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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관광은 대개 창룡문에서 시작한다. 그것은 창룡문 안과 밖에 관광안내소와 주차장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연무대 관광안내소에서 표를 사고 안내 팸플릿을 하나씩 받는다. 팸플릿 앞면에는 화성 지도가 그래픽으로 그려져 있고 건축물에 대한 설명이 있다. 그리고 뒷면에는 화성 안에 있는 행궁과 화령전의 건물 배치도가 그려져 있고 이들 건축물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군사들의 훈련본부인 연무대
 군사들의 훈련본부인 연무대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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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도를 보면서 동장대(東將臺)인 연무대를 지나 동암문으로 올라 선다. 장대란 장군이 군사를 지휘하던 일종의 사령부이다. 그리고 연무대란 무술을 연마하는 곳이란 뜻이다. 화성은 서고동저형의 지형에 인위적으로 만든 평산성이다. 팔달산이 있는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아 서쪽에 있는 서장대는 화성 전체의 지휘본부 역할을 했으며, 동장대는 군사들의 무예를 연마시키는 훈련본부의 역할을 했다.

동암문은 작고 비밀스런 문으로 평상시에는 사람이 드나들었다. 그리고 비상시에는 군수물자를 운반하는 비밀통로로 이용되었다. 성 위에서는 계단을 내려가 드나들 수 있도록 만들어졌으며, 평상시에는 이 문을 통해 성 안과 밖을 자연스럽게 드나들 수 있었다. 동암문을 지나 서쪽으로 가니 동북포루가 나온다. 포루는 성곽을 돌출시켜 만든 치성 위에 세워진 일종의 초소이다. 포루 옆에는 장안위좌부(長安衛左部)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장안문 좌측에서 성을 호위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탑비에 진각국사라는 글자가 분명하다.
 탑비에 진각국사라는 글자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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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포루와 북암문 사이 성 안쪽 길가에는 창성사 진각국사 대각원조탑비가 세워져 있다. 탑비에는 고려말 승려 진각국사 천희(眞覺國師 千熙: 1307-1385)가 13세에 출가하여 79세에 입적하기까지의 행적이 쓰여 있다. 이 탑비는 우왕 12년(1386) 광교산 창성사 경내에 세워졌던 것으로, 목은 이색이 짓고 권주가 글씨를 썼으며 승려 혜잠이 글씨를 새겼다. 여기서 대각원조(大覺圓照)란 크게 깨달아 원만하게 비친다는 뜻이다.

화홍문 쪽에서 바라 본 방화수류정과 포루
 화홍문 쪽에서 바라 본 방화수류정과 포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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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포루에서 북암문을 지나면 화성에서 아름답기로 유명한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이 나온다. 방화수류정의 공식명칭은 동북각루이다. 각루(角樓)란 중간지휘관들이 성 밖을 관측하면서 업무를 보는 곳이다. 이곳 방화수류정은 성 밖에 연못을 파서 일종의 정원을 만들고 그 위에 정자가 있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곳 주변에는 봄에서 가을까지 꽃이 피고 버드나무 가지가 늘어져 있다. 꽃을 찾고 버드나무를 따르는 정자라는 이름이 그래서 나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방화수류라는 이름은 각루에 상주하는 지휘관들의 휴식 그리고 정서적인 안정과 관련이 깊다.

수원팔경 중 하나인 화홍문
 수원팔경 중 하나인 화홍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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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화수류정 옆에는 수원천 위로 화홍문(華虹門)이 자리하고 있다. 화성의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하천 위에 세워져 자연친화적인 성문이다. 이곳 화홍문 앞에서 보는 물보라가 일품이어서 수원팔경 중 하나가 되었으며, 이를 화홍관창(華虹觀漲)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하천 바닥에 돌을 깔아 계단을 만들었기 때문에 물이 떨어지면서 포말을 일으키는 모습이 참 좋다.

화성 성곽을 만행하는 스님들
 화성 성곽을 만행하는 스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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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홍문을 지나면 성벽은 북쪽으로 이어져 북동포루와 북동적대가 있다. 이곳에서 우리는 바랑을 등에 멘 두 명의 스님을 만났다. 만행을 위해 이곳까지 온 스님들의 행보가 여유로워 보인다. 흰색과 회색으로 이루어진 무채색의 옷, 밀짚과 천으로 이루어진 모자, 발이 편하기 위해 신은 운동화가 정말 잘 어울린다. 세속(世俗)의 것을 사용하고 있지만 이속(離俗)의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북동적대를 지나 화성의 북쪽 한 가운데에 이르면 화성의 정문 역할을 한 장안문이 나온다. 보통 평지성의 정문은 남문이기 때문에 원래는 팔달문(보물 제 402호)이 정문이다. 그러나 당시 화성의 북쪽에 한양이 있기 때문에 화성을 방문하는 정조대왕이 가장 먼저 당도한 곳이 장안문이었고, 그 때문에 남문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졌다. 장안문에서 남쪽으로 팔달문까지는 큰 길이 똑바로 나 있으며, 화성의 중심 도로 역할을 했다.

화성의 북문인 장안문의 바깥 모습
 화성의 북문인 장안문의 바깥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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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의 북문인 장안문의 안쪽 모습
 화성의 북문인 장안문의 안쪽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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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중기를 발명하여 화성 축조에 큰 역할을 했고, 정조시대 학문의 발달에 큰 기여를 했던 다산 정약용은 이곳 장안문을 지나면서 정조대왕과의 1년 전 추억을 떠올린다. 그러나 이 시에 나오는 장안문, 길, 다리 가의 수양버들은 200년의 간격을 두고 다산이 본 과거와 우
리가 보는 현재를 연결시켜 준다.

화성에 당도하여 지난봄에 임금의 행차를 모셨던 일을 회상하고 서글퍼서 짓다.
行次華城 恭憶春日陪扈之事悵然有作  (다산시문집 제2권)

장안문 문 밖에는 용깃발을 세워두고         長安門外建龍旂
호위병과 신하들이 비단옷을 다 입었지.     衛士從臣盡錦衣
다섯 군교 군사 통솔 북소리가 울리고        五校勒軍鼉鼓動
두 대열 길 정리라 생황소리 퍼졌지.          兩行淸道鳳笙飛
자궁께서 내리신 술 모든 신하 목 적시고    慈宮綠醞沾恩遍
임금 타신 붉은 교자 능침 뵙고 돌아갔지.  郡主紅轎拜寢歸
이곳을 지나간 게 엊그제 같은데               此地經過如昨日
다리 가의 수양버들 아직도 무성하네.        御橋楊柳尙依依


장안문에서 서쪽으로는 북서포루, 북포루, 서북공심돈이 있다. 공심돈이란 적의 동태를 살피는 일종의 망루이다. 벽돌로 2층의 돈대를 쌓고 그 위에 목조 기와로 집을 지은 형태이다. 화성에는 공심돈이 세 개 있는데 서북공심돈은 서북쪽에 위치해 그런 이름이 붙었다.

화성의 서문인 화서문
 화성의 서문인 화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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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북공심돈 옆에는 화서문(보물 제 403호)이 있다. 원래 화서문은 서쪽에 위치해야 하나 서쪽으로 팔달산이 있어 북서쪽에 자리를 잡고 있다. 지금까지 화성을 죽 관찰하면서 축성 당시의 모습을 찾기가 어려워 아쉬웠다. 화성이 정조 때 만들어진 것이 맞지만, 현재의 화성은 대부분 1975-79년 화성성역의궤를 토대로 복원하고 보수한 것이기 때문이다. 문화유산의 가치를 오리지널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화성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 그나마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 이곳 화서문과 남문인 팔달문이다.

화서문에는 문 밖으로 방어를 위한 옹성이 쳐져 있고, 그 안에 아치형의 출입 통로가 있다. 이곳을 지나 서남쪽으로 가면 팔달산 아래 화성행궁이 동향하고 있다. 화서문의 편액은 화성유수를 지냈고 당시 좌의정이던 채제공이 썼다고 한다. 화서문 주위 소나무 아래에는 이 건축물을 그리려는 화가들이 앉아 그림그리기에 열중이다.

화서문 앞에서 그림그리기에 열중인 화가들의 모습
 화서문 앞에서 그림그리기에 열중인 화가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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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화성, #창룡문, #방화수류정, #화홍문, #화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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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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