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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당분간 텔레비전을 보지 맙시다

 

 

산골로 내려온 뒤 신문도 한 해 보다가 하루 늦게 배달되는 ‘구문(舊聞)’이라 끊고 지내고 있다. 그동안 줄곧 봤던 텔레비전이 지난 초가을부터 더 이상 고칠 수 없도록 고장이 나서 폐기처분 한 채 서너 달 그냥 지냈다. 다행히 세상 소식은 인터넷을 통하여 어림잡고 지내는데 크게 불편치 않다. 저녁 종합뉴스에 중독이 든 현대인들이 많지만 그걸 보지 않아도 살아가는데 지장이 없을 것이다.

 

우리 내외가 서울을 떠날 때 학교 앞으로, 직장 앞으로, 따로 나가 살던 아이들이 살림을 합치자 그들이 보던 텔레비전이 한 대 남게 되었다. 얼마 전 아들이 이곳에 내려오면서 그 텔레비전을 실어다주고 갔다.

 

이 산골은 난시청 지역이라 지난 12월 17일, 마침 위성안테나와 연결 개통을 하였다. 이 즈음은 때마침 대통령 선거 막바지요, 투표와 개표 방송 등으로 볼거리가 많아 며칠 동안 안채 밥상머리에 앉아 여러 시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어제 저녁, 종합뉴스시간 대부분이 대통령 당선자 보도로 그걸 보고 있는데 부엌일을 끝낸 아내가 정색을 하고는 “우리 다시 당분간 텔레비전을 보지 말자”고 제의했다. 아내는 대통령 당선자를 텔레비전 화면으로 보거나 목소리조차도 듣기 싫다는 속내 같았다.

 

결혼한 뒤 30여 년 산동네에서 단 한 번도 이사를 가지 않은 채 살다가 집을 팔고서 이곳 산골로 내려온 아내에게는 대통령 당선자 부부의 성공 이야기가 매우 역겹게 들렸나 보다.

 

역겨웠던 위장 전입자

 

나는 33년간 교사로 있으면서 10번 정도 1학년 신입생들을 담임하였는데, 학기 초에 담임의 일 가운데 해마다 빠짐없이 하는 것은 학생들의 주민등록등본을 거둬 철해 두고는 틈틈이 그걸 보며 학생생활기록부를 작성하는 일이었다.

 

요즘은 주민등록이 전산화되어 전국 어디에서나 발급받을 수 있고, 글자도 인쇄체로 또렷하다. 하지만 1970~90대까지는 일일이 손으로 기록한 주민등록등본이었다. 그렇기에 이사를 많이 한 학생의 주민등록등본은 장수도 여러 장인 데다가 해지거나 너덜거리는 것을 복사해 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애초에 동회서기나 면서기가 쓴 글씨가 닳아서 잘 보이지 않기에 담임이 잘못 읽어 학생생활기록부에 이름이나 생년월일 또는 주민등록번호를 잘못 기록하는 실수를 하는 일이 더러 있었다.

 

주민등록등본을 두세 장 제출하는 학생 부모 가운데는 군인과 같은 특수직으로 어쩔 수 없이 이사를 자주 해야 하는 분도 있다. 또 살림이 매우 어려워 세를 살다보니 자주 옮기는 분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큰 집에 살면서도 부부와 가족이 이합집산을 거듭하고, 심지어는 전혀 연고도 없는 시골까지 잠깐 동안 주민등록을 옮겼다가 원 주소로 돌아온 가정도 더러 있었는데, 그런 가정은 대체로 부동산 투기에 이골이 난 이들이거나, 이른바 자녀들의 취학을 위해 위장 전입을 아무런 꺼리낌 없이 한 경우들이었다. 이런 이들은 제가 가장 잘난 양 여기고, 법과 원칙 도덕을 지키고 사는 이를 고지식하다고 바보처럼 여긴다. 사실 이런 학생의 주민등록등본을 볼 때는 솔직히 마음속으로 그 부모들이 인생을 지저분하게 산다고 매우 욕을 했다.

 

1970년대에는 내가 근무했던 학교에서도 위장전입자가 더러 있어 학기 초에는 서울특별시 교육위원회(지금의 교육청)에서 그런 학생을 찾아 원주소지로 돌려보내라는 공문을 받고는 교사들이 수사관처럼 학생 집을 확인하는 그런 촌극도 없지 않았다.

 

그 뒤 강남 개발 붐이 한창 불고는 그런 일들이 강남학구로 옮아갔지만 서울특별시 교육위원회에서는 해마다 학기 초면 겪는 위장 전입 대홍역이었다. 사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의 처지에서도 그런 학부모나 학생을 만나면 매우 짜증나는 일이다. 애꿎은 아이에게 대놓고 “너희 부모는 왜 그러냐?”고 시정잡배와 같은 부모를 욕할 수도 없고, 그런 아이에게 위장전입 같은 탈법을 하지 말고 살라는 것은 간접적으로 부모를 욕하는 일이 아닌가?

 

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대통령 당선자

 

어쩌다가 우리나라 백성들은 그런 부모를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모시게 되었을까?  왜 우리는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진정으로 존경할 수 있는, 법과 양심 도덕을 지키는 그런 지도자를 모실 수 없나? 대한민국에는 그렇게도 인물이 없는가. 대한민국을 어떻게 지키고 보존한 나라인데 이런 작은 법과 질서도 지키지 않는 사람이 대통령도 되는가.

 

진작 그런 인물인 줄을 알고도 공천한 정당이나, 그런 인물을 좇는 정치인이나, 그런 후보자에게 압도적인 표를 몰아준 유권자들이, 내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나는 그동안 온 매스컴에 제기된 대통령 당선자의 의혹 가운데, 본인이 시인하고 사과한 것만 지금 얘기하고 있다. 대통령 선거 기간 중에 후보자의 이런 점을 상대 후보가 지적하면 많은 유권자들이 “대통령은 성직자를 뽑는 게 아니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있느냐?”라는 자기 비하요, 자기 합리의 망국적인 말로써 후보자의 의혹을 덮어주고. 어떤 지역에서나 일부 계층에서는 거의 ‘묻지 마’식 투표를 하였다.

 

자기들이 투표한 결과가 가져올 나라의 앞날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도 하지 않고서 오직 제 눈앞의 이익에 치우쳐 투표한 듯하다. 그것이 곧 부메랑이 되어 자기와 후손, 그리고 나라와 겨레에게 돌아올 재앙인지도 모른 채. 

 

대통령이 누군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앉는 이다. 새삼 들먹거리고 싶지도 않지만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지 않겠는가? 역사를 조금이라도 읽어보면 나라가 망하거나 쇠할 때는 예외 없이 부도덕한 임금이나 지도자가 나왔다. 신라가 망하고 백제가 망할 때도 그러했다. 이웃 청나라가 그러했다.

 

최상층부가 부도덕한데, 지도자들이 자기는 그런 줄도 모른 채, 아래 관리에게 “부정부패하지 말라” “요령 피우지 말고 법을 지키라”라는 말이 씨가 먹히겠는가.

 

거짓의 탈을 벗겨라

 

이런저런 생각에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삭이며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오는데, 앞집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저녁 군불을 지피는 모양이었다. 나는 내 집 아궁이를 연탄보일러로 고친 뒤 장작불이 생각나면 앞집 아궁이로 가 불을 쬐면서 주인과 이런저런 노변(爐邊; 화롯가) 정담을 나누곤 한다.

 

“어서 와서 불 쬐오.”
그새 아궁이는 뻘겋게 장작이 타고 있었다. 부인은 이른 아침 찐빵 집에 가 저녁 늦게 돌아오기에 부뚜막 옆 화로에다가 저녁밥을 짓고 있었다. 그 화로 불에다가 차를 끓여 마시니까 차 맛이 더 좋았다.

 

“앞으로 5년 동안은 도둑놈들이 더 날뛸 것 같아요.”
“왜 그러지요?”
“아, 몰라서 물어요. 윗물이 흐리니까 도둑들이 제 세상을 만난 격이 아니겠소?”
비록 지게를 지고 산에서 나무를 해다 군불을 지피고 살지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는 훤히 알고 있었다.
“나는 아무 번을 찍었는데 어떤 놈들이 그렇게 말 많은 사람에게 찍었는지…. 다 나라 운이지요.”

 

집에 돌아와 컴퓨터를 켜자 화면에 '대전서 입시학원장이 사채 갚으려 부녀자 납치. 강도'란 기사가 떴다. 그 아래에 한 독자의 댓글이 오늘의 세태를 조롱하고 있었다.

 

전과자가 대통령 되는 세상인데 뭐~ ㅇㅇㅇㅇ님 생각 | 2007.12.22  |  14범까지는 다 용서한다.

 

 

나는 흐트러진 마음을 가다듬고자 산책을 하고는 책꽂이에서 스승이 서명해 주신 책을 펼쳤다. 행간 사이로 스승의 말씀이 들렸다.

 

“부도덕한 지도자에게는 쓴 소리를 아끼지 말 것이며, ‘국토 대운하’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온 나라를 파헤치는 일만은 네 힘껏 막아라. 내 지하에서라도 도와주겠다.”


“정권은 유한하지만 나라와 겨레, 국토는 무한하다.”


“두려워하지 말고, 그 천박한 거짓의 탈을 벗겨라.”

 

나는 이 말씀에 용기를 얻어 책장을 덮고 이 글을 썼다.


태그:#대통령 당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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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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