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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난한 휴머니즘> 겉그림
ⓒ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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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턱 밑에 놓인 가시 같은 존재로 평가받는 그 유명한 쿠바라면 모를까, 쿠바 바로 옆에 자리한 섬나라 아이티 공화국은 그 이름부터 낯섭니다.

그리고 아이티 공화국이 자리 잡은 섬 한 쪽은 미 프로야구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도미니카 공화국이 나누어 차지하고 있다는 점까지 알고 나면, 아이티를 잘 몰랐다는 사실에 괜히 당황하며 아이티가 어떤 나라인지를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이티, 너 누구니?’

아이티에 관한 이야기를 주섬주섬 주워 담으며 펼쳐 본 <가난한 휴머니즘>은 종이 한 장 정도 차지하는 지리 정보를 들려주는 책이 아니라 한없이 듣고 또 들어야 조금 알 것 같은 아이티 사람들 삶을 들려주는 책입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는 가톨릭 신부 출신으로 강력한 대중적 지지를 받으며 아이티 역사상 최초로 민주적 선거로 대통령에 당선된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Jean-Bertrand Aristide)입니다.

그 삶에 고스란히 아이티 근대사를 담아 온 아리스티드는 아이티 이야기를 들려주는 데 그치지 않고 아이티를 휩쓸고 지나간 세계화 물결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아이티 소시민의 삶을 고스란히 함께 걸어오며 전국민의 사랑을 받아 온 아리스티드 전 대통령이 9개 편지 형태로 쓴 <가난한 휴머니즘>은 서서히 큰 울림으로 변했습니다. 담담한 목소리로 시작하여 가슴을 둥둥 울려대는 <가난한 휴머니즘>을 잠시 들어보시겠습니까?

고단한 20세기를 살아 온 아이티를 사랑한 아리스티드

아이티 공화국은 19세기 초반인 1804년에 프랑스에서 독립하여 탄생한 세계 최초 흑인 공화국입니다. 19세기 초에 이미 독립 국가를 이룩했을 뿐 아니라 세계 최초 흑인 공화국을 이룩한 역사는 내심 자랑할 만한 뜻 깊은 역사죠.

그러나 20세기 초반인 1915년에 미국 보호령이 되면서 아이티는 뜻 깊은 역사적 발자취를 다시 땅에 묻는 쓰라린 상처를 입었고 1957년부터 1986년 사이에는 뒤발리에 부자가 자행한 30년 독재 정권 아래 숨죽여 지내야만 했습니다. 어느 나라 못지않게 고단한 20세기를 살아 온 아이티는 1990년에 이르러서야 아이티 역사상 최초로 민주적 절차에 따라 뽑은 대통령을 만나게 되었으니 그가 바로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입니다.

아이티 역사도 상처가 많았지만, 사실 아리스티드 본인도 많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1990년에 이어 2000년에도 대통령에 당선되었던 아리스티드는 두 번 모두 당선 후 얼마 되지 않아 쿠데타로 어쩔 수 없이 물러나고 외국으로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었습니다. 67퍼센트에 달하는 강력한 지지를 받으며 첫 민주적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아리스티드가 말이죠.

이 정도 사실을 알고 나면 아리스티드가 내놓은 책 한 권에 담긴 이야기가 결코 140여 장이라는 분량에 매이지 않는 크고 넓고 깊은 이야기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이티 역사상 처음으로 민주적 절차에 뽑힌 대통령이라는 사실이 아니더라도, 아리스티드는 85퍼센트 이상 흑인으로 구성되어 있고 국민 대다수(75%)가 글을 모르는 아이티를 걱정하며 신부 시절부터 뒤발리에 독재 정권에 쓴 소리를 아끼지 않은 ‘민중 지도자’요 가톨릭 신부로 이미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런 그를 많은 아이티인들이 사랑했고 그에게 많은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고 하는데, 이미 말했다시피 아이티 국민 대다수가 글을 모릅니다. 아리스티드는 국민 대부분이 글을 모른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편지 한 장 한 장에 정성어린 여러 사람 노력이 가득 들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분명 이 책은 몇 줄 편지에 다 담지 못했을 아이티인들 마음을 좀 더 다듬어 세상 사람들에게 들려주고픈 신부 출신 전(前) 대통령 아리스티드 마음입니다.

아이티에 관한 호기심을 가득 안고 펼쳐든 첫 편지는 의외로 아이티가 아닌 세계 전체에 관련된 이야기였습니다. “이제 우리 행성은 꼬박 13억의 인구가 하루 1달러에도 못 미치는 돈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세기에 들어서고 있”다는 말로 첫 편지를 시작한 아리스티드는 아이티가 겪어 온 20세기 ‘상처’가 결코 아이티 문제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어했습니다.

아리스티드는 또한 1960년대에는 세계 부유층 20퍼센트가 70퍼센트의 부를 차지했는데 지금은 8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고 그 반대로 가난한 20퍼센트가 전체 부 2퍼센트 정도를 나누어 가질 뿐이라는 사실을 통해 우리가 사는 지구촌 사회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그리고 아이티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넌지시 그리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편지라는 이름을 붙여 내놓았으나 결코 가볍게 읽고 말 얇은 책이 아닙니다.

아리스티드는 오랜 독재 정권을 넘어서 1990년에서야 민주 정부를 이룬 아이티가 1980년대 후반에 이미 세계화 물결을 맞이하면서 겪은 상처를 아이티 토종 돼지 이야기를 통해 들려줍니다. 1980년대 아이티 토종 돼지가 전멸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 사건은 세계화 물결을 타고 아이티에 들어 온 국제기구가 제시한 경제적 조치에 따라 벌어진 일이었는데, 그 이유는 아이티 토종 돼지가 병들어 그 질병이 ‘북쪽의 다른 나라’로 퍼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질병 퇴치를 이유로 모두 도살된 크리올 돼지(아이티 토종 돼지) 대신 미국 아이오와에서 크리올 돼지보다 더 좋다는 새 돼지들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식구로 맞이한 이 새 돼지들이 아이티 농민들에게는 너무 벅찬 상대였습니다. 당시 아이티 1인당 국민소득이 130달러인데 90달러나 되는 수입 사료를 먹여야 하고 사람도 잘 못 먹던 맑은 식수를 계속 주어야 했으니 이 새 돼지들은 그야말로 애물단지같은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아이티 농민들은 그 돼지들에게 '네 발 달린 왕자'라는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

농촌을 비롯하여 아이티 전체 경제가 급격히 쇠퇴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 사건을 비롯하여 아리스티드는 그만큼 세계화에 관하여 할 말이 많았습니다. 글도 모르는 데다 사는데 바쁜 많은 아이티 사람들을 대신하여 말하고 싶고 들려주고 싶었을 마음을 점점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보니 그 마음을 담은 편지가 무려 9개나 됩니다. 처음에는 ‘9개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지’ 싶었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아이티 사람들 마음을 모두 담으려 노력한 편지들임을 느끼기 시작했고 후다닥 읽고 내칠 책이 아님을 알 수 있었습니다.

사람다운 삶을 향한 끝 모를 여정을 알리는 초대장

2004년에 독립 200주년을 맞이한 아이티는 여전히 문화적, 경제적, 정치적 독립을 성취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대통령 재임 시절, 아이티 경제를 좀 먹는 존재였던 군부 세력을 몰아내고 아이티 경제를 회복하려고 노력하며 신부 시절처럼 소시민 삶을 늘 가까이서 돌본 그는 높은 문맹률을 낮추기 위한 노력을 꾸준히 펼치고 있습니다.

가난한 아이티 삶에서 가장 큰 상처를 받았을 아이들 목소리를 담아 내보내는 ‘라디오 티무앙’은 아리스티드가 하는 일이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를 잘 말해줍니다. 험난한 20세기를 살아 온 아이티 땅에 희망의 씨앗을 심었던 아리스티드는 이 책 마지막 편지인 아홉 번째 편지('당신에게 보내는 아이티의 특별한 초대장)에서 우리를 향해 마지막으로 이렇게 외칩니다.

“이 책을 읽는 당신께 우리가 바라는 점이 있다면 바로 지금도 우리는 아이티의 새로운 도전을 위해 땀 흘려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주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념 덕에 도전이 이루어지는 그날이 올 것이라 확신합니다. 이 신념, 이 확신이야말로 우리가 전 세계에 드릴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수출품이 아닐까 합니다. 이 신념을 나눠 가지도록 당신께도 초대장을 보냅니다. 저와 당신은 함께, 같은 손의 손가락처럼 이 새로운 세기에 더 인간다운 세계를 만들라는 요청을 받고 있습니다. 엄지손가락과 새끼손가락이 좀 더 가까워지고, 그래서 주먹을 쥐었을 때 더 강력해지는 그런 손처럼 말입니다.” (본문 143쪽)

책을 다 읽고 난 후 저는 제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엄지 손가락과 새끼 손가락을 번갈아 보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습니다. 왜냐하면, 사실 아리스티드는 엄지손가락을 상위 20퍼센트 부자에 비유하고 새끼손가락은 하위 20퍼센트에 비유했기 때문입니다. 눈에서 마음으로 그리고 손 끝으로 전해진 아리스티드와 아이티 이야기는 지금 제 손에서 꿈틀거립니다.

85퍼센트에 달하는 문맹률을 뒤집어 85퍼센트에 달하는 아이티 사람이 글을 읽게 될 날을 이미 봤다고(!) 외마디 터뜨리는 아리스티드. 제 손 위에서 여전히 꿈틀대며 신음하고 또 노래하는 <가난한 휴머니즘>을 이제 여러분께 넘깁니다. 못다 한 <가난한 휴머니즘> 노래를 직접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덧붙이는 글 | <가난한 휴머니즘: 존엄한 가난에 부치는 아홉 통의 편지>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 지음. 이두부 옮김. 서울: 이후, 2007.
(원제) Eyes of the Heart: Seeking a Path the Poor in the Age of Globalization



가난한 휴머니즘 - 존엄한 가난에 부치는 아홉 통의 편지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 지음, 이두부 옮김, 이후(2007)


태그:#가난한 휴머니즘,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 #아이티,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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