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인수위 활동이 시작된 이래 그 당당한 발걸음은 가히 세상을 요동치게 하는 듯하다. ‘교육부 해체’로까지 표현된 교육정책에 이르면 그것은 거의 ‘혁명전야’를 방불케 한다. 혁명? ‘혁명’이라면 가슴 설렐 이들이 많을지 모르지만 좀 냉정해지지 않으면 안 되겠다. 2008년 벽두를 흔들고 있는 이 혁명의 정체는 ‘왕후장상의 씨’ 운운하며 세상을 뒤엎은 그것과는 분명히 멀어 보이니 말이다.

 

1월 3일부터 5일까지 장봉군 화백이 그리는 <한겨레> 그림판의 주제는 새 정권과 ‘인수위’의 ‘맹활약’으로 드러난 ‘교육 정책’이다. 첫 날의 그림에서 학생과 학부모 등 교육주체는 쥐띠해에 맞추어 쥐로 비유되고 새 정부의 교육정책은 그들에게 투여될 주사제로 그려진다. 유리 상자 속에 꼼짝없이 갇힌 교육 주체들은 더 볼 것 없이 모르모트들이다. 물론 빈번히 바뀐 교육정책의 희생자로 그들을 바라보는 것은 익숙한 관습이고 풍경이다.

 

당권에서 멀어질지도 모르는 여성 지도자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긴 하지만, 두 번째 그림의 주제도 역시 기업의 요구대로 규제를 완화하겠다는 친기업 정책과 함께 대학에게 위임, 아니 ‘일임’되는 ‘입시’정책이다. 이 정책의 핵심 콘셉트는 ‘네 맘대로’다. 대학 입시에서 대학은 가장 중요한 당사자이긴 하다. 그러나 고교·학생·학부모 등 나머지 이해 당사자를 배제하고 대학에 입시 정책을 맡기는 것은 매우 편향적이며 일방적인 정책 추진으로 볼 수밖에 없다.

 

세 번째 그림은 ‘없던 일’이 된 ‘10조원 투입 신용 불량자 사면’이라는 해프닝을 상징하는 'MB정부'의 택시에서 시작된다. 보닛을 연 인수위가 배터리와 에어크리너 통을 과감히 해체해 버리는 그림이다. 각각 배터리와 에어크리너 통으로 상징된 것은 정부 부처 '통일부'와 '교육부'다. 그의 일성은 놀랍게도 ‘이런 거 없어도 잘 갈 거야!’다.

 

조금씩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이명박 정부의 교육 정책은 애당초 선거 과정에서 제시한 공약의 구체화인데도 정작 사람들은 조금 얼떨떨해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워낙 현 정부가 죽을 쑤었던 탓인가. 사람들의 ‘막연한 기대’는 이명박 후보에 대한 ‘묻지 마 지지’로 나타났다. "그러면 어때? 교육만 잘 살리면 되지" 당선자의 정책이 가진 계급적 지향이나 그 기조에 대한 합리적 이해보단 맹목적 기대가 앞선 것이다.

 

차기 정부 교육정책의 핵심은 ‘교육부 해체’로까지 표현되는 기존의 교육정책에 대한 불신을 바탕으로 한 ‘대입 자율화’다. 대학과 대입 정책은 민간(한국대학교육협의회)에, 초중등교육은 지방 자치단체에 맡긴다는 이 정책은 시나브로 그 ‘혁명적 변화’가 가져올 파장으로부터 논란을 확대 재생산하고 있는 중이다.

 

그 한편에 이 정책을 적극적으로 반기는 강남 대치동 학원가가 있다. 이들은 ‘누구나 똑같이 배우는 건 공산주의’라거나 ‘능력대로 가르치겠다는데 왜 막냐’면서 ‘어차피 사교육비를 많이 지출하는 사람들은 상위계층일 뿐’(이상 <오마이뉴스> 보도)이라는 논거를 들이민다. 특별한 변수가 없는 한, 이들은 이명박 정부 교육정책의 생광스런 수혜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이들 업자들의 뒤에 숨어 잘 보이지 않지만 강남을 비롯한 '부유 기득권층'도 강력한 이 정책의 지지자다. 이들은 소수지만, ‘교육 관련 여론’을 좌지우지하는 이른바 ‘오피니언 리더’들이다. 그리고 그들을 오피니언 리더로 추어 올리며 막강한 기득권의 성채로 군림하고 있는 보수 언론이 있다. '공부 못하는 아이의 가난한 학부모'가 꿈꾸는 '교육 기회의 평등' 이라는 정의가 여론이 되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을 지나가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대입 자율화 정책의 가장 행복한 수혜자는 대학이다. 그러나 ‘기타’ 혹은 ‘지방’ 대학은 ‘김칫국’을 마셔서는 안 된다. 이 정책은 전국의 수험생을 성적순으로 줄을 세우고 그 앞자리를 차지한 ‘명석한 아이’부터 순서대로 받아들이고 싶은 이른바 명문대학, 혹은 ‘서울 주요대학’에게만 ‘복음’이다.

 

‘교육의 수월성’과 ‘학력의 변별력’을 위해 ‘3불정책’, ‘평준화’ 정책의 포기와 세계에 유례없는 ‘본고사’를 되뇌는 대학의 요구는 ‘단순’하고 ‘명료’하다. 서울대 총장까지 포함하는 이른바 명문·주요 대학의 입시 책임자는 수능 성적 상위자 가운데, 혹시 ‘알곡’ 아닌 ‘쭉정이’가 끼는 불상사를 저어하는 것이다.

 

그것은 대학의 경쟁력을 발전기금을 조성하는 CEO총장의 능력과 등치하면서 검증된 학력의 신입생을 통해 자신의 기득권과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저급한 욕망의 다른 이름이다. 거기 ‘공교육’이나 대학의 ‘사회적 책무성’이 설 공간은 없다. 자립형 사립고를 확대하고 그 예산을 사학에 돌려달라는 사립대학 총장들의 후안무치한 요구는 21세기 한국 ‘아카데미’의 현주소다.

 

대입 자율화 정책과 관련하여 한국대학교육협의회(대교협) 총회에 들른 당선자가 정책 이행을 약속하면서 ‘제어장치’의 문제나 정책의 ‘조율능력’ 따위의 문제 제기는 묻히고 있다. 대교협 차기 회장에 전경련 출신의 대학 총장이 선임되었다는 소식은 ‘시장주의’로의 가파른 질주를 예고하는 전주곡일지 모른다.

 

 

이명박 정부의 핵심 교육 공약인 ‘특수목적고·자율고 설립 권한의 지방 이양’, ‘고교 다양화 300 프로젝트’ 등은 사교육 시장을 키우면서 학원들에게 새로운 도약기를 제공하고 있는 듯하다.

 

온라인 사교육업체인 메가스터디 주가를 큰 폭으로 치솟게 한 이른바 ‘이명박 특수’와 ‘연간 30조 원의 사교육비를 절반으로 줄이겠다’는 당선인의 공언 사이의 갭은 아주 커 보인다. ‘교육 정책의 변화로 사교육 시장은 확장될 것’이라는 증권사의 분석이 훨씬 설득력이 높아 보이는 까닭이다.

 

특목고·자율고 설립 권한을 시도 교육청에 넘기게 되면 수도권 상위권 대학은 이들 학교 출신으로 채워지면서 ‘교육의 양극화’가 심화될 것이라는 비판적 전망은 결코 지나쳐 보이지 않는다. 농어촌 지역에 기숙형 공립고 150곳을 설립하겠다는 공약도 소수 엘리트 학교와 그렇지 못한 학교로 나뉘면서 나머지 학교는 들러리가 되어 버릴 것이라는 우려 앞에선 빛을 잃는다. 
 
그래도 사람들은 기대를 쉽게 버리지 않는다. 문제는 그 ‘살림’에 자신들이 포함되지 않을 가능성이 훨씬 큰 쪽으로 상황은 전개되리라는 점이다. 유권자는 바보가 아니다. 그들은 이명박 교육 공약이 가진 계급적 성격을 이해하지 못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자신이 차기 정부의 교육 정책의 수혜자가 될 가능성이 낮은데도 불구하고 기존의 지지를 거두지 않은 것은 일종의 미스터리다.

 

그러나 그 답은 지극히 가까이 있다. 오늘날 교육이 더 이상 ‘개천의 용’을 내지 못하는 한계에 이르렀다는 일반의 평가에도 불구하고 교육을 통한 ‘계층(계급) 상승’의 욕구는 여전히 비등점에서 끓고 있다. 이 ‘20:80’의 세상에서 자신을 20의 영역에 안착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의 욕망이 바로 그 비등점이다.

 

자기 자식을 바라보는 어버이의 눈만큼 맹목적인 기대로 넘치는 것은 없다. 학부모들은 어떤 형태로든 자식이 명문대로 진학할 수 있으리라는 털끝 만한 가능성조차 결코 배제하지 않는다. 객관적 학력과 무관하게, 학비 보조를 받는 저소득층조차 수십만 원이 드는 ‘과외’를 포기하지 않는 이유다.

 

“그러면 어때? 교육만 살리면 되지.”

 

그렇게 믿는 사람들의 그림 속에 자신이 그 ‘살림’의 구원으로부터 배제된 경우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이미 알고 있듯 현실은 냉혹하다. 나는 두려움 속에 2008년 1월 1일자 <한겨레> 그림판의 그림을 읽는다.

 

서해 바다에서 기름 제거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걷는 것은 기름만이 아니다. 그들은 어민들의 삶터를 오염시킨 기름과 함께 88만원 세대를 양산한 ‘취업난’을, ‘양극화’와 ‘사교육비’를 걷어내고 싶어한다. 그러나 지난 5년간의 ‘절망’을 넘어 그들이 새로이 겨누고 있는 ‘희망’의 시간들은 그리 녹록해 보이지 않으니, 나는 진실로 두렵고 또 두렵기만 하다.


태그:#사교육, #교육 정책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쉰이 넘어 입문한 <오마이뉴스> 뉴스 게릴라로 16년, 그 자취로 이미 절판된 단행본 <부역자들, 친일문인의 민낯>(인문서원)이 남았다. 몸과 마음의 부조화로 이어지는 노화의 길목에서 젖어 오는 투명한 슬픔으로 자신의 남루한 생애, 그 심연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