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가까워오니 예상 못했던 뜻밖의 만남이 생기기도 합니다. 며칠 전, 잘 열어보지 않는 메일통을 확인해 보니, 낯선 이름의 편지가 한 통 들어와 있었습니다. 이 누리집(블로그)의 소소한 글들을 통해 저를 알게 되었다는 그녀는 간략한 자기 소개와 함께 궁금한 것을 적어 부탁해 왔습니다. 무척 반가운 마음으로 짧은 답장을 보내며, 온전히 마음과 생각으로만도 이어질 수 있는 인연이 있음을 감사했던 하루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저처럼 힘없고 나약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해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의 따듯한 사랑이 더 그립고 애틋하게 저며오는 밤입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일이 십 여일 남았습니다. 그래서 오는 일주일은 특별히 관련 성화들을 많이 찾아 소개하고 또 이전 글들도 다시 정리해 나누고자 하므로 애정어린 관심을 바랍니다.

감상적이고 단아하면서도 우아한 정취를 자아내는 그림들

오라치오 젠틀레스키(Orazio Gentleschi, 이탈리아, 1563-1639)는 우리에게 그리 잘 알려진 화가도 아니며 현재 남은 그림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좋아하는 화가이며, 그의 오늘 작품들은 제가 무척 아끼는 것들입니다. 예수 탄생과 관련한 여러 성화들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그림입니다. 여러 날을 소요하며 젠틀레스키의 초상화를 찾아보았지만,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해 아쉽게도 소개하지 못함을 양해바랍니다.

젠틀레스키의 본래 이름은 노미(Orazio Lomi)며 이탈리아 피사(Pisa)에서 태어났으나 1576년에 바로크 회화의 중심지였던 로마(Rome)에 정착합니다. 예술가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딸(Artemesia)도 역시 가족의 전통을 이었습니다. 로마에 있던 삼촌의 화실에서 훈련을 받았으나 작품활동은 그의 나이 거의 40이 되어서야 시작했습니다.

예술가의 가업을 이어 카라바조풍을 발전시킨 젠틀레스키

그는 제노바(Genoa)에서 함께 작품활동을 했던 루벤스(Peter Paul Rubens, 벨기에, 1577-1640)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여기에 17세기 초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이탈리아, 1573 - 1610)와의 만남과 우정은 그의 작품세계에 갑작스런 변화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는 앞으로 선보일 카라바조의 완고한 자연주의와 권위는 없었으며, 오늘 보시는 것처럼 무척 감상적이고 정교합니다. 또한 그의 작품들은 단아하고 우아한 정취를 자아냅니다.

그는 밝은 색채에 강렬한 명암을 포기하고 카라바조풍을 퍼트리는데 일조하였습니다. 영국왕실로부터 칭찬도 받았으며, 그리니치(Greenwich)에 있는 여왕의 저택 지붕에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습니다. 지금도 런던에 있는 말보로(Marlborough, 영국의 장군) 저택에 그의 그림이 남아 있습니다.

1612년에는 마쉐(Marches)에 정착해 대성당(Fabriano cathedral)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1621년에는 사울리(Sauli)라는 귀족의 초청으로 제노바(Genoa)에 갔는데, 이것이 국제적인 성공의 출발이었으며 여러 귀족의 후원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제노바에 있는 동안 명작으로 인정받고 있는 작품 '예수 나심의 예고(수태고지, Annunciation)'를 완성하였습니다. 사보이 공작(Savoy duca) 가족과 만나면서 1624-1626년까지 파리에서 작품활동을 했습니다. 그 후 런던으로 옮겨 왕실화가가 된 뒤 그 곳에 계속 머물렀으며 그 곳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천사로부터 예수의 잉태 소식을 받아들이는 마리아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 생각하매,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누가복음 2 : 26-38)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누가복음 2 : 1-6)

세 그림 가운데 맨 위의 첫번째 작품은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약 20점 정도의 그림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이며 특히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주름을 잡아 예쁘게 드리운 상당히 큰 커튼과 마리아의 흰 침대가 주는 순결한 느낌은 그가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았음을 입증하는 증거입니다. 전체적으로 햇빛과 밝은 감성에 기초한 사실적인 감각을 품어내고 있습니다.

인간 내면의 엄숙한 품격과 겸허한 감정을 환기시킨 그림들

위 세 그림을 모두 감상한 것과 같이 오라치오 젠틀레스키는 그의 작품에 두 가지 효과를 창조하는 매우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화폭 안에 인간의 엄숙한 품격과 가려놓은 듯한 숭고한 분위기에 초점을 맞추어 포착해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의 품격과 엄숙함이 아니라, 깊고 겸허한 인간내면의 감정을 무척 정밀하게 환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세번째 그림에서 마리아가 입고 있는 짙은 포도주색의 옷과 첫번째 그림의 붉은색 커튼은 그 색채와 질감으로 그리고 커튼의 입체적인 주름으로 그림 전체의 분위기를 매우 성스럽고 우아하게 이끌어 갑니다. 그리고 두번째 그림은 제단 위의 구름을 입체적인 배경으로 부드럽고 곱게 표현함으로써 마리아의 순결함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성화에서 만날 수 있는 엄숙하고 성스러우며 경건한 분위기가 주를 이룹니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신비스러워야 할 천사의 손 끝이나 몸짓, 표정, 옷 매무새 등은 다소 귀엽고 천진스럽게 묘사했습니다. 반면, 성모 마리아를 비롯한 아기와 사람들의 자태나 표정, 옷의 색채는 조용하고 다소곳하게 묘사하여 그림 전체의 품격과 감정을 이끌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마리아의 태연한 듯 담담하고 초연한 자태가 그림의 풍미를 주도하고 있습니다.

'예수 탄생'의 이야기와 그 상황을 묘사한 다른 화가들의 여러 그림들과 비교해볼 때, 젠틀레스키의 이 완벽한 작품에서 특히 숭고하고 세련된 그만의 특징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인간내면의 성스러운 아름다움과 정결한 분위기가 돋보입니다. 색채나 질감에서도 거칠거나 투박하지 않으며, 사실주의가 지닌 근대성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화폭 위로 불러낸 온기가 전해져서 보고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 따듯하고 숙연해지는 그림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