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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수업>

 

이런 이런…. 프란츠는 오늘도 어김없이 지각을 한다. 학교와 집의 거리가 가깝다고 해서 지각을 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개개인의 차이에 따라 더 많이 할 때도 있다. 프란츠가 그랬다. 학교와 집의 거리가 가깝다는 것을 믿고 늑장을 부리다가 지각을 한 경우가 한두번이 아니다. 오늘도 그랬다. 어김없이 지각이다.

 

걱정은 한가지 더 있다. 국어 문법에 서툰 프란츠를 눈여겨보셨는지, 담임 선생님이신 아멜 선생님은 유독 프란츠를 점찍어 혹독하게 국어 문법에 대해 질문하겠다고 단단히 벼르셨다. 그렇다고 철저하게 준비했을까?

 

물론 아니다. 프란츠는 이상하게도 국어에 서툴렀다. 특히나 문법은 너무 어렵게만 느껴졌다. 진득하지 못한 성격상, 프란츠는 어려움을 느끼면 금세 포기했다. 그래서 국어 문법은 금단의 영역으로 남았다.

 

그래서, 잠시 '땡땡이'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이내 접었다. 학교에 다니면서 상 한번 받아본 적 없는 프란츠에게 남은 것은 오직 개근상이다. 그것마저 받지 못하면 나중에 졸업식에 참석할 얼굴이 서질 않는다. 어머니도 얼마나 실망하실까? 그래서, 어쩔 수 없었다. 혼날 때 혼나더라도, 학교는 가고 봐야 한다.

 

프란츠가 학교에 가는 길에는 면사무소가 있다. 그 게시판에 가끔씩 마을의 중요한 문제가 달린 이야기들도 붙어 있기에, 어른들이 삼삼오오 모여 수군거리는 것도 목격하게 된다. 어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어두웠지만, 게시판에는 안 좋은 이야기들이 자주 붙는다. 굳이 신경쓸 필요는 없었다.

 

"학교에 가니? 뭐, 서두를 필요는 없다. 어차피 학교에 지각할 일 따위는 없었다."

 

서둘러 뛰어가는 프란츠를 향해 이웃 대장장이 아저씨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뭔가 이상했지만, 대장장이 아저씨가 프란츠를 이렇게 놀리는 일도 자주 있었기 때문에, 신경쓰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확실히 이상했다. 숨이 몰아치는 것도 각오하고 허겁지겁 학교에 갔지만, 늘상 들려오는 친구들의 떠드는 소리와 뛰노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일요일 아침으로 내가 잘못 알았나?"

 

하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교실 창문 속에는 선생님이 서 계셨으며, 아이들이 자리에 앉아있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은 여전했지만, 어쨌든 오늘도 지각을 했다는 자책에 발소리를 죽이며 스르륵 교실로 들어갔다. 아멜 선생님과 눈빛이 마주쳤다. 그런데….

 

"프란츠 왔니? 어서 네 자리로 가서 앉거라. 하마터면 너를 빼놓고 수업을 시작할 뻔했구나."

 

어라? 이상했다. 화가 나신 얼굴로 프란츠를 야단치며 내일은 지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하나마나한 다짐을 꼭 들으려던 아멜 선생님이 아니었다. 그뿐일까? 학부모 참관 수업도 아닌데, 교실 뒤에는 면장님을 비롯한 마을 어른들이 엄숙하면서도 굳은 표정을 지으며 앉아계셨다. 우리 어머니도 오시려나?

 

아멜 선생님은 곧 교단에 올라가셨다. 부드럽지만 가라앉았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씀을 이어가신다.

 

"여러분, 오늘 이 시간이 내가 국어로 여러분들을 가르칠 수 있는 마지막 수업입니다. 알자스-로렌 지방의 학교에서는 이제 독일어만 가르쳐야 한다는 명령이 베를린에서 내려왔습니다. 그러니, 지금 이 시간에 갖는 마지막 국어 수업을 부디 잘 들어주세요."

 

이럴수가. 그런 것이었구나. 그래서 면사무소의 게시판을 보신 어른들의 표정이 어두웠나 보다. 아멜 선생님은 나를 지목하신다. 문법 암송이다. 물론, 나는 더듬거렸다. 하지만, 아멜 선생님은 나를 탓하지 않으신다.

 

"프란츠, 잘 하진 못했지만 너를 야단치지는 않겠어. 네 마음도 이미 복잡할테니까. 너도 그렇지만 사람이란 '시간은 많으니까 내일 하겠다'고 미루길 좋아해. 하지만, 이젠 그럴수가 없어. 너만의 잘못이 아닌 셈이야. 우리 모두의 잘못이야."

 

아멜 선생님은 그러시더니, 국어의 자랑스러움을 이야기하신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명확하며, 가장 확실한 언어라는 것을 계속 강조하신다. 독일어로 수업을 받을지라도 우리는 국어를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마을 어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우리는 문법과 쓰기, 그리고 국사를 배웠다. 그때였다. 마을에서 가장 큰 성당에 있는 시계탑에서 정오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리더니, 훈련에서 돌아온 프러시아 병사들의 나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그러자, 아멜 선생님은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말씀까지 더듬으신다.

 

"여러분, 여러분 나는…, 나는…."

 

결국, 아멜 선생님은 칠판에 돌아서서 아주 크게 분필로 뭔가를 쓰셨다. 뭐였을까?

 

"프랑스 만세!"

 

프란츠는, 나폴레옹 3세가 프러시아의 비스마르크 수상 주도의 독일군과 벌인 '프랑스-프러시아 전쟁'에서 패해, 알자스 로렌 지방이 프러시아에 양도됐다는 사실을 뒤늦게 기억할 수 있었다. 이제는 프랑스의 국어와 국사는 배울 수 없는 것일까.

 

국어와 국사를 영어로 배우기

 

"초등학교 때부터 국사나 국어 등 일부 과목 수업을 영어로 진행하겠다."

"영어교육 하나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하는 것을 5년간의 국가적 과제로 삼고 역점을 둘 생각이다."

 

소설가 복거일씨가 거론한 적도 있었던, '영어공용화론' 정도는 한방에 묻혀버렸다. '영어교육 하나는 우리나라 학생들에게 제대로 하는 것'을 5년간의 국가적 교육과제로 역점을 둔다면서, 국사와 국어까지 영어로 진행하겠다는 방침을 밀어붙인다고 한다. 누가?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과 그를 축으로 하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과 인수위의 우리 국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것을 느낀다. 오죽하면, 그동안 정치에 대한 언급을 거의 하지 않았던 어느 소설가가 반발하며 대통령이 틀린 한글 맞춤법까지 지적하며, 그에 반발했을까? 그러나, 이것은 현실이다.

 

한글은, 조선 10대 임금 연산군을 비방하는데에 활용됐다는 이유로 전면금지된 적도 있으며, 아녀자나 천한 신분의 사람들이나 쓰는 저급한 언어라는 오해 속에서도 유구한 역사를 자랑해왔다. 탄생 과정에서도 보수적인 경학파 학자들의 반발을 온전히 감당해내면서 어렵게 태어난 문자다.

 

그뿐일까? 일제의 문화 말살 정책 속에서도 기어이 살아남은 한글이다. 그런 한글이, 국민의 투표로 선출된 대통령 당선인에 의해 '영어'로 가르쳐져야 할 위기에 처했다. 세계화 시대란 경제뿐만 아니라 문화마저도 위협하는 시대인가 보다.

 

우리 학생들은 이제 '프란츠'가 될 것이다. 하지만, '프란츠'와 같이 뒤늦은 후회마저 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던가? 우유병을 빠는 갓난 아기에게도 영어단어를 읽어주는 엄마들이 있는 나라다. 전국민이 토익과 토플에 미쳐, 적절한 수준의 점수를 얻지 못하면 취업을 비롯한 온갖 일에서 낙오자로 낙인찍혀야 하는 나라다. 그런 대한민국에서, '프란츠'의 뒤늦은 후회는 어불성설일 수도 있다.

 

자, 아멜 선생님처럼 과감하게 칠판에 '한글 만세'를 커다랗게 쓸 교사는 대한민국에도 존재할 것인가. 어느 소설가가 대통령 당선인의 틀린 한글 맞춤법을 교정해주며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한글의 역사를 알아야 하며, 그 고난을 알아야 한다. 용기있게 그것을 지적해주며 아이들에게 알려줄 수 있는 교사는 과연 존재하는가. '진정한 선생님'으로 거듭날 수 있는 기회일 수도 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교사는 과연 존재하는가. 글쎄다, 장담 못하겠다.

 

<오마이뉴스> 이민정 기자는, <왜 누구나 영어를 잘 해야하나요?>라는 의미있는 기사를 작성하면서, 장하준 영국 캠브리지대 교수의 발언을 인용한다. 장하준 교수는 <사다리 걷어차기>나 <나쁜 사마리아인들>과 같은 저서를, '영어'로 썼다. 그의 발언, 나도 한번 인용해보려고 한다.

 

"우리나라 전체적으로 보면 일부만 영어에 집중해서 외국과의 교류를 담당하고 다른 사람들은 자기 전공분야에 집중해서 실력을 기르는 것이 더 현명한 일입니다. 적은 비용으로 영어를 배울 수 있으면 자기 전공도 잘하고 영어도 잘하면 좋죠. 그런데 둘 다 잘하려면 엄청 힘들기 때문에 그것을 분업해야 됩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나라 많은 기업가들은 외국회사와 사업할 때 통역 쓰면 영어실력 떨어지는 것을 자기가 인정하게 되니까 그게 창피해서 실력이 안 되는데 영어로 합니다. 그러다가 모르니까 영어 잘하는 직원 불러내서 협상하다 일을 그르치는 적도 많습니다. 영어 못하는 것이 절대 창피한 것이 아닙니다.

 

영어 잘하면 전공분야에 대한 실력이 떨어져도 출세하기 쉽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목숨 걸고 영어를 배웁니다. 그러나 국가 전체적으로 볼 때는 이 과정에서 엄청난 돈과 노력이 낭비되면서 국력을 좀먹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정부가 역할을 해서 입시에서 영어 비중을 과감하게 줄이고 한편으로는 세계 최고수준의 통·번역사를 양성하기 위해 지원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는 나라에서 살고 있다고 해도, 우리는 엄연히 한글과 한국어를 쓰는 한국인이다. 우리는 미국인이 아니다. 대한민국은 엄연한 독립국이다. 미국의 식민지가 아니다.

 

이명박 당선인은 알퐁스 도데의 단편동화 <마지막 수업>을 읽어봤으면 좋겠다. 외국의 이야기지만, 우리 역사도 느껴볼 수 있는 동화다. 유익한 시간이 될 것이다. 자신이 하려는 일이 도대체 어떤 일인지, 한번 돌아보기를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미디어다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영어교육, #인수위, #이명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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