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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근대 사상가 루쉰의  통찰력이 담긴 산문집
▲ 아침꽃을 저녁에 줍다 중국의 근대 사상가 루쉰의 통찰력이 담긴 산문집
ⓒ 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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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큐정전>과 <광인일기>를 통해 널리 알려진  루쉰(魯迅)은 중국 근대의 대표적 사상가며 문필가이다. 루쉰은 의학도에서 문학으로 전향한 독특한 이력을 지니고 있다.

일본에 유학해 서양의학을 공부하던 루쉰은 세균학 공부 시간에 본 슬라이드에서 동포가 스파이로 몰려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박수를 치는 중국인들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2학년 때 세균학 수업이 있었고, 세균의 모양은 모두 슬라이드로 보여주었다. 한 단원이 이미 끝났는데도 시간이 남아있으면 시사 필름을 보여주곤 하였다. 물론 일본이 러시아에 이기는 장면뿐이었다. 그런데 중국인이 거기 들어 있었다. 러시아군의 스파이라 하여 일본군에 체포되어 총살당하는 장면이었다. 둘러싸고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도 중국인들이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의 중국인인 나도 교실에 있었다.

“만세!” 그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슬라이드가 한 장 한 장 넘어갈 때마다 이런 환호성이 계속되었다. 그 환호성은 유난히 귀를 따갑게 자극했다. 나중에 중국에 돌아 온 뒤에도, 죄인들이 총살당하는 것을 태평스레 구경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후지노 선생' 중(본문 인용)


중국들의 태도에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은 그는 병든 육체를 치료하는 것보다  병든 정신을 개혁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자각하고 과감하게 의학 공부를 포기하고 중국으로 돌아온다.

루쉰이 중국에 서양 의학을 자리잡게 하기를 바라며 그의  강의노트를 일일이 점검해 꼼꼼하게 개인지도를 해주던 해부학 교수 후지노 겐구로씨는  루쉰이 2학년 때 의학공부를 그만두고 센다이를 떠날 때  몹시 아쉬워하며 자기 사진에 석별이라는 글자를 써서 건네주었다고 한다.

그는 글을 통해 민중을 계몽하고 일깨우는 일에 회의가 일어나거나 나태해질 때마다 자신의 방 책상 위에 걸어 둔 후지노 교수의 검고 야윈 얼굴을 보며 다시 양심을 되살리고 용기를 얻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아침꽃을 저녁에 줍다>는 루쉰의 많은 평론 중에서 추리고 엮어 이욱연 서강대 교수가 번역한 책이다.

글은 크게 3부로 제 1부 '길은 영원히 있다', 제 2부 '절망에 대한 반항', 제 3부 '외침 그리고 방황'으로 편집되어 있다.

제 1부 '길은 영원히 있다'는  생명의 진화와 발전, 아버지에게서 자식에게로 이어지는 삶의 자세, 또 여성에 대한 편협되고 왜곡된 사회의 편견 등에 날카로운 비수를 들이대고 있다.

사실 국난은 여성들만의 죄가 아니다. 여성들은 참으로 가엾은 존재이다. 사회제도가 여성들을 이런저런 것들의 노예로 만들었고, 게다가 갖가지 죄명을 씌우려 하고 있다. 한나라 말엽에 당시 여인들의 눈썹이 가느다랗고 끝이 처진 것을 가리켜 망국의 조짐이라고 했었다. 기실 한나라가 망한 것이 어찌 여자의 책임이랴! 여인의 몸치장을 가지고 탄식을 하며 불만을 느꼈던 것 하나만 봐도 그 당시 통치계급들이 얼마나 신통치 않았는지 알 수 있다.-'여성과 국난' 중(책 인용)

제 2부 '절망에 대한 반항'에서는 삶의 이런저런 모습을 통해 그릇된 습관이나 타성, 강자에게 한없이 굴종적이면서 힘없는 자를 내리누르는 인간의 비굴한 속성 등 인간이 지닌 바람직하지 못한 양면성을 예리한 시각으로 통찰하여 보여주고 있다.

제 3부 '외침 그리고 방황'에서는 자신이 왜 글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외침을 멈추지 않는지, 그럼에도 '저는 식인파티를 돕고 있습니다‘에서 고백하듯이 자신이 혹시 글이라는 도구로 인해 권력자의 나팔수로 이용당하고 있지는 않는지에 대한  회의와 염려를 사심없이 털어 놓고 있다.

그렇게 중국민중의 우매함과  병폐를 가차없이 비평한 루쉰의 글 속에는 그런 민중을 사랑하는 애정 또한 듬뿍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닌, 발전을 위한 민중의 각성을 촉구하는 그의 진심이 글마다 담겨 있기에 글을 읽는 독자 역시 그의 바람을 곧 감지하게 된다.

그럼에도  루쉰은 사실 수많은 젊은이들을 사상적으로 미혹하여 고난의 길을 가게 했다는 혹평과 미온적인 지식인으로 색채가 불분명한 사상가라는 혹평을 동시에 받았다. 그에게 이런저런 가혹한 혹평이 이어졌다는 것은 그만큼 그가 중국민중에게 끼친  영향력이 컸다는 반증도 될 것이다.

봉건주의가 무너지고 서구의 근대화 물결이 밀려들어오던 시기에 살던 실천적 지식인으로  아무런 의식 없이 그저 바람에 날리는 갈대처럼 이리저리 휩쓸리는 수많은 군중을 보며 그가 지녔을 고뇌와 갈등이 어떠했을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는 자신의 글에서
"죽일 수 있어야  살릴 수 있고, 증오할 수 있어야 사랑할 수 있으며, 살릴 수 있어야 사랑할 수 있다"고 고백했다. 그가 죽이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며, 그가 끝까지 애정을 가지고 살리고자 했던 것은 과연 무엇일까?

진보와 혁명을 핑계로 피의 잔치를 끊임없이 지속하던 중국과, 민중의 삶과 안위는 안중에도 없이 여전히 자신들의 밥그릇 챙기기에 여념이 없는 현 정국은 너무나 닮은꼴은 아닐까?

그렇기에 양심의 소리를 져버리지 않고 우리 시대를 밝혀준 실천적 지성 리영희 선생이  역시 실천적 지식인이었던 루쉰의 책에 서문을 쓴 것은 너무 당연해 보인다. 리영희 선생은 서문에서 루쉰이 암흑 속에서 광명을 찾아 헤매던 중국 민중들에게 그토록 큰 감동을 준 것은 그들의 운명을 함께 괴로워 한 루쉰의 삶 때문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 땅에 그만한 양심과 지성이 살아있지 못한 아쉬움이 크고 70년 전 중국 사상가의 사상이 지금도 변함없이 유효하다는 사실에 우리의 인간적 진화가 너무 더딘 것이 아닐까 절망도 되지만 그래도 한줄기 실낱 같은 불빛이라도 비춰 줄 사상가가 있다는 사실로 오히려 위안을 삼아야 할는지도 모르겠다.

덧붙이는 글 | <아침꽃을 저녁에 줍다>/ 루쉰 글. 이욱연 편역/예문/9,500원



아침꽃을 저녁에 줍다

루쉰 지음, 이욱연 엮고 옮김, 예문(2003)


태그:#루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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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잘살면 무슨 재민교’ 비정규직 없고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장애인 노동자입니다. <인생학교> 를 통해 전환기 인생에 희망을. 꽃피우고 싶습니다. 옮긴 책<오프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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