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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살이 하얗게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진도대교 밑을 흐르고 있다.
▲ 진도대교 물살이 하얗게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진도대교 밑을 흐르고 있다.
ⓒ 이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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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대교가 보이는 해남끝 마을이 우수영이다. 우수영이라 많이 듣던 이름이다. 해남읍에서 서남쪽으로 30km 지점에 위치해 있는 이곳의 정식 지명은 문내면. 하지만 우수영은 우리 선인(조선초 세종대왕)들이 외적침입에 대비해 설치한 해군기지 중 하나다. 부산에는 경상 좌수영이 있고 충무에는 경상우수영이 있으며, 여수에는 전라좌수영 해남에는 전라우수영이 있다. 그리고 이곳 우수영이 유명해진 것은 울돌목에서 벌어진 명량해전 때문이다.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충무사...
▲ 충무사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충무사...
ⓒ 이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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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영은 해남과 진도를 연결하는 진도대교 북단을 이르며, 임진왜란 당시 3대 수군 대첩지 중의 하나인 명량대첩(1597. 9. 16)의 격전지였다. 이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12척의 배로 133척의 배를 격파해, 세계 해전 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1:11의 대승첩을 기록했다.

명량해협은 해남과 진도를 잇는 수로로 가장 좁은 부분의 폭이 325m, 수심 25m 미만으로 격류가 부딪쳐 우뢰와 같은 소리를 내므로 명량 또는 울돌목이라고 불렀다. 임진왜란 최후의 교두보였던 울돌목을 성역화하여 이충무공과 휘하 장병 및 지역민들의 구국충절을 길이 보전, 관리하기 위하여 우수영을 국민관광지로 지정, 명량대첩 기념공원으로 조성하였다.
명량해전을 기념하는 명량대첩탑
▲ 명량대첩탑 명량해전을 기념하는 명량대첩탑
ⓒ 이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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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로 길게 솟아있는 명량대첩탑을 보고 전망대로 올라갔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명량해협의 경관과 진도대교의 위용이 대단하다. 꿈틀거리며 흘러가는 울돌목을 바라보고 있자니, 400여년 전 전투 상황이 눈앞에 그려진다. 그리고 주차장 오른쪽에 있던 강강수월래 전시관과 공원에 들어서면서 본 철쇄가 떠오른다. 우수영, 울돌목, 강강수월래, 철쇄. 이만하면 이순신 장군의 전략에 소품이 큰역할을 해낸 셈.

우수영관광지 입구에 있는 강강수월래 전수관과 진도대교 건너에 있는 강강수월래 터.
▲ 강강수월래 터와 전수관 우수영관광지 입구에 있는 강강수월래 전수관과 진도대교 건너에 있는 강강수월래 터.
ⓒ 이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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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 사용하던 철쇄.
▲ 철쇄 전쟁에 사용하던 철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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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133척이나 되는 대함대를 13척으로 대항한 뱃장이라니! 이순신의 뱃장은 이런 소품을 잘 살려낸 전략과 '죽으려는 자는 반드시 살고 살려하는 자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라는 무지막지한 엄포가 통한 결과였다. 역시 약한 자가 강한 자를 이기려면 뱃장이 있어야 하고 그에 따른 전략도 잘 짜야 한다.

지금도 진도대교를 흐르는 도도한 물살은 그때를 입증해 보이려는 듯 서로에게 부대끼며 한바탕 용틀임을 해댄다. 당시 울돌목에 설치했을 것으로 보이는 수중 철쇄는 폭이 가장 좁은 곳(지금의 진도대교가 있는 자리)에 걸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양쪽에 막개를 박아놓은 다음 쇠줄은 물 속에 잠기게 하고 적을 기다렸으리라.

우수영 관광지에서 바라본 바다.
▲ 울돌목 바다 우수영 관광지에서 바라본 바다.
ⓒ 이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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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실을 모르는 왜군은 어란진에서 출발해 밀물을 타고 빠른 속도로 들어선다. 그리고 들어서자마자 물속에 잠겨 있던 철쇄에 걸려 차곡차곡 쌓이며 서로 부딪쳐 부서진다. 곧 밀물이 끝나고 물길이 멈추자, 일본 수군은 좁은 수로에 갇혀 오도가도 못하고 혼란에 빠지고, 이때를 기다렸던 이순신 장군의 함선들은 전진하며 각종 화포를 퍼붓는다. 다시 썰물이 되는 순간, 정지했던 물길이 거꾸로 바뀌어 왜수군 쪽으로 흐르고, 유리하던 조류마져 불리하게 바뀌자 조선 수군이 떠내려가는 일본 수군을 섬멸한다. 정말 뛰어난 전략이 이뤄낸 쾌거였다.

진도대교를 건너 좌회전하자 강강수월래 터가 나온다. 지금은 밭이지만 임진왜란 당시 왜군과 대치하고 있을 때 모닥불을 피워놓고 부녀자들이 수십 명씩 떼를 지어 돌면서 '강강수월래' 노래를 불렀던 곳.

임무는 두가지. 하나는 적의 군대에게 해안을 경비하는 우리 군세가 많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고, 또 하나는 왜군이 우리 해안에 상륙하는 것을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정말 울돌목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이 좋은 곳이다. 그리고 그 놀이는 그 후에도 계속 이어졌고, 전라도 특유의 여성 민속놀이가 되었으며 지금은 전라도 지방에 전하는 민속놀이로 중요무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었다.

벽파진가기 전의 진도 갯벌...
▲ 진도 갯벌 벽파진가기 전의 진도 갯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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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모퉁이를 돌자 갯벌이 나온다. 어머니 젖가슴처럼 부드러운 갯벌은 남서해안 어디에나 있다. 좁은 물길을 가장자리로 거느리고 묵묵히 바닷물을 받아들이며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산기슭은 공원이다. 길을 따라 산으로 올라갔으나 아직 다 조성이 되지 않아 길이 끊어져 있었다. 길은 다시 벽파진항으로 이어졌다.

쓸쓸한 벽파항 모습...
▲ 벽파항 쓸쓸한 벽파항 모습...
ⓒ 이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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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구 뒤편 암산에 오르면 이충무공전첩비가 서 있다. 1956년에 세워진 이 비에는 이은상 선생이 지은 비문이 새겨져 있다.

벽파진 푸른 바다여 너는 영광스런 역사를 가졌도다.
민족의 성웅 충무공이 가장 외롭고 어려운 고비에 빛나고
우뚝한 공을 세우신 곳이 여기이더니라.


이 싯귀는 벽파진의 이충무공을 한 마디로 요약하고 있다. 벽파진은 명량대첩에 임하기 직전 16일 동안 이순신이 머물면서 전열을 가다듬으며 작전을 숙고했던 역사의 현장이다. 비석의 높이는 11m이며 커다란 돌거북 등 위에 얹혀 있으면서 묵묵히 먼 바다를 굽어보고 있다.

먼바다를 굽어보고 있는 충무공전적비...
▲ 충무공전적비 먼바다를 굽어보고 있는 충무공전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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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무공 전적비는 멀리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데 벽파항은 의외로 조용하다. 그가 아무리 뱃장이 있다한들 힘든 마음이 왜 없었을까? 왼쪽은 툭 터진 바다요, 오른쪽은 멀리 산밑에 들어선 오밀조밀한 농가. 400년 전 이순신은 바다를 보고 농가를 보고 나라와 국민을 생각하면서 자신에게 지어진 무거운 짐을 어찌할 줄 몰라 눈물짓지는 않았을까? 벽파진 항이 의외로 조용하니 힘들었을 충무공의 심정이 저절로 내 마음으로 스며들었다.


태그:#우수영, #울돌목, #벽파진, #이충무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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