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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아침햇살을 그득하게 담았을지도 모르겠다.
▲ 마지막 잎새 마지막 아침햇살을 그득하게 담았을지도 모르겠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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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잎새를 바라보면 쓸쓸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장엄하기까지 하다. 자기의 삶을 마감하면서도 여전히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에 담은 햇살이 그에게는 나뭇가지에서 맞이하는 마지막 햇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에게 인간이 구분짓는 처음과 마지막이라는 단어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늘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처음처럼 살아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마지막처럼 살아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자연의 처음과 마지막은 아름답고 장엄하다. 해돋이와 해넘이가 그렇고, 새순과 낙엽이 그렇다. 그들의 닮은 점은 아름답다는 것, 그리고 그 아름다운 순간이 지극히 짧다는 것이다. 단지 짧아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건만 그들은 아름다운 순간이라고 오래 머물지 않는다. 그래서 자연이다.

겨울을 보낼 꽃눈 속에 봄이 들어있다.
▲ 꽃눈 겨울을 보낼 꽃눈 속에 봄이 들어있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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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숲은 텅 비어있었다. 숲의 속내를 가장 잘 들여다 볼 수 있는 계절, 나무의 생김생김을 가장 적나라하게 볼 수 있는 계절이 겨울이다. 나뭇잎을 다 놓아버린 앙상한 나뭇가지에 꽃눈이 솜털로 무장을 하고 새봄을 준비하고 있다. 그야말로 '아니 벌써!'다.

그렇다. 긴 겨울을 보내고나서야 새봄에 새순을 낼 수 있는 것이다. 고난 속에 희망이 들어있는 것처럼, 겨울 속에 봄이 들어있는 것이다. 꽃눈을 보면서 나는 "와! 겨울 속에 봄있다!" 소리를 친다.

당연한 것을 왜 이제서야 보고, 이제서야 마음에 담을 수 있는 것일까? 뭔가에 마음을 빼앗기고 눈을 빼앗긴 탓이다. 마음에 있는 것을 눈으로 보고, 눈으로 본 것이 마음에 담기기 마련이다. 그러니 늘 좋은 것을 생각하고, 좋은 것을 볼 일이다. 그렇게 마음 먹고 살아도 세상사에 시달리다보면 물들기 마련인데 작정하면 보이는 것과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이 욕심뿐이라면 무엇을 볼 수 있으랴!

영락없이 봄이 색깔이다.
▲ 고치 영락없이 봄이 색깔이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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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기운이 한창인 지금 봄의 빛깔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 있다. 산누에나방류의 고치는 흡사 새록새록 갓 올라온 새순을 닮았다. 그도 그럴 것이 겨울이 오기 전에 만든 새 집이요, 긴 겨울을 보내야 할 집이니 생명의 색깔을 닮은 것이리라.

참으로 신비하다. 저 고치 안에서 생명이 숨쉬려면 공기가 통해야 할 것인데, 찬공기가 드나드는 추운 겨울에 찬바람을 어떻게 견디어 내는 것인지 참으로 신비하고 신비하다.

자연도 월동준비를 한다. 그러나 그들의 월동준비는 아주 간소하다. 간소하다 못해 '겨울을 어떻게 날까?' 걱정이 될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넉넉하게 겨울을 나는 자연을 볼 때마다 희망을 보는 것이다.

말라비틀어진 이파리에도 아침햇살은 머문다.
▲ 청가시덩굴 말라비틀어진 이파리에도 아침햇살은 머문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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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 비틀어진 나뭇잎, 겹쳐진 나뭇잎에도 아침햇살이 가득 앉았다. 잎맥이 선명하다. 그 잎맥은 길이 되어 저 깊은 뿌리에서부터 덩굴의 가장 끝투머리까지 생명을 이어주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어느 길 하나 허툰 길 없이 소통되던 계절이 끝나자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제 몸 속에 물을 빼내기 위해 길을 닫았을 것이다.

그 목마름으로 인해 길은 더욱 선명해 진 것이다. 저 말라 비틀어진 나뭇잎에서, 그 나뭇잎에 남아있는 잎맥을 보면서 봄이 오는 길목을 미리 본다. 그래서 겨울 속에 봄이 있다고 소리칠 수 있는 것이다.

붉은 열매 속에 들어있는 생명, 겨울을 온전히 나고 봄에 새싹을 낼 것이다.
▲ 청미래덩굴 붉은 열매 속에 들어있는 생명, 겨울을 온전히 나고 봄에 새싹을 낼 것이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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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잎사귀들과 단풍들이 많을 때에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이 뒤로가고 나니 붉은 열매가 눈에 확 들어온다. 자기를 보아주지 않는다고 토라지지 않고 자기의 모습을 제대로 피워낸 청미래덩굴의 열매가 고맙다.

저 열매는 배고픈 날짐승이나 들짐승이 먹을 것이고, 그들은 그 대가로 다른 곳에 씨앗을 뿌려줄 것이다. 혹 남는다면 봄햇살에 삭아지며 그 곳에서 씨앗을 싹틔울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돕지만 서로 인식하지 못한다.

배고픈 날짐승이나 들짐승들에게 열매는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가? 그러나 열매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먹힘으로써 또 다른 곳으로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니 날짐승이나 들짐승들이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가? 이렇게 자연은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을 베풀지만 그것을 알지 못한다.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이 불가능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저 열매 속에도 봄이 들어있다. 겨울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봄이 간절히 기다려지는 것, 그것은 겨울추위가 가난한 이들에게는 견디기 힘든 계절이기 때문이다.


태그:#겨울,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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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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