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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상황에서 꼭 그렇게 해야 했어?”
“그건 그래, 그런데 네가 너무 세게 이야기하니까 나도 어쩔 수 없었어.”
“그럼, 내가 세게 이야기해서 그렇다는 거야?”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고. 네가 지적한 게 맞기는 맞아. 하지만 네가 세게 나오니까 참기 힘들었다고.”
“그럼 다 나 때문이란 거야?”

 

부부 싸움을 할 때면 흔히 벌어지는 대화 방식이다. 우리 부부뿐 아니라 많은 부부들에게서 벌어지는 다툼 방식일 것이다. 아내가 화를 내면서 제시하는 이유들은 솔직히 어느 정도 인정한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다는 점도 납득시키고 싶다. 그래서 사용하는 단어가 ‘그런데’, ‘하지만’이다.

 

문제는 ‘그런데’와 ‘하지만’을 사용하는 순간 앞부분에서 실수라고 인정한 내용이 상대방에게는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게 느껴진다는 사실이다.

 

아내가 원하는 답변은 ‘그건 그래’ 속에 분명히 있다. 나도 솔직히 사실을 인정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받아들이는 아내의 처지에서는 ‘그런데’와 ‘하지만’ 때문에 앞부분에 내가 했던 말이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와 ‘하지만’은 묘하게도 자신이 인정했던 말을 부정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건 인정해. 하지만….”
“어, 내 잘못이야. 그런데….”
“화가 난 건 알겠어. 그렇지만….”

 

듣는 처지에서 위와 같은 말은 상대방이 자신의 실수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들린다. 분명히 ‘그런데’, ‘하지만’, ‘그렇지만’은 앞부분 내용을 전면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대화 상대방은 전면 부정으로 느낀다. 말이 주는 묘한 어감 때문이다. 우리 속담에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있는데 여기에 딱 맞는 속담이다.

 

아이들 토론에서도 이런 어법은 너무나 흔하게 사용된다. 다음은 아이들이 <체리나무 할아버지>(주니어 김영사)를 읽고 토론한 내용 중 일부다. 토론 주제는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외할아버지가 시골에서 살아야 하는가? 가족과 함께 도시에서 살아야 하는가?’다.

원주 : 외할아버지는 몸도 안 좋으시므로 가족과 함께 도시에 사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정현 : 물론 외할아버지가 몸이 안 좋은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고목나무는 옮겨 심으면 죽는다고 외할아버지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외할아버지가 익숙한 곳에 사시는 것이 좋습니다.


유진 : 외할아버지가 익숙한 게 좋기는 하겠지요. 그런데 만약 몸이 쇠약해지기라도 하면 온 가족이 걱정하지 않겠습니까?


다미 : 걱정은 하겠지요. 그런데 도시에 사는 게 더 몸이 안 좋아질까요? 시골에 사는 게 더 안 좋아질까요? 도시는 매연도 많아서 훨씬 건강에 나쁠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토론에서 아이들은 상대방 의견을 일단 인정하는 자세를 보였다. 원주 의견을 받아서 발표한 정현이는 원주 의견을 인정한 후에 자기 의견을 이야기했고, 유진이는 정현이 의견을 인정한 후에 자기 의견을 제시했다. 다미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하지만’, ‘그런데’를 사용하고 나서 자기 의견을 이야기하고 보니 앞부분에 상대방 의견을 인정한 것이 제대로 살아나지 못하고 있다.

 

“네 말이 맞기는 맞아. 그러데…”

 

분명히 상대방 말을 인정했는데도 접속사 하나 때문에 상대방 의견을 전혀 인정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그런데, 하지만, 그렇지만’이란 접속사가 미치는 영향이다. 토론에서 중요한 건 상대방 의견을 존중하는 자세다. 위 토론에서 모든 토론자는 일단 상대방 의견을 존중했다. 하지만 ‘그런데’와 ‘하지만’으로 인해 전혀 인정하지 않은 것처럼 돼 버렸다.

 

그렇다면 여기서 상대방 의견을 존중하는 느낌을 최대한 살리면서도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해답은 접속사 ‘그리고’에 있다.

 

‘그리고’에 담긴 의미

 

그런데 [부사] 화제를 앞의 내용과 관련시키면서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 나갈 때 쓰는 접속 부사. / 앞의 내용과 상반된 내용을 이끌 때 쓰는 접속 부사로 ‘그러한데’가 줄어든 말.

 

그리고 [부사] 단어, 구, 절, 문장 따위를 병렬적으로 연결할 때 쓰는 접속 부사.

 

‘그런데’는 앞 내용과 다른 방향, 상반되는 내용을 이끌 때 쓴다. 다른 방향이란 의미가 있기는 하지만 ‘상반’되는 느낌이 강하다. 반면에 ‘그리고’는 앞부분과 내용이 ‘병렬적’으로 연결되는 경우에 쓴다.


‘그리고’는 의견이 양립한다. 내 의견도 맞고, 네 의견도 맞을 수 있다는 열린 자세다. 내 의견이 맞다고 생각하지만, 상대방 의견도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다고 인정해주는 열린 마음이 ‘그리고’에 담겨 있다.

 

“그 상황에서 꼭 그렇게 해야 했어?”
“그건 그래, 그런데 네가 너무 세게 이야기하니까 나도 어쩔 수 없었어.”

 

“그 상황에서 꼭 그렇게 해야 했어?”
“그건 그래, 그리고 네가 너무 세게 이야기하니까 나도 힘들었어.”

 

위의 두 대화를 비교해보면 ‘그런데’와 ‘그리고’가 주는 느낌이 얼마나 다른지 확연히 알 수 있다. 접속사에 따라 사용하는 단어도 자연스럽게 달라진다. ‘그런데’라는 접속사 뒤에는 ‘어쩔 수 없었어’라는 변명하는 말투가 따라오게 된다. 하지만 ‘그리고’라는 접속사 뒤에는 ‘힘들었어’라고 하며 자신을 이해해달라는 부탁의 말이 따라오게 된다. 접속사가 달라짐으로 인해 대화 분위기가 완전히 바뀐다.

 

실제로 부부 싸움을 할 때 ‘그런데’ 대신 ‘그리고’를 사용하면 싸움의 강도가 훨씬 약해지거나, 서로의 처지를 인정하고 이해하는 분위기로 바뀌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토론도 마찬가지다. 접속사를 ‘하지만’에서 ‘그리고’로 바꾸기만 해도 토론 분위기가 완전히 바뀐다.

 

원주 : 외할아버지는 몸도 안 좋으시므로 가족과 함께 도시에 사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정현 : 물론 외할아버지가 몸이 안 좋은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고목나무는 옮겨 심으면 죽는다고 외할아버지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외할아버지가 익숙한 곳에 사시는 것이 좋습니다.

 

원주 : 외할아버지는 몸도 안 좋으시므로 가족과 함께 도시에 사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정현 : 물론 외할아버지가 몸이 안 좋은 건 사실입니다. 그리고 고목나무는 옮겨 심으면 죽는다고 외할아버지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외할아버지가 익숙한 곳에 사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를 사용한 토론이 '그런데'를 사용한 토론보다 훨씬 상호 존중하는 느낌이 강하다. 토론 교육을 통해 아이들이 가장 배워야 할 것이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자세다. ‘그리고’라는 접속사는 이러한 토론 교육의 목적을 가장 충실하게 이루어지도록 해준다.

 

첨삭할 때도 ‘그리고’를 사용해야

 

“참 잘했다. 그런데….”
“이건 참 멋진 걸. 그런데….”
“이 부분은 구체적으로 잘 썼다. 그런데….”

 

첨삭 할 때 가장 많이 사용되는 접속사는 ‘그런데’다. 앞부분은 칭찬하는 말이 오지만, 뒷부분은 지적하는 말이 온다. 일반 대화나 토론과 마찬가지로 글쓰기 지도에서도 ‘그런데’는 똑같은 효과를 불러 온다. 긍정을 부정하는 효과다. ‘그런데’는 이런 의미다.

 

"넌 이건 잘했어. 그런데 이건 못했어."

 

비슷한 분량으로 칭찬하고 지적했더라도 ‘그런데’를 사용하는 순간 뒷부분이 훨씬 강조된다. 칭찬도 칭찬으로만 처리되지 않고 지적을 위한 하나의 수단처럼 변해 버린다. 반면에 ‘그리고’는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넌 이걸 잘했어. 그리고 이건 조금 부족해."

 

‘그리고’를 사용하면 지적과 칭찬이 양립하게 된다. ‘그런데’를 사용하면 칭찬을 축소시키면서 지적을 하는 느낌을 주지만, ‘그리고’를 사용하면 칭찬을 그대로 인정한 가운데 부족한 점을 깨닫게 하는 느낌을 준다.


그래서 글쓰기 지도를 하는 사람은 아이들 글을 지적해주고 싶을 때,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어 주고 싶을 때 ‘그런데’가 아니라 ‘그리고’를 사용해야 한다. 이는 사소한 단어 하나의 차이가 아니다. ‘그리고’에는 글을 쓴 아이의 장점과 의견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하겠다는 따뜻한 마음, 열린 마음이 담겨 있다.


태그:#글쓰기, #칭찬, #첨삭, #논술, #박기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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