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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이 14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위원장 이경숙)의 정책 혼선 사실을 인정하려다가 최종 원고에서 삭제해, 그 배경에 이목이 집중된다.

 

이날 오전 서울 삼청동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열린 이 당선인의 기자회견은 사실상 대통령 당선인 신분으로는 첫 대국민 접촉이라는 점에서 언론의 관심이 쏠렸다. 이 당선인은 대선 다음날인 지난달 20일 내외신 기자회견을 열긴 했지만 당시에는 중앙선관위로부터 아직 당선인증을 교부받지 못한 상태였다.

 

특히 이 당선인은 이날 기자회견 시작 1시간 20분 전에 언론사에 배포했던 연설문을 기자회견 시작 13분 전까지 두 차례나 수정해서 재발송하는 등 막판까지 '대국민 메시지'를 다듬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본의 아니게 일부 혼선도 있었지만"... 최종 원고에서 삭제

 

연설문 수정으로 당선인 비서실 관계자 등 실무진은 진땀을 뺐지만, 이 당선인은 기자회견장에 마련된 '프롬프터(연설원고가 흐르는 스크린)'를 보며 여유있게 최종 작성된 연설문을 읽어내려갔다.

 

우선 이 당선인은 전날(13일) 인수위로부터 보고받은 새 정부 주요 정책과제 155개를 언급한 뒤, "인수위 관계자들과 정부 관계자들이 서로 협력하는 가운데 새 정부 출범 준비는 착실히 진행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당초 이 당선인의 원고 초안과 1차 수정안에는 "그 과정(인수위 논의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일부 혼선도 있었지만, 인수위 관계자들과 정부 관계자들이 서로 협력하여 열심히 한 덕택에 새 정부 출범 준비는 착실히 진행되고 있다"고 표현돼 있었다.

 

그러나 "본의 아니게 일부 혼선도 있었지만"이라는 발언은 기자회견 13분 전에 확정된 최종 원고에서 삭제됐고, 이 당선인 역시 이 발언을 빼놓은 채 다음 말을 이어갔다.

 

이와 관련 전날 인수위는 이 당선인에게 출자총액제한제 폐지, 장기보유 1세대 1주택자에 대한 양도세 인하 등 ▲경제 52개 ▲사회·교육·문화 24개 ▲외교·통일·안보 54개 ▲정무·법무·행정 17개 ▲경쟁력 강화 8개 등 총 155개 정책을 보고했다. 

 

인수위는 이들 정책 중 산업은행 민영화·금산분리 완화 등 경제정책은 물론 통신비 및 유류세 인하 등 서민 생활비 절감 방안 등을 마련하면서 정부 및 민간기업 등과 잦은 이견을 노출시켰다. 특히 신용불량자 720만명에 대한 대사면 조기 실시 및 공적자금 투입 등 설익은 정책들을 남발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이 당선인의 원고 초안에 "본의 아니게"라는 전제를 달기는 했지만 "일부 혼선이 있었다"고 인정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 당선인이 최종 원고에서 이 발언을 삭제했다. 자칫 이 당선인 스스로 인수위의 정책 수립 과정에 대해 '혼선'을 인정할 경우, 인수위 전체 업무에 적지 않은 차질과 불신이 초래될 것을 우려한 조치로 해석된다. 

 

[공약] "국민이 반대하면 추진 않는다" → "의견 수렴해 추진하겠다"

 

이 당선인이 원고 초안과 1차 수정안에 있던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국민들이 반대한다면 무리하게 추진하지 않을 것"이라는 문구를 빼고 "정책 추진과정에서부터 이해당사자와 전문가, 국민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여 추진해 나가겠다"는 애매한 표현으로 수정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볼 수 있다.

 

"국민들이 반대하면 무리하게 추진 않겠다"는 발언을 논란이 되고 있는 경부운하에 대입할 경우 또 다른 혼란을 불러올 수 있다고 판단한 것. 이날 기자회견에서 이 당선인은 "경부운하에 대한 반대 의견이 많으면 철회할 수도 있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운하사업은 100% 민자 사업이기 때문에 정부가 판단할 일이 아니다"고 에둘러 즉답을 피했다.

 

이 당선인은 정부조직 개편 문제에 대해서도 공직 사회의 불안 심리를 감안한 듯 표현 수위를 대폭 수정했다. 이 당선인은 당초 원안과 1차 수정 원고에서 정부조직 개편의 필요성을 강변한 뒤, "늦었지만 이번이 기회"라며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듯이' 새 정부가 출범하기 전에 정부조직 개편을 해야 새롭게 일을 할 수가 있다"고 주장했다.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표현은 정부조직의 대폭 개편은 물론 공무원 감축 문제로도 연결될 수 있다. 결국, 이 당선인은 실제 기자회견에서 "이번 기회를 놓치면 우리는 선진화의 기회를 놓치게 될 것"이라고 순화시켰다.

 

대선 이후 사실상 '여소야대'가 된 국회에서 정부조직 개편안의 통과 여부에 대한 이 당선인의 우려가 감지되기도 했다. 이 당선인의 기자회견문 원안과 1차 수정안에는 "국회의 협력 없이는 이 일(정부조직 개편)을 할 수가 없다"는 표현이 있었지만, 최종 원고에서는 빠졌다. 국회에 대해서도 처음에는 "도와주시기 바란다"고 표현했다가 나중에는 "협조해주시기 바란다"로 바뀌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행정부와 입법부는 대등한 입장"이라고 강조했던 이 당선인으로서는 나름대로 '자존심'을 지킨 셈이다.

 

이 밖에도 당초 원안에 있던 표현이 1차 수정안에서 바뀌었다가 다시 원안으로 되돌아온 사례도 있다. 이 당선인의 기자회견 원안에는 "이제는 국민들이 나라 걱정할 필요없는 시대를 열겠다"고 돼 있다. 이는 1차 수정 원고에서 "이제는 국민들이 나라 걱정을 덜 해도 되는 시대를 열겠다"로 바뀌었다. 그러나 최종 수정안에서는 다시 "이제는 국민들이 나라 걱정할 필요없는 시대를 열겠다"로 원상복귀했다. 

 

[정부조직개편] "새술은 새 부대에" 빼고, 국회에 "협조해주시기 바란다"

 

이 당선인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특히 '자신감', '긍정' '희망' '최선' 등 감성적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그는 15분 전에 바꾼 최종 수정 원고에 "하루아침에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을 이룰 수는 없지만, 국민 모두가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한다면 우리가 바라는 선진화의 길을 앞당길 수 있다"는 문구를 급히 추가하기도 했다.

 

이날 기자회견문의 제목도 '긍정적인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였고, 실제 원고에서도 "긍정적인 생각은 긍정적인 행동을 불러오고, 긍정적인 행동은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온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규제) 혁파' '단행하겠다' '해나가겠다' 등의 단호하고 힘있는 표현을 집중적으로 썼다.

 

대북정책과 관련 당초 원안에 있던 "6자 회담에서 합의된 것을 성실히 행동으로 지켜나간다면 남북협력의 시대는 앞당겨질 수 있다"는 수세적 표현을 "6자 회담에서 합의된 것을 성실히 행동으로 지켜나간다면 본격적인 남북협력의 시대를 앞당길 수 있다"는 공세적 표현으로 바꾼 것이 대표적이다.

 

회견문에 정성을 들인 탓인지, 이 당선인은 기자회견 직후 가진 기자들과의 일문일답에서 때때로 농담을 던지는 등 시종일관 여유 있는 모습을 보였고, 현안에 대해서도 비교적 상세히 설명했다.

 

첫 질문자가 새 정부 초대 국무총리의 역할과 위상에 대한 견해를 묻자, 이 당선인은 "대통령상을 물어봐야지 총리상을 물으면…, 그건 총리에게 물어야지"라고 답해, 웃음을 자아냈다.

 

또한 "이른바 '이명박 특검' 측에서 참고인 소환을 요청해오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마지막 질문에 대해선 잠시 뜸을 들이더니 "특검법, 꼭 이런 거 물어봐야 하냐"고 농담조로 반문한 뒤, 답변을 이어갔다. 대선 과정 내내 본인을 괴롭혔던 BBK 의혹 사건에 대한 질문에 유쾌하지 않은 기분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러면서도 "(경부운하에 대해) 일부 언론이 안 된다는 전제하에 보도를 하고 있다", "(교육 정책과 관련) 일부 언론에서 과외비와 대학 본고사 등을 우려하고 있는데, 깊이 보면 그런 게 아니다" 등의 표현을 쓰며 최근 언론보도에 대해 우회적으로나마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감성적이면서도 단호한 표현 즐겨 사용... 농담 던지며 '여유'

 

이날 기자회견장에는 이경숙 위원장, 김형오 부위원장 등 인수위 관계자는 물론 강재섭 대표를 비롯해 안상수 원내대표, 이방호 사무총장, 이한구 정책위의장, 나경원 대변인 등 한나라당 당직자들도 대거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기자회견 직후 이 당선인은 대체로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회견장을 떠났고, 인수위원장실에서 이들과 약 15분간 비공개로 환담했다.

 

이날 기자회견은 KBS, MBC, SBS 공중파 방송 3사 등이 전국에 생중계하는 등 언론의 취재 열기가 뜨거웠고, 출입구에서는 청와대 경호팀과 폭발물 탐지견까지 등장해 삼엄한 경계를 폈다. 이 당선인의 기자회견에 대한 보안 점검 때문에 인수위 간사단 회의가 취소되는 해프닝도 있었다. 간사단 회의는 기자회견장이 마련된 인수위 대회의실에서 매일 오전에 열려왔다.


태그:#이명박 당선인, #이명박 인수위, #신년 기자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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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너머의 진실을 보겠습니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지방자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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