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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인의 축제.
▲ 소요산 올라가는 길 도시인의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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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에 산란된 단풍.
▲ 단풍 햇살에 산란된 단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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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단풍의 계절이다. 그러나 열섬효과 등으로 따뜻해진 도시 안에서 집과 회사를 왕복하는 내가 단풍을 인지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 내게 정작 단풍의 소식을 알려준 건 최근 들어 신나게 여행을 다니시던 아버지와 어머니셨다. 정년퇴직을 하신 이후에 어머니와 돌아다니시며 사진을 찍고 앨범 편집하는 게 큰 낙인 아버지. 그런 당신에게 가을은 그 세대의 무력함을 잠시 잊게 해 주는 바쁜 계절이다.

억새를 보고 싶다는 여자 친구의 바람을 듣고 포천 명성산을 간다며 주섬주섬 짐을 꾸리고 있는데 아버지께서 한 말씀 하신다. 이미 억새는 다 졌을 테니 차라리 단풍을 보러 가는 게 어떻겠느냐고.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요즘 산천을 누비고 다니시는 아버지의 말씀이었고, 결정적으로 아버지의 고향이 포천 아니었던가.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명성산을 마음에서 지운 이후, 마땅한 대체지가 떠오르지 않은 것이다. 어머니 아버지는 며칠 전 다녀오신 충남 대둔산을 추천했지만, 혼자 가는 것도 아닌 터라 버스 왕복으로 당일여행은 무리가 될 듯 싶어 난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어디로 가지? 아까운 시간은 계속해서 가고 어딜 갈 줄 몰라 우왕좌왕하는 내게 아버지께서 단비 같은 한 말씀을 하신다. "요 며칠 전 TV를 보니 동두천 소요산 단풍이 그리 좋다는 구나."

소요산이라. 매일 동인천에서 구로까지를 왔다 갔다 하면서 슬쩍슬쩍 보아 두었던, 그리고 한번쯤 가봐야겠다고 마음먹은 새로 개통된 1호선의 종착역이었다. 좋아. 교통편도 전철 한 번이면 되고 나쁘지 않네. 곧장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회기역에서 만나기로 한 뒤 집을 나섰다. 오늘의 목적지 소요산. 전광판에서나 존재했던 디지털 소요산이 하나의 실체로 다가서는 순간이었다.

2007년 가을, 단풍을 찾아서... 소요산 가는 길

지하철에서부터 숨이 콱콱 막혔다.
▲ 거대한 인파 지하철에서부터 숨이 콱콱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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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야 한다는 당위성을 안다는 것만 해도 다행이다.
▲ 도시의 확장 지켜야 한다는 당위성을 안다는 것만 해도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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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계역에서 친구를 만나 소요산 행 전철에 올랐다. 회계까지 오면서도 느꼈지만 그 수많은 승객들은 거의가 등산객들이었다. 하나같이 울긋불긋 등산복을 차려입은 평균연령 50대의 부모님뻘 되는 그들.

자리가 없어 서 있어야 했던 난 친구에게 도봉산역만 지나면 헐렁해질 거라 이야기했지만 웬걸 도봉산역을 지나고 망월사, 회룡역을 지나도 승객들은 줄지 않은 채 북적거렸다. 도대체 뭐지? 의아해 하던 내게 어느 아저씨가 귀띔을 해줬다. 모두 소요산 가는 사람들이라고. 아뿔싸.

가늠할 수 없는 등산객의 머릿수에 뜨악하고 있는데 그들 위로 걸린 전철의 광고 아닌 광고가 눈에 띄었다.

'국립공원 명예대사'라는 영화감독 임권택의 사진과 함께 이 시대의 거장 북한산과 도봉산을 살리자는 문구가 적혀 있는 공익광고였다. 연 천만 명이 넘는 등산객의 발걸음 때문에 국립공원이 심하게 훼손된다는 것이었다. 나도 그 천만 명 속에 최소한 2~3인분 몫은 했다는 생각에 뜨끔했다.

위 문제를 풀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광고에서는 그 해결방안으로 토, 일 오전 10~12시의 등산 자제를 제시했지만 이 광고를 보고 과연 얼마나 많은 이들이 산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되돌리겠는가.

50대 이상의 취미는 골프와 등산 뿐

북한산과 도봉산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것은 두 산이 명산인 까닭도 있겠지만 결국 그 위치가 서울이기 때문이다. 인구 과밀은 두 산을 오르는 등산객의 문제가 아니라 서울이라는 공간이 가지고 있는 근본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서울의 생태계를 그나마 보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수도 서울의 기능을 분산시켜 인구를 흩뿌리는 것이다. 행정이든 교육이든 간에 서울로 집중되어 있는 기능을 지방으로 이전해야 한다. 물론 '관습헌법'이라는 산을 넘어야겠지만 말이다.

또한 등산객들의 수를 줄이기 위해서는 사회에 다양한 취미가 존재해야 한다. 현재 우리 사회는 다양한 취미를 향유하기에 그 문화수준이 일천하며 사람들의 근성은 맹목적이다. 오죽하면 50대 이상의 취미는 골프와 등산밖에 없다지 않은가. 결국 취미 자체가 업체 접대와 전투적 생활방식의 연장인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 전체가 느려져야 하며 여유를 가져야 한다. 욕망을 극대화시켜 조금 더 큰 차와 조금 더 큰 집, 조금 더 많은 돈을 원하는 악귀를 양산하는 지금의 극악한 시스템 속에서는 그 어떤 사람도 여유를 가질 수 없으며 이는 결국 획일적인 취미만을 양산해내기 때문이다.

자재암의 일주문.
▲ 일주문 자재암의 일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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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명생이 헛되지 않았던 그 곳
▲ 경기의 소금강 그 명생이 헛되지 않았던 그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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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워낙 많은 탓에 전철에서 내려 개찰구를 통과하기까지도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주말 단풍놀이가 처음이라던 여자 친구는 옆에서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저 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산을 오른다는 사실이, 줄을 서서 산을 오른다는 사실이 영 탐탁치가 않은 모양이었다. 고등학교까지 산청 지리산 중턱에서 살았으니 산을 부러 찾는 것 자체가 낯설었으리라.

전철역 앞은 돛대기 시장이었다. 수많은 인파도 인파였지만 등산객들을 유혹하는 음식점들부터 시작해서 김밥장수, 등산용품점 등 서울의 여느 산에 오를라치면 흔히 볼 수 있는 그 모든 것들이 길가에 즐비했다. 지글지글 파전 굽는 소리와 낮부터 마신 막걸리 대병에 취해 홍알거리는 사람들.

결코 낯선 풍경은 아니었지만 불편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과연 전철이 개통되기 전에도 소요산은 이렇게 난잡한 풍경을 지니고 있었을까?

물론 '단풍의 계절'이라는 특수성도 한 몫 했겠지만, 전철개통이 가져다 준 근접성은 소요산에 큰 생채기를 남겼다. 혹자들은 교통이 편해졌다고 무작정 기꺼워하지만 결국 그것은 도시의 확장으로 인한 녹지의 소멸과도 같은 말이다.

고층빌딩에 환호하는 농촌촌놈, 단풍에 환호하는 도시촌놈

거대한 인파 속에 섞여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소요산 가을단풍은 '경기의 소금강'이라더니, 역시 괜한 명성이 아니었다.

하늘은 높고 파랬으며 빨갛고 노란 단풍들은 고왔다. 가는 곳곳마다 탄성이 이어졌으며 사람들은 단풍나무 밑에서 사진을 찍느라 하나같이 정신이 없었다. 화남 서경덕과 봉래 양사언, 매월당 김시습이 그 곳에서 소요해서 소요산이라는 그 지명의 유래에 십분 동감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망중한에 나 역시 넋을 놓고 단풍을 바라보고 있는데 친구가 옆에서 한마디 한다. "아, 이런 게 단풍놀이구나. 우리 농촌에서는 가을에 단풍놀이는커녕 매우 바쁘기만 한데." 역시 농부를 아버지로 둔 친구의 생각은 나와 달랐다. 평소 나를 가리켜 전형적인 도시인이라던 친구의 말을 어렴풋이 이해할 것 같기도 했다.

원효의 전설이 묻힌 그 곳.
▲ 자재암 원효의 전설이 묻힌 그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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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놀이는 전형적인 도시인의 축제이다. 단풍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한들 자연 속에서 눈을 뜨고 삶을 영위하는 농촌 사람들에게 단풍은 시간의 경과를 알려주는 좋은 기제일 뿐, 도시인처럼 그렇게 환성을 지르고 부러 찾을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고층빌딩에 환호를 하는 농촌촌놈을 바라보는 도시촌놈의 시각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따라서 가을만 되면 어김없이 시작되는 단풍놀이 행렬은 도시인이 가지고 있는 결여태의 표현이다. 그것은 땅에서부터 멀어진 도시인들의 본능적인 귀소본능이며 회색도시의 삶에 지친 도시인들의 탈출행렬인 것이다. 다만 비극은 그 탈출자체가 또 다른 방식의 도시생활의 확장이라는 사실이다.

소요산 입구를 지나 조금만 가니 옆에 '자유수호평화박물관'이라는 곳이 눈에 띄었다. 그 이름에 '자유'가 들어간 걸로 봐선 역시 그 정체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동두천이 미군의 도시다 보니 한국전쟁에 대한 자료와 주둔 중인 미군을 엮어 하나의 전시관을 만들었으리라. 들어가 보고 싶었으나 이미 정상으로 내친 발걸음, 하산길에 들려야겠다는 결심만 한 채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동두천에 주둔해 있는 미2사단에 대해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는데 때마침 앞서 걷고있는 외국인 쌍이 보였다. 필시 미군일 그들은 흑인 남성에 백인 여성이었다.

그냥 그러려니 하면 되었지만 자꾸 그들에게로 눈이 가는 이유는 내 무의식에 박혀 있는 남성우월주의와 인종차별 요소 때문이리라. 백인남성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나. 이 역시 오리엔탈리즘의 발현이겠지. 그들에게 눈이 갈수록 스스로 부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북적거리는 인파 속에서도 눈에 확 띄었던 그들.
▲ 커플 북적거리는 인파 속에서도 눈에 확 띄었던 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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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하고 험한 길, 그러나 소요산을 오를 수밖에 없는 이유

단풍에 취해 얼마나 올라갔을까. 자재암이 보이기 시작했다. 원효가 수도를 하던 곳으로 관세음보살이 내려와 그를 유혹하며 시험에 들게 했다는 바로 그곳. 주위 풍경은 그와 같은 전설이 전해질 만큼이나 아름다웠으며, 암자 앞마당은 그 풍경이 아름다운 만큼 많은 사람들로 시끌벅적했다.

자재암부터 시작된 본격적인 소요산 산행. 다행히 아스팔트나 시멘트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지만 길은 매우 급하고 험했다.

사람들은 줄을 섰고, 간혹 놓쳐버린 물병이 떼굴떼굴 밑으로 떨어졌을 경우 그 물병을 포기한 채 앞으로만 나아가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등산로가 이렇게 험하면 그 많던 사람이 줄어들 만도 하건만 모두 단풍을 보겠다는 집념에서인지 자재암부터 하백운대까지는 내내 서다가다 해야만 했다.

하백운대서부터 시작된 소요산의 능선. 그곳에서 바라본 소요산의 풍경은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상투적 표현을 따르자면 산 전체에 빨간 물감, 노란 물감을 뿌려놓은 형색이었다. 이러니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을 수밖에.

줄을 서서 올라야 했던 소요산.
▲ 줄을 서시오 줄을 서서 올라야 했던 소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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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았던 터라 중백운대를 찍고 산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위에서는 울긋불긋한 산 전체를 내려다보는 맛이 일품이더니, 계곡에서는 햇살에 산란된 단풍을 올려다보는 맛이 제법이었다.

산을 내려와 전철역으로 가는 길. 시간이 늦은 터라 자유수호평화박물관은커녕 막걸리 한 사발 마시기조차 여의치 않았다. 전시관이야 개장 시간이 끝난 것이었지만, 막걸리에 파전을 하다 보면 저 많은 인파들과 함께 술에 취해 북적거리는 지하철을 타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술이 좋고, 북적거리는데 익숙한 도시인이라지만 이곳까지 와서 그 번잡함을 굳이 감수해야겠는가.

소요산 단풍. 11월 첫째 주, 아직 늦지 않았음을 알린다.

울긋불긋한 봉우리들.
▲ 중백운대에서 바라본 단풍 울긋불긋한 봉우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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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소요산, #단풍, #가을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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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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