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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뜩한 충격

 

몇 해 전까지도 내 일과는 일어나자마자 대문 앞으로 가서 막 배달된 신문을 보는 걸로 시작되었다. 학교를 그만두고 강원도 산골에 내려와서도 계속 신문을 받아보다가 두어 달 외국에 나가는 일로 신문을 끊었다. 그때부터는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으로 뉴스를 보니까 크게 불편함이 없었다. 사실 산골에서 신문을 보니까 신문(新聞)이 아니라, 하루가 늦은 구문(舊聞)이었다.

 

지난 연말부터는 부도덕한 사람이 날마다 떠드는 게 보기 싫어 텔레비전 시청까지 자제하고 있다. 사실 그 전에는 그날 신문을 보지 않거나, 9시 저녁종합 뉴스를 보지 않으면, 마치 이빨이라도 닦지 않은 것처럼 찝찝해서 늦은 밤에도 신문을 훑었고, 텔레비전 마감뉴스라도 보고 잠들었다.

 

그런데 두어 달 외국에 머물면서 신문이나 국내 텔레비전 보도를 보지 않아도 살아가는 데 크게 지장이 없었다. 아니 내가 하는 일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 오늘 저녁 원고를 쓰다가 검색할 게 있어서 인터넷에 연결하자  “인수위, ‘전 과목 영어로 수업’ 추진”이라는 제목이 화면에 떠 있었다.

 

나는 전직 국어 교사이었기에 교육, 특히 언어 교육 문제에는 남다른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나 보다. 섬뜩한 충격으로 제목을 클릭하여 좀 더 자세한 보도를 보았다.

 

일반과목도 영어로 수업하는 방안 검토
 
이경숙 인수위원장은 새 정부에서는 영어 교육을 국가적 과제로 삼겠다고 밝혔습니다.

 

학교 교육만 받더라도 영어 하나 만은 제대로 할 수 있도록 하면 사교육비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경숙/대통령직 인수위원장 : 영어교육 하나만 제대로 우리나라에서 할 수 있다면 상당 부분이 줄어들지 않겠냐는 데 합의를 하는 것 같습니다.그래서 이 부분만은 정말 국가적인 과제로 삼고.]

 

이 위원장은 초등학교 고학년부터는 영어 이외의 일반과목도 영어로 수업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를 위해 영어로 수업할 수 있는 교사 자격제도를 마련해 영어 전담교사를 양성하고, 외국인 교사 충원을 위해 정부가 지원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이 위원장은 영어는 이제 교육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가 됐다면서 배경을 설명했습니다.

 

교도소로 가고 싶은 심정

 

순간, 이제 우리 교육이 막다른 곳으로 치닫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불을 끄고 잠을 청해도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어 다시 불을 밝히고 이 기사를 쓰고 있다. 일찍이 다산은 "나라를 근심치 않으면 시(글)가 아니다"라고 하셨다.

 

문득 몇 해 전, 베이징에서 한 원로 독립운동가에게 들은 상해 임시정부 초대 이승만 대통령의 탄핵 사유가 떠올랐다. 나라를 잃은 임시정부 대통령이라는 분이 우리나라를 미국에 위임통치 청원을 하여 물의를 일으키고, 동포로부터 모은 돈을 유용한 혐의로 임시정부 의정원이 보다 못해 탄핵하였다고 하셨다.

 

교통 통신의 발달로 지구촌에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영어의 중요성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독립된 나라에서, 반만년의 역사를 지닌 제 말과 제 글을 가진 문화 민족이 세운 나라에서, 일반 과목도 영어로 수업하는 방안을 새 정부 인수위원장이 검토하겠다는 발상은 예사로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 이런 발상을 하는 이가 새 정부의 권력을 이양 받는 책임자가 되었나? 정말 유류상종이다.

 

우리나라가 해방 후 친일파 청산을 하지 않은 그 후유증이 두고두고 백성들의 정신을 혼란시키고 있다. 하기는 연전에 만나 뵌 민족문제연구소 조문기 이사장님은 우리나라가 아직 독립이 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분은 대통령이 초대를 해도 참석치 않고 시청 앞에서 일인 시위를 하시는 분이었다.

 

“아직도 친일파들 세상이에요. 해방 후에는 그놈들이 더 신났지요. 일제 때는 상전(왜놈) 눈치를 봤지만 이제는 그런 것도 없잖아요.”

 

 나라의 앞날이 몹시 염려스럽다

 

나라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 도덕성과 정체성인데, 이 두 가지에 큰 흠결을 가진 새 정부의 지도자는 출범도 하기 전에 삐걱거리고 있다. 나라의 앞날이 몹시 염려스럽다.

 

정말 이따위로 계속 나라를 이끌고 간다면 강원 산골 촌놈이 일백년 전 의병들이 일어났듯이 뾰쪽한 죽창을 깎아들고 서울 광화문으로 달려가 나라의 정신을 좀먹은 무리를 혼내준 뒤 교도소로 가고 싶은 심정이다.

 

인수위원장! 그대는 어느 나라 인수위원장인가? 이 나라를 지킨 선열이 무섭지 않은가.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우리 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지푸라기처럼 버린 선열에게 부끄럽지 않은가. 시정잡배도 아닌 교육자 출신의 인수위원장이 이런 망발을 하다니…. 

 

우리 학생들이 불쌍하다.


태그:#인수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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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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