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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난 19일 통영여고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김건선 선생님 가족, 어린이 예술단 '아름나라'를 이끄는 고승하 선생님 부부, 유치원에서 놀이 수학을 지도하는 조수미씨 가족, 그림을 그리는 박임숙씨 가족과  함께 경주 남산을 찾았다.

 

신라를 논할 때마다 "남산을 빼놓고는 신라를 말할 수 없다"는 김건선 선생님의 설명에 꼭 한 번 가고 싶었던 곳이 경주 남산이었다. 남북이 8km, 동서가 4km로 금오산(468m)과 고위산(494m)의 두 봉우리가 솟아 있고 불곡, 삼릉계, 용장골 등 40여개의 골짜기들로 이루어진 남산은 신라 사람들의 신앙터이면서 불교미술 창작을 위한 연습장이기도 했고, 생활 터전이면서 또 신나는 놀이터이기도 했다.

 

신라 석공들의 혼불로 새겨진 마애불의 신비

 

 

오전 8시 20분께 마산에서 출발한 우리 일행은 김해에 사는 조수미씨 가족과 합류하여 10시 40분께 경주 남산 서쪽 기슭에 동서로 3개의 왕릉이 나란히 있는 삼릉(사적 제219호, 경북 경주시 배동)에 이르렀다.

 

삼릉은 박(朴)씨 왕인 신라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의 무덤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확실한 기록이 없어 믿을 수 없다고 한다. 신라 초기 아달라왕이 무려 700여년이란 시간적 간격이 있는 두 개의 왕릉과 한곳에 있다는 것은 나로서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우리는 뒷날 태종무열왕으로 즉위하는 김춘추와 김유신의 누이인 문희에 얽힌 이야기를 나누면서 삼릉계석조여래좌상을 보러 갔다. 언니 보희가 서산에 올라 오줌을 누었더니 온 서라벌이 오줌에 잠겨 버린 희한한 꿈을 들려주자 문희가 그 꿈을 사서 김춘추와 결혼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런데 김춘추와 축국을 하던 김유신이 일부러 그의 옷고름을 밟아 찢어지게 하여 옷을 기워 준다는 구실로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던 또 다른 이야기는 경주 남산과 관련이 있어 흥미롭다.

 

그날의 만남을 계기로 문희가 결국 김춘추의 아이를 가지게 되는데 그에게는 이미 부인이 있었다. 문희가 아비 없는 아이를 가졌다는 소문을 퍼뜨린 김유신은 선덕공주의 남산 나들이에 때맞춰 그녀를 태워 죽인다고 장작더미에 불을 질렀다. 그때 마침 그의 집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선덕공주가 보고 그들이 혼례를 올리게 해 주었다는 이야기이다.

 

김유신의 증조부는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이다. 가야의 후손이란 꼬리표가 따라다니는 김유신으로서는 어쩌면 신분적 끈을 만들기 위해 왕족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그의 누이를 진골 출신인 김춘추와 혼인을 시키려 했던 것이 아닐까.

 

 

어느새 우리는 삼릉계석조여래좌상이 있는 곳에 이르렀다. 1964년 동국대학교 학생들에 의해 발견된 그 불상은 머리가 없다. 조선 시대의 억불 숭유 정책 탓이었을까. 머리 없는 불상이 주는 충격적 분위기에 나는 잠시 멍해 있었다. 그러나 옷 주름, 가사(袈裟)의 매듭, 그리고 매듭에 달린 술까지 너무나 사실적으로 섬세하게 조각된 몸체는 머리를 잃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움과 위엄이 넘쳤다.

 

머리 없는 불상이 있는 곳에서 왼쪽으로 2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삼릉계곡마애관음보살상(경북유형문화재 제19호)이 있다. 머리에는 보관(寶冠)을 쓰고 손에는 보병(寶甁)을 든 채 연꽃무늬 대좌(臺座) 위에 서 있었다. 돌기둥 같이 생긴 암벽에 돋을새김을 한 것으로 자비로운 얼굴로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석조여래좌상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가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조각 수법이 뛰어나고 정교해 우리나라 선각(線刻) 마애불 가운데 으뜸가는 삼릉계곡선각육존불(경북유형문화재 제21호)을 만날 수 있다.

 

자연 암벽에 선으로 새긴 한 쌍의 마애삼존불로 오른쪽 삼존불의 본존은 좌상이고 양옆 협시보살은 연꽃을 딛고 본존을 향해 서 있다. 대조적으로 왼쪽 삼존불의 본존은 입상이며 협시보살들은 본존을 향해 공양하는 자세로 연꽃무늬 대좌 위에 꿇어앉아 있었다.

 

 

남산은 사실 마애불의 보고라 할 만큼 마애불이 많다. 마애불을 보고 있으면 마치 돌 속에 부처가 있다고 생각한 신라 석공들이 마음의 흐트러짐 없이 혼신의 힘을 기울여 그 부처를 캐낸 듯한, 신비스럽고 장엄한 감동이 밀려온다.

 

 

높이 7m, 너비 5m나 되는 거대한 자연 암벽에 6m 높이로 새긴 마애불도 있다. 상선암 마애석가여래좌상(경북유형문화재 제158호)으로 앉아 있는 모습이다. 몸체는 아주 얕게 새겨져 있지만 머리에서 어깨까지는 입체감 있게 깊게 새겨 돋보이게 해 놓았는데 옆모습이 매우 예쁘다. 속세의 중생을 굽어보는 듯한 자비와 위엄이 서려 있어서 그런지 유독 그 불상 앞에는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김시습의 금오신화를 낳은 용장사터로

 

 

경주 남산은 불교미술의 노천박물관이라 말해도 될 만큼 산길을 오르면서 계속해서 불상을 만나는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이어지는 설렘과 감동으로 피곤함도 모른 채 금오산 정상에 이른 시간은 낮 12시 50분께. 우리는 그곳에서 각자 준비한 도시락을 꺼내 맛있는 점심을 먹고 용장사터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몇 군데 남아 있는 석축으로 미루어 규모가 큰 절로 짐작되는 용장사는 매월당 김시습이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쓰며 머물던 곳이었다. 우리는 삼층탑 같은 독특한 원형 좌대를 볼 수 있는 용장사곡석불좌상(보물 제187호)이 있는 곳으로 갔다.

 

 

자연석 기단 위에 삼층으로 특이한 원형 대좌와 대좌 받침을 교대로 만들어 놓은 용장사곡석불좌상은 불상 자체는 크지 않으나 대좌가 높아 전체적으로 매우 높아 보인다. 그런데 <삼국유사>에 의하면 유가종(瑜伽宗)의 대덕인 대현스님이 염불을 하면서 그 석불좌상 주위를 돌면 그 불상 또한 대현스님 따라 고개를 돌렸다고 전해지는데 안타깝게도 머리 부분이 없어졌다. 그 불상의 머리는 대체 어디에 있을까.

 

석불좌상 뒤쪽으로 있는 바위벽에는 용장사곡마애여래좌상(보물 제913호)이 새겨져 있는데 첫눈에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이 인상적이었다. 오른손은 무릎 위에 올려 손끝이 땅을 향하게 하고 왼손은 배 부분에 놓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다. 그 위치가 길목이라 느긋한 마음이 아니면 그냥 지나쳐 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바위산 전체를 하단 기단으로 삼아 자연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용장사곡삼층석탑(보물 제186호)을 올려다보면서 하산을 했다. 계곡물이 너무 깨끗해 바위 끝에 매달린 고드름을 따먹기도 하면서 삼릉으로 가는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3시 50분께. 30분마다 있는 버스가 마침 4시에 도착했다.

 

우리는 삼릉 앞에서 내려 그곳 별미인 우리밀 칼국수를 사먹었는데, 그 맛 또한 일품이었다. 천 년의 역사를 품은 경주 남산. 남산을 빼놓고는 신라를 말할 수 없음을 실감한 하루였다.


태그:#경주남산, #머리 없는 불상, #마애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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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3.1~ 1979.2.27 경남매일신문사 근무 1979.4.16~ 2014. 8.31 중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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