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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31일 오전 서울 삼청동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대회의실에서 열린 인수위 간사단 회의에서 이명박 당선자가 영어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1월 31일 오전 서울 삼청동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대회의실에서 열린 인수위 간사단 회의에서 이명박 당선자가 영어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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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현재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나라에 살고 있다. 방학에 한국에 돌아가서 친척들을 만나면 가끔 당혹스런 주문을 받는다.

"영어 좀 해봐."

물론 이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웃으며 머리를 긁는 일이다. '영어를 해보라'는 말에 어떻게 달리 반응할 수 있겠는가? 물론 나는 그 말에 담긴 친척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받아들인다. 이 말에는 한국에서 태어나 자란 녀석이 외국에서 공부하고 가르치는 것을 신기하게 여기는 순박함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국가의 정책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영어능력이 없고, 이를 실생활에서 사용할 기회가 없는 사람들일수록 영어의 중요성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세계화 시대에 외국어는 필수고, 영어는 국제어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항상 궁금하다. 우리 노부모님이 문화센터에서 영어를 배우는 게 한국의 세계화에 어떤 도움이 될까? 그래픽 디자이너인 형과 화학자인 여동생이 시간을 쪼개어 회화학원에 등록하고 토플시험장에 앉아있는 것이 한국의 산업경쟁력에 어떤 기여를 하는 것일까?

지도자들의 영어실력은 왜 묻지 않는가

만약 영어를 잘하는 게 '세계화'(나는 아직 이 말의 뜻을 모른다)에 필수적이라면, 지도자들부터 그래야 한다. 대통령·총리·장관·국회의원 등 고위공무원들은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한국을 세계무대의 선두에 세우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인 만큼, 가장 우선적으로 영어실력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기업 총수들은 세계시장에서 기업의 향방을 결정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다른 사원들에 앞서 '세계화 마인드'를 갖추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한 번도 기업 총수들이 모여서 영어로 회의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이래서는 곤란하다. 외국 기업총수의 얼굴조차 볼 기회 없는 말단사원들조차 높은 영어점수를 제출해야 하는 상황에서 말이다.

한국의 지도자들은 영어능력을 갖추지 못한 채, 다른 이들의 능력을 영어로 평가하는 모순적인 태도를 보인다. 기업총수들은 사원을, 정치인들은 국민을 대상으로 말이다. 왜 그들은 영어 없이도 '세계화'의 선두에 서면서, 그들보다 나은 외국어 능력을 갖춘 국민들에게는 높은 잣대를 강요할까? 본래 자기가 못하는 것을 남에게 시키기는 쉬운 법이다.

대학원에 진학하기 전, '세계화'를 모토로 내세운 어떤 기업에서 일년 넘게 일한 적이 있다. 회사에 들어가기 위해서 높은 영어시험 점수를 받아야 했던 것은 물론이고, 영어로 면접까지 봐야 했다. '국제화 업무'를 맡길 능력을 갖춘 사원들을 특별히 선발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입사 후 영어를 쓸 기회는 일년에 단 한 번 있었다. 전사적으로 치르는 토익시험. 듣기평가를 위해 스피커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을 때, 앞에 앉아있던 본부장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미리 답을 써놓고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인수위가 영어교육을 공교육의 차원에서 확대하고 강화하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머리에 떠오른 것은 곤히 잠든 본부장의 뒷모습이었다. 그 본부장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적어도 시험은 같이 치렀으니 말이다.   

토익 시험에 응시하려는 사람들이 서울 종로에 마련된 접수처에 원서 접수를 하고 있다(자료 사진).
 토익 시험에 응시하려는 사람들이 서울 종로에 마련된 접수처에 원서 접수를 하고 있다(자료 사진).
ⓒ 이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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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예방 안하고 반창고 주자는 이명박 정부

이명박 당선자는 후보 시절에 '국어와 국사를 영어로 가르치면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최근에는 '고등학교만 나와도 영어를 할 수 있게 하겠다'는 발언으로 자신의 견해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켰다.

인수위의 영어강화 방안은 이러한 당선자의 발언들과 궤를 같이한다. '기러기아빠의 퇴출'을 목표로, 초등학교 공교육부터 영어능력을 강조할 것이며, '영어로 강의할 능력이 없는 영어교사들은 과감히 퇴출시키겠다'는 것이다.
 
이경숙 인수위원장이 정책홍보의 선두에 섰다. '영어를 한국어로 강의한다는 게 말이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영어를 한국어로 강의하는 게 말이 안 된다면, 한국어와 국사를 영어로 가르치는 것도 말이 안 되어야 정상이다. 비록 인수위는 '영어몰입교육'을 번복하며 한 발 물러서는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영어를 공교육의 전 영역으로 확대하려 하고 있다.

이명박 차기 정부의 영어강화정책은 다분히 '포퓰리즘'적이다. 이미 국민들이 영어로 곤란을 겪는 상황에서 이들의 고민을 덜어야 한다는 실용적 측면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영어로 국민을 괴롭히고 있는 주범이 누구인가? 한국 정부와 기업이다. 이들이 영어에 관심도, 필요도, 재능도 없는 사람들에게조차 영어능력을 무차별적으로 강요하면서 발생한 일이다.

사고가 자주 발생하는 도로가 있다면, 신호체계를 바꾸거나 도로를 정비할 일이다. 사고를 당한 운전자들에게 반창고를 나누어주는 일이 대안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명박 차기 정부는 문제의 도로는 그대로 둔 채, 약을 발라주겠다고 덤벼들고 있다.

영어가 도리어 경쟁력을 떨어뜨린다

지식과 기술 없이 영어만 잘해서 성공한 나라를 본 일이 있는가? 일본은 한국보다 일반대중이 영어능력을 더 갖추지 못한 나라다. 그러나 일본의 상품과 대중문화는 영어권의 어느 나라보다 큰 국제적 경쟁력과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서유럽과 북유럽이 자랑하는 생산성 역시 영어실력으로 길러진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한국의 현실은 어떤가? 모든 국민들이 자신의 전공과 직업에 상관없이 영어 학습에 내몰리고 있다. 얼마 전 한국의 한 대학도서관을 방문했을 때, 10여 년 전과 다름없이 '토플' 등의 영어시험준비서와 영어어휘집이 책상 위에 널려 있는 것을 보았다. 학생들이 전문영역에 투자할 시간을 자신의 분야와 상관없는 영어에 쏟는 대학에서 경쟁력이 길러질 리 만무하다. 이런 조짐은 한국의 기초학문 분야 붕괴에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어쩌다 길에서 마주치는 외국인, 아니 영미인들에게 길 안내를 하는 것이 공교육의 목표가 아니라면, 영어교육을 우선순위로 내세운 교육정책을 거두어들여야 한다. 이명박 당선자의 생각과 달리, 고등학교 교육의 목표는 영어를 잘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생활에 필요한 인성과 교양, 그리고 지식을 쌓는 것이다. 이런 기본적인 교육 없이 영어실력만 강조해서 얻을 수 있는 국가경쟁력은 무엇인가?
   
외국어가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외국어는 중요하고, 또 잘해야 한다. 문제는 영어를 공교육이라는 '전인교육' 차원에서 접근함으로써 불필요한 낭비와 억압을 낳고 있다는 것이다. 온 국민을 영어로 들볶으면서도 정작 잘해야 할 사람은 형편없는 실력을 갖춘 나라가 한국이다.

미국의 럼스펠드 전 국무부장관이 한국의 대통령을 접견한 적이 있다. 대통령의 '안녕하십니까'라는 인사에 '저는 젊거든요(I’m young)'라고 답했을 때, 한국 정부와 언론이 "럼스펠드, 한국어로 '안녕'이라고 말해"라고 보도한 것은 애교에 속한다. 한미자유무역 협상자들이 협상 직전까지 영어공부에 분주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며, 외국 주재 기자들의 불성실한 취재와 오보 역시 심각한 상황이다.

정부와 기업, 그리고 학교에서 외국어를 잘해야 할 사람은 잘해야 한다. 이들의 능력은 엄격한 평가를 받아야 하며, 이들은 자신의 업무에 합당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 외국어에 필요나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다른 능력과 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돕고 배려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영어라는 하나의 기술을 전 국민에게 무차별적으로 요구할 때 얻을 수 있는 것은 사회적 스트레스와 국가 경쟁력 저하밖에 없다.   

잘할 사람만 잘해도 충분하다

이명박 당선자가 시장으로 재임할 당시 서울시는 '하이 서울(Hi, Seoul!)'이라는 공식표어를 채택한 바 있다. 이 의미 없는 푯말이 외국인들에게 어떤 조롱거리가 되었는지는 인터넷 검색으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외국인의 시선에 특별히 더 민감할 필요는 없지만, 영어 표어를 채택할 때는 '세계화'를 염두에 둔 것 같기에 하는 말이다.

서울시는 버스 정류장 금연정책을 실시하면서 "Bus Stop Smoking(버스 정류장 흡연)"이라는 영어로 다시 한 번 망신살을 샀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대국민 홍보 포스터를 제작하면서 "Made (人)  Korea"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재치'를 발휘해 '영어병'의 대열에 가담했다.

영어실력을 갖추지 못한 교사들을 과감히 퇴출시킨다는 정부가 이런 어처구니없는 계획을 시행한 공무원들은 어떻게 처리했는지 궁금하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실력을 갖추지 못한 정부가 국민들에게 영어의 중요성을 훈계하는 모습은 보기 민망하다.

영어를 강조함으로써 얻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 한국의 외교와 경제에 중요한 다른 외국어 능력자들을 몰아내고 있다는 점이다. 아랍에서 벌어진 피랍사건의 해결 과정에서, 해당 외국어를 말하는 사람이 없어 고생했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한국의 무지하리만큼 맹목적인 영어추종은 한국의 외교 관계마저 궁지에 몰아넣는 상황이 되었다.

한국의 영어강조의 중심에는 미국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그동안 외국어를 못하는 것으로 알려졌던 미국인들은 현재 스페인어 배우기에 여념이 없다. 스페인어를 모국어로 하는 라틴아메리카인들의 빠른 증가와 성장 때문이다. 미국 내에서도 스페인어만으로도 생활이 가능한 곳도 적지 않으며, 앞으로 스페인어의 영향력은 날로 커질 것이다. 반면에 한국 정부의 무지는 한국의 이해관계뿐 아니라 문화와 지식교류에 필요한 다양한 외국어의 중요성마저 무시하는 오류를 낳고 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17대 대선 홍보 포스터.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17대 대선 홍보 포스터.
ⓒ 중앙선거관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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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부터 영어로 뽑자

한국 정부는 정책을 세워 놓고 일사천리로 밀어붙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국민들의 의사는 무시되기 일쑤다. 다수의 국민이 반대하는 영어공교육 방안도 마찬가지다. 만일 인수위를 포함한 정부관계자들이 국민보다 더 나은 판단력을 갖추고 있다고 믿는다면, 자신들이 실력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부터 보여줄 일이다.

일단 국회의원의 영어능력부터 평가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국민들은 자기 돈으로도 외국 여행이 힘들지만, 이들은 우리가 낸 세금으로 잦은 '외유'를 떠나지 않는가. 이들이 '산업시찰'을 엉뚱하게 경치 좋은 곳으로 떠나는 이유는 아무래도 영어실력이 부족한 데서 오는 것 같다. 우선 영어시험으로 국회의원을 뽑고, 장기적으로 국회를 영어로 여는 방안도 고려해 볼 만하다. 영어로 의사를 개진할 능력이 없는 이들을 퇴출시켜야 함은 물론이다. 차기 대통령도 말하지 않았던가. 공무원이 한 시간 덜 자야 국민이 편하다고. 

대통령 인수위의 출발이 좋다. 이경숙 인수위 위원장은 '오린지'라는 본토 발음으로 국민들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이제 위원장이 본격적인 실력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한다. 인수위 회의를 영어로 하고, 이 위원장이 회의 내용을 국민들에게 영어로 발표하는 것으로 본보기를 보여주기를 바란다. 우선은 한국어와 영어 두 언어로 하고, 영어공교육 확대와 동시에 정부의 모든 회의를 영어로 바꾸면 된다. 

그게 어렵거나 불필요하게 생각한다면, 국민에게도 부당한 요구를 거둘 일이다. 지도자들에게 불필요한 것이 국민들에게는 왜 필요한지 설득할 수 없다면 말이다. 자기도 못하는 것을 남들에게 강요하는 것, 그것은 지도자의 도리가 아니다.


태그:#영어몰입교육, #오렌지, #영어병, #이명박, #이경숙, #세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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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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