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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선거운동 기간 중 교육정책 초청토론회에서 연설하고 있는 이명박 당선인
▲ 교육정책 초청토론회 작년 선거운동 기간 중 교육정책 초청토론회에서 연설하고 있는 이명박 당선인
ⓒ 오마이뉴스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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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교육을 국가교육 최우선 과제로 하겠다."

'국어, 역사도 영어로 수업하도록 하겠다'는 대통령 당선자의 공약에 이어 '영어수업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하겠다'고 인수위원장이 이어받았다. 구체적으로 이를 실현하기 위해 영어 이외의 과목을 영어로 수업(이른바 영어몰입교육), 수능에서 영어를 폐지하고 1년에 4회씩 한국형 토플·토익으로 영어능력 평가, 초등학교부터 전 학년 영어 수업 도입 등의 안을 내놓았다.

새 정부 인수위원들이 세종시대 판서들이었다면 한글의 운명은?

요즘 한창 TV에 세종대왕에 대한 드라마가 인기를 끌고 있다. 쏟아지는 인수위원회의 영어교육관련 발표들을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그들 인수위원들이 세종대왕 시대의 신하였다면 한글이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있었을까? 태어났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세종대왕은 생활의 표현 수단인 조선말과 표기수단인 한자의 불일치에서 오는 일반 백성들의 불편함을 해결하기 위해서 글자를 조선말에 맞추는 방향으로 한글을 창제한 것이다. 중국 글보다 조선말을 우선시한 것이다. 새 정부 인수위원회는 우리말보다 영어를 선택한 것 같다. 영어에 국운을 건 듯한 그들의 태도는 중국을 섬기며 한자를 숭상하던, 중화주의라는 사대주의에 완전히 빠진 양반들을 연상시키는 것은 나만 그런가?

국어, 역사과목까지도 영어로 수업하고, 학생들은 1년에 4번씩, 나아가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영어검증시험을 주장하는 그들의 논리라면 결코 한글은 이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세종대왕은 한자를 숭상하던 양반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을 위해 한글을 만들었는데 대통령 당선자와 새 정부 인수위의 영어 숭배 교육정책은 과연 서민들을 위한 것일까?

그들은 일제 시대와 해방공간에서 일본어 공용화를 주장하지 않았을까?

지금 새 정부의 영어정책을 보면 그들은 영어에 목숨을 건, 영어공용화 못해서 안달이 난 사람들 같다. 조금 과장하자면 경제적 이득을 위해서 영어를 공용어 수준으로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논리는 일제 식민지 시절 조선어 말살정책을 펴든 일제의 논리를 연상시킨다.

경제적 이득을 위해서는 일본과의 경제적 교류를 활발하게 할 수밖에 없던 일제시대에 일어공용화를 주장했을 것 같다. 우리와 비슷하게 식민지 경험을 가진 나라들 중에 영어 공용화, 또는 자기 나라말을 버리고 영어를 제1언어로 채택한 나라들 중에 우리나라보다 잘 사는 나라가 전 세계에 단 한 나라라도 있는가? 우리보다 경제 수준이 높은 캐나다나 뉴질랜드, 싱가포르 같은 나라들은 그 나라 원주민이 잘 살게 된 것이 아니라 식민지 모국인들이 잘 살게 된 것을 착각해서는 안 된다. 자기 나라 말을 홀대하는 민족의 비참함에 대해서 그들은 역사에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 것 같다.

영국, 미국, 캐나다, 안티가바부다, 오스트레일리아, 바하마 제도, 바베이도스, 벨리즈, 보츠와나, 카메룬, 도미니카공화국, 피지, 가나, 그레나다, 가이아나, 인도, 아일랜드, 자메이카, 케냐, 키리바시, 레소토, 라이베리아, 말라위, 몰타, 마셜제도, 모리셔스, 미크로네시아, 나미비아, 뉴질랜드, 나이지리아, 파키스탄, 팔라우, 파푸아뉴기니, 세인트킷츠네비스, 세인트루시아, 세인트빈센트그레나딘, 서사모아, 세이셸, 시에라리온, 싱가포르, 필리핀, 솔로몬제도, 남아프리카공화국, 스와질랜드, 탄자니아, 통가, 트리니다드토바고, 투발루, 우간다, 바누아투, 잠비아, 짐바브웨….

약 70개에 이르는 위의 나라들의 공통점은 영어를 모국어 또는 공용어로 사용하는 나라들이다. 그러니까 이들 나라의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영어만 쓰거나 적어도 학교에서 모두 영어로 수업을 하는 나라들이라는 의미이다. 미국이나 영국의 식민지 경험을 겪지 않은 나라 중에 영어를 제1언어 또는 공용어로 쓰는 나라는 전 세계에 단 하나도 없어 보인다. 만약에 우리나라가 영어를 정말 공용어로 한다면 세계 역사상 최초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다. 70개에 이르는 이들 나라 중에서 우리보다 GNP가 큰 경제대국은 영국과 미국밖에 없고, 1인당 GNP로 따지더라도 우리보다 높은 나라는 영국,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싱가포르, 뉴질랜드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영어가 국가경쟁력이라는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영어는 국가경쟁력의 한 지표이지 결코 그 자체가 아니다

영어를 공용어 또는 모국어로 쓰는 나라들 대부분은 어디에 붙었는지 이름도 잘 모르는 나라들이고 거의 모두 영국 또는 미국의 식민지 국가였다. 그나마 우리가 이름을 알고 있는 파키스탄, 인도, 필리핀 같은 나라들도 모두 우리보다 훨씬 경제 규모가 작거나 국민소득이 낮은 나라들이다. 왜 영어가 국가경쟁력이라고 하는데 우리보다 영어를 훨씬 잘 하는 나라들의 대부분이 우리보다 못 살고, 국가경쟁력이 낮을까? 영어는 국가경쟁력의 여러 요소 중 하나일 뿐이지 결코 국가경쟁력 그 자체가 아니며, 더더욱 국민의 행복의 요건은 아니다.

조선시대나 해방 이후와 지금은 분명히 다르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 때에도 다른 나라와 교류를 활발히 하는 나라가 강대국이었다는 것, 거꾸로 강대국이 국제교류가 많았다는 것은 지금과 똑같다. 그 때 조선시대 중국어나 일제시대 일본어의 지위가 지금의 영어의 지위보다 결코 낮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적어도 당시의 귀족이나 친일파들에게는….

모든 인재는 법대와 의대로, 모든 과목은 영어로

우리나라는 학교의 서열화만큼이나 학문의 서열화가 엄청난 나라이다. 그러니까 똑같은 박사라고 하더라도 의학박사와 농학박사를 보는 사회적 시각이 다르고, 법학 박사와 미학박사를 보는 시각이 다르다. 거의 모든 학교에서 학생들이 선호하는 학과가 천편일률적이어서 중고등학교에서 공부 좀 한다는 아이들은 거의 인문계에서는 법대, 자연계에서는 의대를 가려고 한다. 심지어 외국어고 졸업생들도 그렇다.

대학 입학 후 공부 좀 한다는 아이들은 전공에 상관없이 고시 공부를 하고 있고, 아니면 토익공부를 하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그렇게 해서 우스갯소리로 우리나라 대학에는 '고시과와 영어과', 또는 '공무원대비과와 토익대비과'만 있다고 한다. 이런 현실에서 초중고에서까지 영어로 수업을 하고, 대학 입시에 자료로 쓰기 위해 1년에 4번씩 영어 시험을 치게 한다면 초중고에서도 다른 과목은 영어로 단일화 될 수밖에 없다.

이명박 영어교육 정책이 가져올 끔찍한 학교의 묵시록

인수위는 영어를 수능에서 제외함으로써 입시 부담이 줄어들 것이라고 하지만 1년에 4회씩 치르는 한국형 토익·토플 시험은 또 다른 입시부담이고 사교육 양산 공장이 될 것이다.

고등학생뿐 아니라 초등학생, 중학생까지 이 시험을 칠 것이며(실제로 인수위는 초등학생용, 중학생용, 고등학생용, 일반인용 등 시험을 따로 개발한다고 한다), 특히 고등학교의 경우 대학입시에서 이를 반영하기 때문에 일 년 내내 이 시험을 쳐야 한다. 1회 시험에 70점을 받았으면 80점을 받기 위해, 그 다음에는 90점을, 그 다음에는 더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해 1년 내내 시험을 치게 될 것이 뻔하다. 학교에서는 이 시험 시기가 되면 시험대비 특별 수업을 하거나 수업시간을 이용해서 이 시험 대비를 해줄 수밖에 없다. 인수위의 말처럼 등급제로 해도 마찬가지로 더 높은 등급을 받기 위해서 시험을 계속 쳐야 하는 것은 변함이 없다.

학생, 교사, 학부모는 죽을 맛이 될 것이다. 학원, 특히 이 시험 대비 영어학원은 살맛나서 문전성시를 이룰 것이다. 대통령 당선자와 인수위만 모르는 이 진실을 이미 모든 국민들, 특히 사교육 학원들은 직감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명문대생도 이해 못하는 영어강의

인수위는 2010년도부터 수학과 과학부터 영어로 수업하는 교육을 도입하겠다고 발표했다. 최근 서울대를 비롯한 여러 대학에서 영어로 수업하는 강좌를 개설하고 있고, 실제로 교수를 뽑을 때 영어 수업이 가능한지를 중요한 기준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대학생들, 그것도 대한민국 최고 수준의 학생들을 모아놓고 하는 대학에서 실시하는 영어로 하는 강의가 결코 좋은 평가를 받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들에 의하면 실제로 대학생 또는 대학원생들을 대상으로 영어로 수업하는 강의가 영어 실력 향상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수업과 교육의 질을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대학생 또는 대학원생, 그것도 대한민국 최고 수준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여 진행하는 영어몰입수업이 수업의 질과 학생들의 이해도를 떨어뜨린다고 하는데, 일반적인 초중고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영어몰입교육이 수업의 질 향상을 가져올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부지깽이에 새싹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닐까? 초중등교육의 목적이 영어 능력 향상인지 보통시민으로 살아가기 위한 기본지식과 교양을 쌓는 것인지에 심각한 고민이 필요한 지점이다.

인수위의 탁상공론, '수능등급제는 극구반대, 영어능력평가는 등급제?'

교육단체 관계자들이 지난 21일 오전 서울 정동 세실레스토랑에서 "이명박 정부가 제시하고 있는 핵심 교육정책은 사교육비의 급격한 증가를 예고하고 있다"며 '이명박 정부 교육정책을 걱정하는 100인 선언'을 하고 있다.
 교육단체 관계자들이 지난 21일 오전 서울 정동 세실레스토랑에서 "이명박 정부가 제시하고 있는 핵심 교육정책은 사교육비의 급격한 증가를 예고하고 있다"며 '이명박 정부 교육정책을 걱정하는 100인 선언'을 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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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전 국민이 모두 영어에 목을 매야 하냐?', '사교육비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영어 사교육을 몇 배로 증가시키는 것 아닌가?', '도대체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영어로 어떻게 가르치나?', '수능 제외로 학습 부담 경감이 아니라 4회 시험으로 1년 내내 입시 부담에 짓눌리는 것 아닌가?' 하는 국민들의 우려에 대해서 그들이 내놓은 "시험 응시 횟수를 제한하고, 시험 응시 회수 초과자에 대해서 감점을 하는 방법으로 하면 된다. 등급제로 해서 자격요건으로만 쓰면 과도한 부담을 줄일 수 있다"는 답은 정말 어이가 없다.

수능등급제를 '악의 축'으로 몰아 그토록 반대하는 인수위에서 영어 능력 시험은 등급제로 하자는 모순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내놓고 있다. 새로운 평가시험이 개발되면 학생들은 일 년에 최소 4회 응시 기회를 얻게 되고 이중 가장 좋은 점수를 반영시킬 수 있게 됨으로써 단 한 번에 점수가 결정되는 수능에 비해 부담을 덜 수 있을 것이라는 발표는 우리 교육현장에 대한 무지와 몰이해뿐 아니라 우리 헌법에 대한 무지의 극치이자 자기 부정이다.

회사 입사뿐 아니라 사법고시 등 국가고시, 외고입시나 대학입시에 전형 자료로 쓰이는 토익시험에 최고 점수를 받기 위해서 여러 번 치르는 학생들에게 토익 응시 횟수를 제한하고 횟수 초과 응시자는 점수를 감점한다고 하면 그것을 받아들일 학생이 있을까? 하물며 자기의 평생이 걸렸다고 생각하는 대입에 더 높은 점수를 받는 것이 지상목표인 입시생들에게 영어시험 응시 횟수를 제한하고 점수를 감점한다는 것을 누가 받아들이겠는가?

학생들이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를 떠나서 그들이 그토록 중요하게 내세우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가능하지도 않은 위헌적 발생이다. 인수위의 한국형 토익·토플 등급제와 횟수 제한 초과 시 점수 감점은 탁상공론의 전형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영어부족국가'가 아니라 '영어과잉국가'

토익 전 세계의 50%, 토플은 20%로 세계 1위, 토익 성적 비영어권 국가 1위가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나라는 2005~2007년 기준으로 전 세계 토익 응시생의 45~50%에 이르러 두 명 중의 한 명이 우리나라 사람들로 단연 세계 1위이다. 토플은 이보다는 적지만 전 세계 응시생의 20%에 육박하여 다섯 명 중 한 명이 우리나라 사람으로 이 역시 세계 1위이다. 영어사용 국가도 아니고 인구수로 보더라도 30위 정도인 우리나라가 토플과 토익 응시생이 세계 1위라는 것은 분명히 정상이 아니다. 이들 시험 응시료만 해도 한 해에 2천억원에 이른다고 하고, 대학 입시와 토익·토플이 영어 사교육의 주축임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상황에서 영어 사교육비 15조는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국민들의 예상과는 너무도 다르게 토익을 주관하는 미국교육평가원(ETS)이 2005년과 2006년 성적을 국가별로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토익 평균 성적은 598점과 601점으로 비영어권 국가 점수 중에서 2년 연속으로 1등이다. 토익의 창시 국가인 일본이나 타이완, 태국보다 훨씬 높았다.

여기서 우리보다 훨씬 영어성적이 낮은 것으로 나타난 일본이 우리보다 훨씬 경제 수준이 높으며, 또 학문의 세계적 교류가 훨씬 높아서 당연히 국가경쟁력도 우리보다 높다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평생 영어 외국인하고 말 한마디 할 필요가 없는 부서인데도 기업에 취직을 하려면 토익 시험 성적을 요구하고, 더 나아가 사법고시 등 국가고시에서도 영어 시험 대신 토익, 토플 등의 성적으로 대체하고 있으며, 특목고와 대학입시에서도 토익, 토플 성적을 전형 자료로 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대학 졸업 논문 대신에 토익 성적을 제출하는 학교도 있다. 구청공무원들이 영어로 회의를 한다고, 다른 구청에서는 모든 거리 간판을 영어로 바꾼다고, 또 다른 구청은 동네 이름도 town으로 바꾸고, 동사무소는 center로 바꾼다고 신문에 나온다.

이런 모든 자료들이 나타내는 것처럼 ‘우리나라는 영어부족국가가 아니라 영어과잉국가’이다. 없는 수요도 만들고 필요 이상으로 과대 포장되어 심각하게 왜곡된 것이다.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영어 사용국가가 아닌데 초중등과정만 밟은 학생들 모두가 영어로 자유롭게 의사소통 하는 나라는 거의 없을 것이다.

영어가 공용어인 인도 같은 많은 나라들도 실제로 영어로 의사소통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국민은 전체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고등학교만 나와도 모든 학생들이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것을 꿈꾸는 것은 비영어권 국가에서는 가능하지도 않은 망상이고 그럴 필요도 없어 보이는데 우리 국민들은 다른 나라들은 모두 그렇고, 또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인수위는 이런 잘못된 환상에서 깨어나야 한다.

'영어교육 병목현상'은 악대차 효과

구체적인 수치는 조금씩 다르지만, 우리나라 총 사교육비는 30조에 이르고 그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14조가 영어에 들어가는 사교육비라고 한다. 우리나라가 경제규모로는 세계 10위에 가까운 대국이지만 국민의 행복지수는 100위권 밖이다. 국민을 불행하게 하는 것 중 하나가 교육, 특히 사교육의 문제이며 그 주범 중의 하나가 영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모든 국민이 영어를 잘하도록 해야 하는가?

지금 우리 영어교육은 '영어교육 병목현상' 또는 '영어 깔때기 현상'이라고 할 만큼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다. 국민들의 실수요에 비해 시장에서의 영어교육 자체가 과열되어 있다 보니 거기에 들어가지 못한 모든 국민들이 괴롭다. 영어, 특히 토익시험은 대학만 가면 모든 학문과 고시, 취직 시험들을 모두 흡수해서 학문 자체를 심각하게 왜곡해 버리고, 국민을 거르는 깔때기 같은 장치가 되어 버렸다. 모든 국민이 다 할 필요도 없는데 모두 하고 있고, 모든 국민이 잘 할 수도 없는데 잘 할 수 있는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모든 국민이 불안하고,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부정적인 의미의 악대차 효과(bandwagon effect)이다. 맨 앞에 있는 사람, 남들이 가니까 자기도 따라 가다 결국 함께 망하는 것이다.

해법은 모든 국민이 영어에 '올인' 하는 것이 아니라 '이원화'

과연 대한민국의 모든 학생, 전 국민이 영어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하나? 온 국민의 영어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으로 내놓은 인수위 영어교육정책은 선무당이 사람 잡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그 현장'이다. 영어교육에 심각하게 문제가 있다는 것은 동의를 하겠는데 인수위가 내놓은 답은 결코 답이 아니며 오히려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것이다.

최근 여기저기서 즉석 통역기가 개발되었고 상용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기사(<오마이뉴스> 2007월 10월 10일 '영어라 가라 통역시 나가신다' 등 기사 참조)들을 재미있게 읽었다. 물론 인간과 똑같은 능력을 갖춘 완벽한 의미의 번역기나 통역기가 당장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민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전문가 수준의 완벽한 소통이 아니다. 온 국민이 영어에 스트레스를 받느니 이 분야에 집중적으로 지원을 하여 통번역기의 수준을 높여 보급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것 같다는 기대를 농담처럼 가지는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당장 이것이 가능하지도 않고,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모르니 이를 마냥 기다리는 것은 바보가 할 짓이다.

먼저 학교교육, 특히 고등학교 영어교육에 대한 불신과 불만을 해결하는 것부터 차분히 해야 한다. 대입의 수단으로 된 일률적인 현재의 수능에서의 영어에 대해서 심각한 재검토가 필요하다. 학교와 교사를 욕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현재 고등학교 영어교육의 현실적 목표는 모든 학생이 영어로 의사소통하는 것이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

학벌사회인 우리 교육현장에서 학생들이 영어 공부를 하는 가장 주된 목표는 수능에서 1점이라도 더 받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수능에는 듣기 평가 18 문제를 제외하면 모두 읽기 시험이다. 그리고 그 시험문제를 만들고 출제한 것은 대한민국 정부이다. 학교와 교사는 어쩔 수 없이 거기에 따라가는 것이다. 결코 학교의 책임, 교사의 책임으로만 돌릴 수 없다.

실제로 학교 현장에 가서 고등학교 3학년 교실에서 영어로 수업을 해 봐라. 외국인에게 고등학교 3학년 영어수업을 맡겨봐라.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수능 준비를 왜 안 하냐고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항의 때문에 난리가 나는 것이 현실이다. 학교 영어 교육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일단 수능 체제를 바꾸는 것부터 고민해야 한다.

정말 의사소통 능력을 고등학교 영어교육의 목표로 하려면 현재의 수능과 같이 모든 학생에게 성적을 요구하는 방식의 영어 시험을 폐지해 보자. 그러면 학교와 교사가 영화를 통해서든, 팝송을 통해서 하든 얼마든지 의사소통 중심의 영어수업을 할 수는 있다. 현재의 수능체제를 유지하려면 수능을 듣기, 말하기 위주의 의사소통 능력 측정을 중심으로 하는 시험으로 바꾸고 거기에 맞추어서 선생님들에게 수업 하게 해라. 물론 돈이 들고 평가에 어려움이 일부 있겠지만 정부는 그럴 수 있는 권한도 있고 능력도 있었다. 지금까지 정부가 수능을 통하여, 입시를 통하여 고교 영어수업을 왜곡시켜 놓고 모든 책임을 학교와 교사에게 돌리는 것은 국가 지도자들의 자세가 아니며, 나아가 무책임한 책임 회피이다.

모든 국민을 위한 영어교육의 해법에 있어서는 장하준 교수의 '영어 교육 이원화' 주장을 심각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영어를 정말로 필요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분리하자는 것이다. 영어를 학문적으로 필요로 하는 사람과 일상생활을 위해서 필요한 사람으로 구분하자는 것이다. 교양으로 필요한 사람과 수단으로 필요한 사람도 구분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진짜 자신이 직접 영어를 필요로 하고 잘 해야 하는 사람은 그에 맞게 집중적으로 공부를 하도록 하고, 자신이 필요하지만 다른 사람인 통번역사를 통해서도 가능한 사람은 그렇게 하도록 하고, 실생활에서 영어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교양 정도의 수준으로 영어 교육을 받도록 하자는 것이다. 또한 학교에서는 실생활의 의사소통 능력 배양도 필요하지만 시와 소설 같은 문학 영역도 분명히 필요하다. 모든 국민, 특히 모든 학생들이 영어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을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현재 입시명문고로 왜곡되어 있는 외국어고는 심각하게 문제가 있다.

영어는 국가경쟁력의 한 수단이지 결코 그 자체가 아니다. 현재의 심각하게 왜곡된 영어열풍은 국민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불행하게 하고 있다. 인수위가 내놓은 답은 결코 영어교육 정상화의 답이 아니며 오히려 사교육 증대와 학생부담 증가의 뇌관이다. 세종대왕이 울고 갈 일이다. 학교에서는 수능의 의사소통 중심 평가로의 개편 또는 대입을 위한 일률적 영어 평가 폐지, 그리고 국민적으로는 영어 교육의 이원화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될 때이다. 그 기본은 인수위가 내놓은 영어교육정책의 폐기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기자는 고등학교 현직 영어교사입니다. 새 당선자의 교육정책에 대해서 학교 현장과 교사의 입장에서 글을 연재 형식으로 써보려고 합니다. 너무 현장을 모르는 탁상공론인 것 같아 걱정이 많습니다. 가능한 쉽게 차분히 써보려고 합니다. 이 기사는 <민중의 소리>에도 송고했습니다.



태그:#영어, #인수위, #토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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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육에 관심이 많고 한국 사회와 민족 문제 등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해 보고자 합니다. 글을 읽는 것도 좋아하지만 가끔씩은 세상 사는 이야기, 아이들 이야기를 세상과 나누고 싶어 글도 써 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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