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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바이블 벨트' 지역.
 미국 '바이블 벨트'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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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는 '바이블 벨트'가 있다. 보수적인 개신교 신도들이 많이 사는 남동부 지역을 일컫는다. 서부 텍사스, 남부 플로리다, 북부 캔자스, 동부 버지니아에 이르기까지 10여개 주가 이에 속한다. 하지만 그 중 핵심은 단연 텍사스. 인구, 경제력, 교육 여건 등의 강점을 활용해 보수적인 교리의 생산과 확산에 기여하고 있다.

댈러스-포트워스 지역에는 보수 신학교로 유명한 댈러스신학교, 남서부침례신학교, 크리스웰대 등이 밀집해 있다. 가장 보수적인 교단으로 알려진 남침례회를 이끄는 댈러스 제일침례교회, 미국에서가장 큰 휴스턴의 레이크우드교회 등 다수의 '메가 처치(mega church)'들이 수백만 명의 '텍산(Texan)'을 이끌고 있다.

이들 신학교와 교회들은 뉴욕, 펜실베이니아 등 미 북동부 지역이나,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한 서부 지역의 자유주의 신앙과 뚜렷이 대비되는 신앙을 고수하고 있다. 이들은 성경의 문자적 해석과 그 무오류성을 믿는 복음주의파(Evangelical Protestantism)로 불린다. 동성애 반대, 낙태 금지(pro-life) 등 사회적 이슈에 있어서도 보수적인 입장에 확고히 서 있다. 텍사스 출신 부시 대통령의 탄생에도 중요한 역할을 할 만큼 정치력도 막강하다.

이런 텍사스에 신앙과 관련한 커다란 논쟁이 최근 다시 일고 있다. 성경의 천지창조 내용을 문자 그대로 믿고 이를 과학적으로 입증하려는 한 기독교 연구소가 주 고등교육 위원회에 정식 '과학 석사' 학위과정 인가를 요구한 것.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는다고 하면서도 학교 과학 시간에는 진화론을 배워야 했던 많은 텍산들은 이 연구소의 요구를 반기고 있다. 반면, 과학계는 "신화에 불과한 창조론을 과학으로 인정해 달라는 무리한 요구"라며 "이 요구가 받아들여질 경우 텍사스의 과학 교육은 붕괴할 것"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논란은 화씨 100도(섭씨 37.7도)가 넘는 여름 기후보다 더 뜨겁게 텍사스를 달구고 있다.  

"사이비 과학에 학위라니... 텍사스는 전 세계 망신거리가 될 것"

'창조론 연구소(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 ICR)'는 지난달 텍사스 고등교육 위원회에 창조론을 바탕으로 한 자신들의 과학 교육 내용에 정식 과학 석사 학위를 인정해 줄 것을 요구했다. 뒤이어 각계각층의 시민들로 구성된 교육위의 자문 기구는 ICR의 요구를 수용할 것을 교육위에 권고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교육위에는 찬반이 엇갈리는 수백 통의 이메일과 전화가 빗발쳤다. 텍사스 의대 교수이자 1994년 노벨 의학상을 받은 알프레드 길만 박사는 "암을 정복하기 위해 전 세계의 우수한 인재들을 불러 모으며 의학 등 과학 발전에 공을 들이는 텍사스주가 어떻게 우주의 역사가 1만년도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이비 연구소에 정식 학위를 내 주려고 하는가"라고 직접적으로 비판했다. 그는 이어 "이런 종류의 말도 안 되는 요구가 수용된다면 텍사스는 과학계의 무수한 인재들을 잃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1979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스티븐 와인버그 텍사스 물리학과 교수도 "(ICR의 요구는) 텍사스의 과학 교육을 붕괴시킬 것"이라며 "텍사스는 전 세계의 망신거리가 될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자신을 댈러스의 한 대형 교회 장로이자 20년 이상 성경학교 교사로 일해 왔다고 소개한 텍사스 의대 다니엘 포스터 박사도 비판의 대열에 서기는 마찬가지. 그는 "학교에서는 오직 정통 과학만 가르쳐야지, 사이비 과학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며 "(ICR의 요구가 수용되면) 텍사스는 '반 과학(anti-science)' 주로 낙인 찍혀서 더 이상의 발전은 기대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초등학교 과학 교사인 잔 윌슨은 "그들이 창조론을 가르칠 수 있는 권리는 인정할 수 있다"면서도 "종교 학위라면 모를까 과학 학위를 수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못 박았다. 그는 "정의(definition)에 의해서나 판결에 의해서나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창조론은 종교적 믿음이지, 경험적인 증거에 의한 과학이 절대 아니"라며 "이미 미국의 과학 교육은 개발도상국 수준도 따라가지 못할 만큼 낙후했는데 이에 더해 과학의 기본조차 모르는 교육자들을 양산할 수 있는 ICR의 요구는 절대 수용돼서는 안 된다"고 단언했다.

미국 내 창조론 대 진화론의 주요 갈등 사례들.
 미국 내 창조론 대 진화론의 주요 갈등 사례들.
ⓒ 신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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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이 있다면 창조론, 진화론 양쪽 모두 가르쳐야"

반면, 창조론에 바탕을 둔 과학 교육에 정식 학위를 수여하는 것은 형평성 원칙에 따라 정당하다는 옹호론도 만만치 않았다.

오하이오주의 한 일반 대학에서 과학을 전공하고, 1994년 ICR에서도 공부했다는 크레이그 캠벨은 "ICR에서 창조과학을 배우면서 다른 어떤 교육기관이나 교육과정에서 배운 것보다도 더 많이 진화론에 대해서도 배울 수 있었다"며 "진화론만 가르치는 일반 대학에서는 내 사고가 진화론에만 집중돼 발전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과학의 역사가 말해주듯 위대한 과학적 발견은 그 발견자가 한 이론에만 고정되지 않고 자유롭게 사고했을 때 나왔다"며 "오늘날에도 과학이 좀 더 발전하려면 진화론이라는 한 이론만 가르치지 말고 다른 여러 가지 설명들도 가르쳐야 한다"며 ICR의 학위 인가 요구를 옹호했다.

캘리포니아에 산다는 존 산체스는 "이 나라는 다양성 때문에 위대해졌다"며 "다양성을 저해하는 진화론 교육에서 벗어나 많은 시민들이 자유롭게 다양한 과학적 설명을 배우고 비교할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창조론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일반 시민이었지만 전문가들 중에도 창조론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텍사스대 전자공학 연구원이자 국제 전기전자공학협회(IEEE) 이사인 켄트 데이비 박사는 "창조론적인 세계관은 과학의 영역에서 신뢰할 만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는 내용의 이메일을 텍사스 교육위에 보내 왔다.

창조론을 옹호하는 이메일.
 창조론을 옹호하는 이메일.


온라인으로 옮겨 붙은 창조론 논쟁

논쟁의 불길은 텍사스 교육위에 대한 지지나 항의 표시에서 나아가 각종 온라인상으로 옮겨 붙고 있다.  교육 관련 웹사이트인 '인사이드 하이어에드(insidehighered.com)'의 ICR 관련 뉴스에는 댓글 수십 개가 붙었다. 창조론자들과 그에 반대하는 사람들 사이에 치열한 논리 싸움이 일어난 것.

'Lynne. B'라는 아이디의 네티즌은 "진화론과 관련한 각종 논문은 200여개가 넘는 각종 과학 저널에 매주, 매달 실리고 있다"며 "진화론이 맞다는 것은 각종 연구 결과에 진화론적 설명이 정확하게 들어맞기 때문"이라고 썼다. 그는 이어 "창조론은 검증할 수 없는 초월적인 설명에 기대어 그에 맞지 않는 증거들은 다 인정하지 않는다"며 "창조론자들은 '성경이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것을 믿는다, 그것이 나의 증거"라고 말할 뿐"이라고 꼬집었다.

이에 대해 과학 분야에서 박사과정을 하고 있다는 'Southern Fundamentalist'라는 네티즌은 "성경이 말하는 대로 창조자가 있고 지구가 창조된 것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단순한 신앙 때문이 아니라 내가 직접 연구하고 실험해 본 결과"라며 "박사 과정에서 뛰어난 성적을 올리고 있는 내가 진화론과 창조론을 모두 비교 연구해 본 결과 진화론에는 엄청난 모순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반박했다.

진화론의 '약한 고리' 공격하는 창조론

ICR은 1970년 헨리 모리스 박사에 의해 캘리포니아에 세워졌다가 최근 텍사스로 옮겨왔다. 보수적인 기독교 신자였던 모리스 박사는 성경에 쓰인 대로 6일간의 천지창조를 믿었으며, 물이 전 세계를 뒤덮어 인류가 멸망했다는 노아의 홍수 이야기도 역사적인 사실로 믿었다.

모리스 박사는 자신의 전공인 토목공학을 살려 지질학의 대전제인 동일 과정설(지층은 오랜 시간에 걸쳐 점차적으로 쌓여 만들어졌다는 가설)을 비판했다. 현재 세계 도처에서 발견되는 불규칙한 지층들은 동일 과정설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는 게 비판의 요지였다. 그는 노아의 홍수와 같은 대격변에 의해서만 그런 지층들이 잘 설명될 수 있다는 내용의 <창세기 홍수(The Genesis Flood)>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그의 아들이자 지질학 박사인 존 모리스, 저명한 물리학자인 존 바움가드너 등이 주축이 되어 성경의 내용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일을 지금까지 하고 있다.

이들에 따르면 주류 과학계는 '실험 과학'과 '역사 과학'을 동일시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역사 과학은 진행 과정에 대한 관찰이나 실험에 의한 것이 아니라 과거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추측'하는 과학의 한 분야. 이들은 진화론에서 말하는 진화 계통표, 지질 연대표, 빅뱅 등도 모두 역사 과학에 속하는 것으로, 실험이나 관측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단순한 추측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창조론에 대한 가장 큰 비판으로 과학 철학자 칼 포퍼의 '반증 가능성'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이들에 따르면 진화론의 핵심인 '모든 생물체는 한 조상에서 진화했다'는 명제 자체도 반증 가능성이 제로라는 사실을 주류 과학계는 애써 무시하고 있다.

진화론이나 창조론 모두 우주의 탄생을 '실험'할 수 없다면 귀납법적인 방법보다 연역적인 방법을 사용해 해답을 찾는 게 낫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우주를 창조했다는 존재의 설명이 과학적으로 맞는 것이라면 이를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 이를 위해 ICR은 물리학의 상대성 이론, 불확정성의 원리, 열역학 제2법칙, 지질학의 격변설, 석탄 생성과정, 화석학의 미싱링크(missing link) 설명 등을 이용하고 있다. 이를 통해 성경이 말하는 대로 6일간의 천지창조, 6000여년에 불과한 지구 나이, 종(種)을 뛰어넘는 진화 없이 현재의 종과 똑같은 동식물 탄생, 노아 홍수의 실재 등을 주장하고 있다.

텍사스 교육위의 레이먼 파레데스 위원장은 "텍사스의 과학 교육을 위험에 빠뜨리거나 텍사스가 뛰어난 과학 연구자들에게 매력적이지 않게 되는 어떤 결정도 내리지 않겠다"면서도 "(모든 이가 아는 바와 같이) 이 문제에 관한 정치적 민감성 때문에 우리는 ICR의 요구에 대해 최대한 모든 방법을 다해 검증할 것"이라고 밝혔다. 결국 교육위는 1월말경에 내릴 예정이던 최종 결정을 4월로 미루었다. 신앙 문제는 결국 정치적인 문제가 되고 말았다. 텍사스는 당분간 더 뜨거워질 전망이다.

창조론과 진화론의 주요 쟁점.
 창조론과 진화론의 주요 쟁점.
ⓒ 신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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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창조론과 진화론의 논쟁에 관한 더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다음 기사를 참고할 수 있습니다.

http://www.thekonet.com/news/articleView.html?idxno=2627
http://www.thekonet.com/news/articleView.html?idxno=2757



태그:#창조론, #진화론, #바이블 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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