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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준은 영웅이 아니다. 그는 주가조작으로 수많은 주주들에게 피해를 줬고 회사자금을 횡령한 혐의를 받고 있는 범죄 혐의자이다.

 

주가조작은 증권거래법상 10년 이하 징역에 처할 수 있는 중대 범죄이고, 이득액이 50억원이 넘는 횡령·배임은 무기 또는 5년 이상 징역형이 적용되는 범죄이다. 그가 받고 있는 범죄혐의는 결코 가볍지 않다.

 

김경준의 웃음, 한국정치의 비극

 

그런 김경준씨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귀국했다. 대선을 불과 30여일 앞두고 이루어진 그의 귀국은 온 국민의 관심사가 되었다. "이번 대선은 김경준의 입에 달려있다"는 말까지 나온다.

 

이런 상황을 너무도 잘 알아서였을까. 귀국 직후 모습을 드러낸 김경준씨는 너무도 여유있는 표정이었다. 공항 입국장부터 간간이 웃음을 짓던 김씨는 검찰청사에 도착해서는 계속 웃음을 짓는 여유를 보였다.

 

수많은 취재진을 보고는 "와우"(Wow)라는 감탄사를 내뱉기도 했고, "한마디만 할까요"라며 말문을 열려다 제지를 당하기도 했다.

 

언론들은 김경준씨 웃음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분석하기에 분주한 모습이다. 자신감의 표현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자신의 입만 쳐다보고 있는 국내상황에 대한 비웃음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그러나 모두 추측일 뿐, 김경준씨의 속내를 들여다보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분명한 것은 지금의 이 광경이 한국정치의 총체적 비극을 상징하고 있다는 점이다. 17대 대선일을 불과 30여일 앞두고, 대선정국의 주인공은 후보들이 아니라 김경준씨로 바뀌었다.

 

그는 이제 누가 뭐라해도 이번 대선의 최대 변수이다. 김씨가 검찰에서 꺼내놓는 내용이 무엇이냐에 따라 이번 대선판도가 좌우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동안 목이 아프도록 강조해왔던 정책대결·노선경쟁 같은 것은 더 이상 거론조차 되지않는 선거가 되어버렸다. 국민의 최대관심사인 성장·교육·주거·비정규직·대북정책 같은 것에 대한 토론도 사실상 중단된 상태이다.

 

정당정치를 구성하는 핵심적 내용들은 다 관심권 밖으로 밀려나는 '묻지 마 선거'가 되고 있다. 오직 '김경준 변수'로 모든 것이 모아지고 있다.

 

김경준에 달린 대선승부, 정치권 자괴감 느껴야

 

물론 김경준씨의 귀국에 대해서는 정파간의 이해관계가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다. 그러나 정파적 이해를 넘어, 범죄혐의자 김경준씨의 입이 이번 대선의 승부를 좌우하게 된 현실 앞에서 정치권은 너나 할 것 없이 자괴감을 느껴야 마땅하다.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는 자신의 결백함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김경준 같은 사람을  비행기 가득 실어온다고 해도 자신있다”고 했고, "누구도 우리를 흔들지 못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런데도 김경준씨의 귀국으로 이명박 후보가 흔들리게 될지 모른다는 관측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언론들은 이 후보의 지지율 하락을 예상하기도 하고, 심지어 일부에서는 낙마설까지 계속 거론하는 상황이다.

 

이명박 후보의 '결백' 호소가 충분한 신뢰를 얻지못한 결과이다. 자업자득의 결과이다. 그는 그동안 '위장전입' 문제부터 자녀들의 '유령취업' 문제에 이르기까지 대선후보로서 크고 작은 여러 도덕적 하자들을 드러내왔다. 도곡동 땅 문제를 비롯한 여러 의혹들에 대해서도 충분한 해명을 하지 않은 채 넘어간 상태이다.

 

그러니 이명박 후보가 아무리 결백을 주장해도, 김경준씨가 꺼내놓는 내용을 보아야 결론을 내릴 수 있다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현재 대통령의 자리에 가장 가까이 가 있다고 하는 정치인이,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김경준이라는 범죄혐의자와 진실게임을 벌여야 하는 상황 자체를 이 후보는 참담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이 후보의 도덕성에 대한 국민적 신뢰가 그만큼 취약하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김경준씨를 구세주처럼 반기고 있는 범여권의 모습도 보기 딱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범여권세력은 김경준씨의 귀국을 이번 대선의 최대 승부처로 보고, 이명박 후보 지지율의 급락을 학수고대하고 있다.

 

김경준씨에 대한 검찰조사가 이명박 후보 지지율의 하락을 낳고, 이는 다시 보수진영 내부의 심각한 분열을 낳고, 여기에 범여권의 후보단일화가 성사되면 대역전극이 가능한다는 시나리오를 범여권측은 세워두고 있다. 김씨의 귀국은 범여권이 기대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 셈이다.

 

그러나 한나라당 후보, 보수진영 후보들에게 뒤지다가, 막판에 '김경준 한 방'으로 정권을 다시 잡아보려는 범여권의 모습도 처연해 보인다. 자신의 실력보다는 오직 상대방의 약점을 무기로 승리를 거머쥐려는 모습이다.

 

대선정국 한복판에 등장한 '김경준 변수'는 우리 정치에 대한 불신의 반영이다. 또한 그 불신을 더욱 심화시키는 과정이 되고 있다.

 

분명한 결론으로 악순환의 고리 끊어야

 

대선승부가 한 범죄혐의자의 입에 달리게 된 비정상적인 상황. 이제라도 상황을 정상적으로 돌리는 유일한 길은 검찰이 진실을 있는 그대로 밝히는 일이다. 검찰은 정치권의 논란에 휘둘리거나 정치적 고려를 하는 일 없이, 오직 사실에 입각해서 의혹을 규명해야 할 책무를 안고 있다.

 

대선을 앞두고 제기되는 의혹들은 언제나 정치적 공방으로만 흐르고 정작 대선 이전에 분명한 결론은 내려지지 못해왔다. 그러다보니 대선의 판도가 후보들간의 대결이 아닌, '제3의 변수'에 의해 좌우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이명박 후보는 "대통령이 되더라도 BBK 문제가 있다면 직을 걸고 책임을 지겠다"고 밝힌 바 있다. 자신의 말이 거짓일 경우, 무한책임을 지겠다는 말이다. 만약 이 후보가 거짓을 말해온 것이라면, 그는 자신의 약속대로 합당한 책임을 져야 한다.

 

반대로 김경준씨의 거짓주장 때문에 이명박 후보가 억울하게 곤욕을 치르고 있는 것이라면, 검찰수사로 분명하게 결백이 밝혀지는 것이 이 후보에게도 꼭 필요하다. 만약 그가 대통령이 된다 해도, BBK의혹을 털고가지 않으면 집권 이후에도 논란은 계속 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김경준씨의 입에 대선승부가 달려있는 현실은 우리 정치의 불행이다. 그러나 기왕 이런 상황이 벌어진 마당에, 누구의 말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결론은 분명히 내리고 가야 한다. 그래야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다. 그 책임은 이제 대한민국 검찰의 어깨에 놓여 있다.


태그:#김경준, #BB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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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종양 수술 이후 방송은 은퇴하고 글쓰고 동네 걷기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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