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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가을에 꽃별씨를 봤습니다. 느낌이 좋아 더 깊은 얘기를 해보고 싶어서 지난해 12월 17일 청담동 '일마레'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그 때 나눈 눈물과 웃음의 수다를 토대로 글을 올립니다...<필자주>

국악은 무한한 가능성의 바다라고 말하는 꽃별
 국악은 무한한 가능성의 바다라고 말하는 꽃별
ⓒ 이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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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주문이다.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줄 때 이름에 깃든 기운은 염원이 된다. 스물여덟 해를 꽃과 별로 불렸다. "꽃별아". 수천수만 번의 울림이 그녀의 생애를 빚었다. 국악계의 별로 뜨고, 무대 위의 꽃으로 피어난 신세대 해금연주자 '꽃별'의 얘기다. 그녀도 말한다. 이름이 영희나 철수인 것보다는 뭘 해도 도드라졌으니, 이름에 책임을 지려고 열심히 살았노라고.

'열심'의 방법은 끼와 욕망에 충실하기다. 무엇은 이래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구애됨이 없다. 꽃별의 해금은 클래식, 팝, 뉴에이지를 넘나든다. 자유롭고 창의적인 연주를 들려준다. 연주스타일도 분방하다. 날렵한 청바지 차림에 민소매 티셔츠를 입는다. 때로는 맨발로 무대에 오른다. 정장이나 한복이 불편했단다. "어린 마음에 튀고 싶었다"고 터놓는다. 솔직한 그녀다.

한국과 일본에서 앨범 동시 발매... 국악계의 '보아' 

꽃별은 데뷔 전부터 통일 음악회 및 각종 음악회 등에 게스트로 출연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2001년 한국예술종합학교 2학년 재학시절 소리꾼 김용우 밴드의 뮤지션으로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했다가 현지 음악관계자의 눈에 띄어 일본에서 음악활동을 시작했다.

국악앨범으로는 처음 한일 동시 발매한 데뷔앨범 <Small Flowers>와 2집 <Star Garden>이 베스트셀러 기록했다. 2006년 3집 <Fly Fly Fly>를 발매하여 한국, 일본 오가며 왕성한 음악활동을 펼치고 있다. 단아한 외모, 해사한 미소 덕분에 '국악계의 보아'라는 별칭도 따라붙었다.

국악이 예술계의 뒷방 신세라고들 말하지만 그녀의 생각은 다르다. 적어도 그녀에게 "국악은 더 넓은 바다"다. 시어를 빌자면 '아무도 수심을 알려주지 않았기에 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두렵지 않다'에 해당한다. 쉼없이 되살아나는 바다 위를 가붓한 날갯짓으로 훨훨 향유한다. 변화무쌍한 물결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자 살아 있음의 증명일 뿐이다.

해금연주자로서 탄탄한 입지를 구축한 그녀는 지난해 11월부터 매주 일요일 한 시간씩 국군방송 '우리소리 국악대' 진행을 맡았다. 요즘 이것저것 재밌는 일이 많아서 행복하다며 웃는다. "걱정하지 않아도 올 때가 되면 온다. 준비하고 있으면 기회는 온다"고 당당히 말한다. 하지만 행복이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종종 생각한다는 말도 잊지 않는다.

생의 충만함에 어질한 현기증을 느끼는 그녀. 고통도 기꺼이 끌어안을 각오다. 만약 사람의 희로애락의 양이 나면서부터 정해져 있다면 앞으로 어떤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의연히 극복하도록 기도한다며 가만히 두 손을 모은다. 

'내 생애 첫 좌절' 재수가 나를 성숙케 했다 

꽃별이 인생의 '쓴맛'을 처음 느낀 건 열아홉, 대학입시에 떨어졌을 때다. 초등학교 때 국악공연을 보고 해금에 빠져든 이후 승승장구 탄탄일로를 걷던 그녀에게 처음으로 제동이 걸렸던 사건이다.

"수능도 잘 봐서 일등 했거든요. 단 한 번도 불합격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어요.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도 안 되면 뭐란 말인가 두렵고 허탈했어요. 그냥 사는 것에 배신감이 들고 자신이 없어졌죠. 심하게 방황했어요. 그런데 어느날 새벽에 목말라서 일어났다가 거실에서 엎드려 기도하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게 됐어요. 엄마가 저를 위해 잠도 안 주무시고 기도하는 모습에 마음을 다잡게 됐죠. 지금 생각하면 일 년 재수하는 거 정말 아무 일도 아닌데…."   

꽃별은 금세 눈물이 고이고 금세 웃음이 번진다.
 꽃별은 금세 눈물이 고이고 금세 웃음이 번진다.
ⓒ 이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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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구름 걷힌 파란하늘처럼 활짝 웃는다. 엄마 얘기를 하는 대목에선 눈가가 촉촉해지는 그녀다. 금세 눈물이 고이고 금세 웃음이 번진다. 

학창시절을 오로지 대학입시만 바라보고 달려온 대한민국 입시생으로서 낙방의 충격은 당연지사다. 일종의 심판이다. "너 지금까지 헛살았어"라는 잔혹한…. 인생을 긴 안목으로 바라볼 줄도 몰랐고 가르쳐주지도 않았으니, 기차표는 끊었는데 갈 곳 없어진 사람처럼 멍할 수밖에.

꽃별은 잠시 대합실 의자에 앉아 숨을 고르고 생의 긴 여정을 되짚어 보던 그 시간을 지금은 참으로 값지게 생각한다. 재수가 단순히 물리적으로는 일 년을 에둘러 돌아가는 일이지만, 인생관에 화학변화가 일어난 귀한 시간이었음을 고백한다. '자신이 원하는 걸 얻지 못하는 것이 때로는 큰 행운일 수 있다는 점'을 절절이 배웠으니 말이다.

해금, 내 얘기를 들어주고 들려주는 좋은 친구

"언제부터인가 해금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해금을 미워하게도 되었습니다. 미워한다고 말하게 된 순간부터 해금은 저에게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습니다. 무언가를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바로 그것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순간일지도 모릅니다. 해금은 나에게 그런 친구입니다."

꽃별의 데뷔앨범 속지에 적힌 글이다. 고백대로 해금은 그녀의 둘도 없는 친구이자 연인이다. 꽃별은 해금을 하나의 인격체로 대한다. "쟤"라고 칭하며 시시때때로 말을 건다. 세월에 농익은 살가움이 물씬 묻어나는 말맛이다. 깊은 우정의 비결은 이렇다.  

사람과의 관계는 상대를 배려하고 이해하고 이해받고 싶은 감정노동의 피곤함이 존재한다. 하지만 해금은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고 무조건 들어주고, 또 연주를 통해 다시 얘기를 들려준다. 그러니 완벽한 동반자이자 영원한 내 편이라는 것이다.

"제가 뭐에 미쳐본 적이 없거든요. 근데 해금은 연주를 하면 할수록 빠져들게 돼요. 해금의 매력은 닫혀 있지 않은 악기라는 점이죠. 가야금이 투명하고 매끄러운 양의 기운이 흐른다면 해금은 그리움, 외로움, 눈물이 배어있는 깊은 악기에요. 또 사람에게는 누구나 그런 마음이 있고요. 해금이 그곳을 건드리면서 위로를 주는 것 같아요."

상처받은 마음인 양 떠는 해금. 적어도 그녀에게 두 줄 해금은 전능한 화음을 제공한다. 아픈 선율이지만 무겁지 않다. 깊어서 맑다. 세상과 소통하는 도구로선 더없이 미덥다. 무대 위에서는 아예 날아갈 듯 행복하다고 한다. "관객이 나를 향해 좋은 기운을 주고 있어서 조금만 파닥거려도 날 수가 있다"고.

꽃별은 영리한 연습벌레다. 그녀에게 해금은 죽기 살기로 연습함으로써 정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평소에는 손에서 해금의 기운이 식지 않도록 노력한다. 콘서트를 앞두고는 다르다. 연락두절 하고 온종일 해금과 독대한다. 쑥과 마늘로 버티듯 연습실의 굴에 칩거한다. 외로우니까, 누군가와 얘기하고 싶으니까, 이 소리가 맞는 걸까 궁금하고 두려우니까 글을 쓴다. 그 무수한 질문들과 사유의 편린들이 노둣돌이 되어 하루를 지탱케 하고 꽃별을 영글게 했다.

"애인과 헤어지면 술 마시고 전화해요"

이름에 책임지기 위해 열심히 살았다는 꽃별. 삼사십대에는 해금의 색다른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싶다고 말한다.
 이름에 책임지기 위해 열심히 살았다는 꽃별. 삼사십대에는 해금의 색다른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싶다고 말한다.
ⓒ 이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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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그녀는 서른을 목전에 두고 있다. 이제 청바지와 맨발이 아닌 내면의 변화, 음악적인 새로움에 갈망을 느끼고 있다. 참말로 해금다운 것이 무엇일까 묻는 중이다. 음악이나 미술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어려워지는 고비가 있다더니 지금이 그 시기인 것 같다고 스스로 진단한다.

"예쁘고 소박하고 그리운 해금의 일반적인 정서에 감춰진 거칠고 섬뜩함을 표현해보고 싶어요. 아름다움에 질릴 때가 있거든요. 다른 아름다움을 보고 싶어요. 다듬어지지 않았는데 날 것 그대로 표현해도 어색하지 않은 것. 기교가 배제되고 헝클어진 듯 절도 있는 음악이요. 삼사십 대가 되면 될까 모르겠네요."

한없이 쿨한 듯싶지만 끈끈하고 웅숭깊은 그녀. 문득 꽃별의 사랑법이 궁금했다.

"사랑이요? 지금 애인 없어요. 헤어진 지 꽤 됐어요. 사랑하는 법을 잊어버렸나 싶어요. 내가 예전에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는 게 낯설어요. 쓸쓸하긴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 있으면 더 쓸쓸한 거 같아요. 막연하지 않고 대상이 분명하니까요. 그래서 전 사랑하는 동안에 굉장히 자주 울어요. 헤어질 때도 깔끔하게 못 헤어지고 술 마시고 막 전화하고 그래요." 

꽃별답다. 아니 애초 칼로 벤 듯한 이별은 없다. 게다가 감정의 출구가 활짝 열려 있는 그녀 아니던가. 그래서 해금이란 촘촘한 체로 걸러 세상과 접속하는지 모르겠다. 꽃별의 해금연주에는 웃음이 떠다니고 그리움이 흐르고 눈물이 자박자박하다. 감성의 부유물이 풍부하다. 여린 그녀는 그렇게 해금으로 보호받고, 인정 많은 그녀는 해금으로 위로를 건넨다. 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쟁쟁'거리며 속삭이는 것이다. 

꽃별은 올해 4집을 출시할 계획이다. 일본 기획사와 계약기간이 만료돼 새로운 곳과 일을 하게 됐다. 또 오는 3월 프랑스에 간다. 한국 연출자의 연극에 해금연주로 참가할 예정이다.


태그:#꽃별, #해금, #국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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