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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형덕

 

지난 주말이었다. 모두들 단풍 구경을 나서는 바람에 찻길이 아침부터 막힌다. 이 지경이고 보니, 텅 빈 서울 구경이나 하자고 거꾸로 길을 나섰다. 동묘에 이르니, 단풍도 없는데 사람들로 바글거린다. 주말이면 선다는 벼룩시장이다.


여기저기 좌판이 벌어지고, 흥정하는 사람들이며 호객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로 왁자지껄하다. 웬만한 시골 장터보다 더 푸지다. 너나없이 ‘혁신’과 ‘명품’만 부르짖는 요즘, 너저분한 헌 옷이며 신다 버린 구두짝을 늘어놓고 앉아 있는 그 뱃심이 가상하다.

어느 적 영화인지 해진 포스터 몇 장 붙여놓고, 애들이 쓰던 바른 생활 교과서 몇 권 모아 놓고 의젓하게 ‘근현대사 자료 - 삶의 이야기’라고 부제까지 써 붙인 그 심중이 능청스럽기까지하다.

 

 

한때 시민이 낸 돈으로 평생 배운 재주를 밑천 삼아 한바탕 푸지게 조경사업을 벌여 도심 한가운데 개천을 흘려 보낸 이도 있지만, 그런 이들이 보자면 참 눈엣가시가 아닐 수 없는 풍경일 것이다.

말끔하고, 남에게 내보이기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말짱 들어다 흔적도 없이 내다 버리고 싶은 사람들과 물건들이 떼를 지어 모여 있다. 모여 있는 것만이 아니라 제법 풍성하니 흥겹기조차 하다.

 

낚싯대를 길게 늘어 놓은 동묘 앞에는 ‘무조건 천원’이라는 헌옷 장사의 외침에 바글거리는 사람들로 발을 움직이기 어렵다. 어느 시골의 재래시장이 이만큼 풍성하고 오지단 말인가. 말끔하기로 따지자면 백화점이요, 남에게 내보이기로 하자면 몇십 층짜리 대형 주상복합빌딩이겠지만 어디 사람사는 세상이 기생처럼 남에게 내보이려고 꾸미고 앉아 있을 수만 있더냔 말이다.

 

 

살아가는 모든 것이 아름답고, 좀 모자라고 너저분한 것들도 한세상 그 틈에 끼어 살아가야 하지 않겠나. 보기 흉하다고 어디로 한데 몰아넣고는 눈가림을 한다고 없어질 수 있다면 그것은 비극이다. 장이란 개구멍도 있고 악다구니도 있으며 오랜만에 만난 이웃끼리 선술잔이라도 나누는 번잡함이 있어야 멋 아니겠는가.

 

어디 아픈 데 없냐고 붙들어, 붙이기만 하면 모든 통증이 멈춘다는 파스를 공짜로 붙이고 앉아 있자니 참 이런 인심도 만나기 힘들다.

 

 

한바탕 청계천을 살린다고 그 야단을 떨던 이가 요즘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이곳이 좀 한가해지나 싶었다. 그러더니 이제는 새로운 이가 나타나 "서울은 디자인"이라며 이제 새 단장할 채비를 갖추는 즈음에, 또다시 이 벼룩처럼 너저분한 장터가 미운털이 박히지나 않을까 벌써부터 걱정된다.

 

누가 만들지도 않고, 시키지도 않아도 스스로 풍성하게 펼쳐진 이 난전이 어디로 갈 것인가. 길거리에 서서 오가는 이들을 바라보는 나무 오리에게 길을 묻고 싶다.

 

 

번쩍거리는 도심의 마천루가 하늘을 찌를지라도, 그 뒷골목의 벽에는 여전히 조악한 광고종이가 나붙기 마련이다. 평생을 몸 하나 들어갈 수레에 쭈그리고 앉아 제 밥벌이 다 하고, 자식들마저 훌륭히 키워낸 이를 느닷없이 부끄러운 사람으로 몰아가면 안 되겠다.

 

디지털이 아니라 그 할아버지가 오신다 해도, 이 헐하고 구김 없는 서울 뒷골목의 풍성한 장터를 말끔히 갈아치우겠다는 생각은 애초부터 하질 말기 바란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듯이 모든 삶에도 귀천이 없는 법이다.

 

 

첨단 아이티 강국을 부르짖으며 오늘도 높다란 빌딩이 솟구치고 여전히 무엇인가를 열심히 부수어대는 대한민국의 수도 한복판에서, 누군가를 붙들어 앉혀 놓고 점을 치는 이의 모습이 설악산 단풍보다 더 진지해 보인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추후 '남양주뉴스'에도 실립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벼룩시장, #청계천, #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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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동면 광대울에서, 텃밭을 일구며 틈이 나면 책을 읽고 글을 씁니다. http://sigo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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