를 가다듬도록 할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저게 바로 경주에 사는 어린이들이 누리는 혜택일 것이다. 

일주도로에서 조금 떨어진 지마왕릉

푸근한 인상의 지마왕릉
 푸근한 인상의 지마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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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석정을 나와 일주도로 오른편으로 조금 들어가면 지마왕릉(祗摩王陵)이 나온다. 지마왕릉은 원형봉토분만 있는 아주 단순한 형태이다. 신라 초기만 하더라도 왕릉에 석재를 전혀 쓰지 않아 아주 편안한 느낌이다. 이곳 지마왕릉에 보니 누가 능돌이를 했는지 봉분 주위로 둥글게 잔디를 밟은 흔적이 보인다.

지마왕릉은 밑둘레가 38m, 높이가 3.4m로 흙을 둥글게 쌓아 올린 원형봉토분이다. 지마왕은 신라 제6대 왕으로 5대 파사왕의 아들이다. 당시 신라는 백제와는 사신을 교환하는 우호적인 관계였고, 이웃하고 있는 가야와는 갈등 관계에 있었다. 그리고 왜(倭)와도 갈등관계에 있었고 북쪽에서는 말갈이 쳐들어와 대외적으로 상당히 어려운 입장에 있었던 것 같다. 내적으로도 흉년, 홍수, 화재 등 어려운 일이 많아 전체적으로 어려운 시절을 보낸 왕이다. 이때만 하더라도 신라는 아직 변방의 작은 나라에 불과해 독자적으로 살아가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사람들이 능돌이를 한 흔적
 사람들이 능돌이를 한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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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마왕릉을 보았으니 우리는 이번 여행에서 남산에 분포되어 있는 박씨 왕릉을 모두 본 셈이다. 박씨 왕을 윗대부터 순서대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혁거세 거서간, 남해 차차웅, 유리 이사금, 파사이사금(오릉), 지마 이사금(지마왕릉), 일성 이사금(일성왕릉), 아달라 이사금(삼릉), 신덕왕, 경명왕(삼릉), 경애왕(경애왕릉). 박씨 왕은 신라 초와 신라 말에 모두 10명이 있었다.      

윤을골 마애삼존불이 가지는 종교성

윤을골 마애삼존불
 윤을골 마애삼존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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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마왕릉에서 나와 다시 남산 일주도로를 따라 남산 전망대인 금오정 방향으로 향한다. 이 길은 포장되지 않은 상태이고 차량 출입이 금지되어 산책하기에 아주 좋다. 우리 일행 여섯 명은 배실골, 가늘골, 부엉골로 갈라지는 길을 지나 계속 일주도로를 따라 간다. 20여분을 올라가니 왼쪽에 윤을곡 마애불좌상이라는 안내 표지가 나온다. 이곳에 보니 포석정까지 거리가 900m이다.

윤을골을 이곳 사람들은 유느리골이라 부른다. 그 의미가 궁금해 이곳 사람들에게 뜻을 물어봐도 시원한 답을 주지 못한다. 왼쪽으로 이삼 분 오르자 세분의 부처가 새겨진 바위가 나타난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이것을 삼신바위 또는 마애삼체불이라고 부른다. 삼신바위는 ㄱ자형의 바위로, 왼쪽에 두 분 오른쪽에 한 분의 부처가 새겨져 있다. 이 바위는 높이가 3m, 너비가 6m쯤 된다.

남향하고 있는 두 부처
 남향하고 있는 두 부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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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향하고 있는 두 분의 앉은 부처는 석가여래와 약사여래이다. 두 겹 연꽃 대좌 위에 결가부좌하고 있으며 왼쪽의 부처는 약그릇을 들고 있어 약사여래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에 비해 오른쪽 부처는 오른 손을 위로 들어 설법하는 모습이어서 석가여래로 보고 있다. 전체적으로 얼굴이 크고, 석가여래의 육계에는 상투 모양이 보인다. 귀가 상대적으로 길게 표현되었고, 옷주름 역시 비교적 굵고 선명하게 조각되어 종교적인 경건성을 부각시켰다.

불상 왼쪽에, 그러나 보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석가여래 오른쪽에 ‘태화을묘9년(太和乙卯九年: 835년)’이라는 명문이 있다고 하는데 확인이 어렵다. 이 명문이 사실이라면 이 부처들은 지금부터 약 12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 된다. 그래서인지 얼굴부분이 상당히 마모되어 있다.

서향하고 있는 부처
 서향하고 있는 부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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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향하고 있는 또 다른 부처님은 앞의 두 부처님보다는 조금 작아 높이가 108㎝이다. 얼굴 표정이 조금 더 부드럽고 조각이 조금 단순하다. 옷주름도 간단하게 표현했고, 연꽃대좌도 간단히 한 줄로 표현하여 역시 예술성보다는 종교성을 강조했다. 또 신광과 두광 두 군데 광배에 각각 두 기 모두 네 기의 화불을 표현하고 있어 더욱 경건한 느낌을 준다. 이 부처 역시 왼손에 약그릇을 들고 있어 약사여래로 볼 수 있다.     


태그:#포석정, #경주, #지마왕릉, #윤을골, #마애삼존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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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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