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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다사다난했던 2007년이 저물고 2008년이 밝았다. 한반도 평화와 관련해 2008년이 갖는 역사적 무게는 대단히 크다. 2001년 출범이후 북한에 대한 일방주의적 강경책으로 위기를 자초했던 부시 행정부는 작년 들어 "임기 내 북핵 해결"을 목표로 대북정책을 전환하면서 북한과 숨가쁜 외교전을 전개하고 있다. 부시의 대북강경책에 핵카드를 꺼내들고 정면으로 맞섰던 북한은 부시가 마음을 바꾸자 이에 호응하면서 '반미'에서 '친미'로의 방향 전환을 모색하고 있다.

 

그러나 2007년까지 마무리하기로 했던 북핵 신고와 이에 대한 미국의 상응조치가 기약 없이 표류하고 있다. 이에 따라 북핵 폐기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그리고 북미·북일관계 정상화가 본격적으로 논의될 것으로 기대되었던 2008년은 한반도 상공에 낀 짙은 안개와 함께 시작되었다.
 
문제는 앞으로다. 북미 양측이 서로에 대한 기대 수준을 낮추고 상호 만족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다면, 지체된 한반도 평화 정착 과정은 다시 속도를 낼 수 있다. 그러나 이를 기대하기가 쉽지 않다.

 

북핵 신고와 관련해 쟁점은 크게 세 가지다. 2차 핵위기의 발단이 되었던 우라늄 농축 문제, 작년 9월 초 이스라엘의 시리아 폭격을 계기로 불거진 북한-시리아 핵거래설, 북한이 보유한 플루토늄의 분량과 사용 내역 등이 바로 그것들이다. 그런데 앞의 두 가지에 대해서 미국은 북한이 어떠한 형태로든 고백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고, 북한은 '없는 걸 어떻게 고백하느냐'는 태도다.

 

플루토늄과 관련해서도 미국은 북한이 50kg 정도 신고해야 한다고 보고 있는 반면에, 북한은 30kg 정도라는 입장이다. 둘 사이에 존재하는 플루토늄 20kg은 핵무기를 3-4개 만들 수 있는 분량이다. 미국이 적당히 덮고 넘어가기 쉽지 않은 사안인 것이다.

 

'진실 게임'을 넘어선 UEP 공방의 본질

 

미국은 '있다'고 하고, 북한은 '없다'고 맞서고 있는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UEP) 논란이 담고 있는 함의는 '진실 게임' 그 이상이다. 이는 1994년 제네바 합의 파기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는 책임론과도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특히 UEP를 둘러싼 갈등의 이면에는 경수로 사업의 미래가 걸려 있다. 만약 미국의 주장대로 북한이 UEP를 개발했다면, 북한이 경수로 사업을 조기에 보장받기는 힘들어진다.

 

반대로 UEP 논란이 부시 행정부의 허위·과장에 근거하고 있다면, 경수로를 비롯한 기싸움에서 부시 행정부는 북한에 밀릴 수밖에 없다. 특히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및 이란의 핵개발 정보를 조작·과장한 것이 드러난 상황에서 북한의 UEP마저 조작한 것으로 드러난다면, 부시 행정부는 국제사회에서 '양치기 소년'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북한이 UEP를 추구했더라도 핵무기 제조 능력과는 거리가 멀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이는 UEP로 인해 핵협상이 결렬되는 것이 미국에도 부담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이 최근 들어 핵무기 개발을 전제로 한 고농축 우라늄(HEU)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북한의 UEP 보유 가능성도 '높은 수준'에서 '중간 수준'으로 정보 판단을 하향 조정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부시 행정부는 자신의 체면을 다소나마 살려주는 방향으로 북한이 UEP를 해명한다면, 이 문제를 더 이상 문제삼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북한이 시리아의 핵개발을 지원했느냐'의 논란은 그 자체가 큰 걸림돌이 될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미국의 강경파들은 이 문제를 쟁점화하려고 시도해왔으나, 부시 행정부는 이에 대해 확인도 부인도 하지 않는 'NCND'를 고수하고 있다.

 

이에 따라 북한이 "핵 물질, 기술 또는 노하우를 이전하지 않는다"는 작년 10월의 약속을 거듭 확인해준다면, 부시 행정부도 NCND를 계속 유지하면서 이 문제가 확대되는 것을 방지하려고 할 것이다. 다만, 북한이 UEP 및 플루토늄을 미국이 원하는 기준에 한참 못 미치는 수준에서 신고한다면, 시리아 핵개발 지원설 역시 이들 문제와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논란거리로 남게 될 것이다.

 

UEP 및 북한의 시리아 핵개발 지원설에 비해 공론화는 덜 되어 있지만, 가장 심각한 문제는 플루토늄 신고가 될 가능성이 높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미국의 추정치와 북한의 알려진 신고치 사이에는 20kg 정도의 간극이 존재한다. 그런데 20kg은 핵무기 3-4개를 만들 수 있는 분량이다. 1990년대 초반 수kg 플루토늄의 불일치 문제로 전쟁 위기까지 갔던 사례를 떠올려 보면, 오늘날 20kg 정도의 간극이 담고 있는 심각성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들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얼마전까지 낙관론으로 가득했던 2008년은 다시금 비관론에 그 자리를 내주게 될 것이다. 특히 북미관계의 교착 내지 악화는 '핵 폐기 우선'과 '상호주의'를 내세운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과 맞물리면서 남북관계도 후퇴시키게 될 것이다.

 

이는 이른바 '코리아 리스크'를 국제사회에 환기시키면서 시대의 화두로 떠오른 '경제살리기'에도 치명타를 가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평화는 '죽고 사는 문제' 그 자체이자, '먹고 사는 문제'의 가장 기본 토대이다.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북핵 신고 문제를 하루빨리 풀어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믿어라, 그러나 검증하라"

 

문제 해결의 기본 방향은 군축 협상의 명제처럼 자리잡은 "믿어라, 그러나 검증하라"(Trust but verify)에 있다. 미국은 검증 단계에서 확인할 수 있는 북핵 신고의 완전성과 정확성을 신고 단계에서 확보하려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북한은 비핵화 의지의 진정성을 보여주기 위해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강력한 검증을 수용해야 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미국은 북한이 강력한 검증체제를 수용하는 것을 전제로 북한의 신고를 일단 수용하고 에너지 지원, 테러지원국 해제 등 상응조치를 취해야 한다. 북한은 강력한 검증을 받겠다는 구체적인 실천 조치로 핵확산금지조약(NPT)에 복귀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 추가의정서에 서명·비준함으로써 지속적이고도 강력한 검증 체제하에 들어와야 한다. 이러한 해법을 '잠정적 신고와 강력한 검증의 교환'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이 IAEA의 추가의정서를 서명·비준하게 되면, 논란이 되고 있는 여러 의혹들은 상당 부분 해결이 가능하다. IAEA 사찰단은 현재는 물론 과거와 미래의 핵활동에 대한 추가 정보 요청, 신고 시설에 대한 불시 사찰, 환경 샘플링, 위성 사진을 비롯한 다른 회원국이 제공하는 정보 이용, 우라늄 광산부터 핵폐기물 저장시설에 이르기까지 핵연료주기에 대한 접근권 등 상당한 권한을 갖게 된다.

 

또한 IAEA 추가의정서를 서명·비준한 국가는 핵 장비의 생산 및 수출입, 연구개발(R&D) 등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야 하고, 추가의정서 비준 180일 이내에 보다 상세한 핵 신고 목록을 제출할 것을 요구받는다. 이러한 강화된 권한을 통해 신고된 핵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미신고 내역까지도 상당 부분 검증이 가능하다. 이러한 강화된 사찰 권한은 IAEA가 이란이 20년간 은폐했던 핵 프로그램을 발견할 수 있었던 요인이기도 하다.
 
물론 IAEA 추가의정서가 완벽한 것은 아니다. 미신고 시설에 대한 특별사찰과 같은 백지수표까지 사찰단에게 위임되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IAEA는 장비, 인력, 예산이 부족하다. 이러한 부족분을 메우기 위해 6자회담 참가국들 가운데 일부가 북핵 사찰단에 합류할 수도 있고, 이것이 정치적으로 문제가 있다면, 장비와 예산을 IAEA에 지원하는 방안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6자회담 참가국의 지원은 IAEA의 사찰 능력을 강화하고 속도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다.

 

 

이처럼 북한의 IAEA 추가의정서 서명·비준을 통한 '잠정적 신고와 강력한 검증의 교환'은 정체된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 정착 과정을 재가동할 수 있는 유력한 방안이다. 또한 북한이 IAEA 추가의정서 체제에 편입되는 것은 위기에 빠진 비확산체제를 활성화하는데 크게 기여를 할 수 있다. 이는 물론 부시 행정부에도 큰 외교 성과로 남게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내일신문 2008년 1월 2일자에 기고한 칼럼을 대폭적으로 보완한 것입니다. 이 기사의 (하)편에서는 '검증과 핵폐기 협상을 동시에 진행하자'는 제언을 담을 예정입니다. 


태그:#북핵 ,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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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네트워크 대표와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저의 관심 분야는 북한, 평화, 통일, 군축, 북한인권, 비핵화와 평화체제, 국제문제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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