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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7월 23일부터 시작된 귀환 중국노동자 방문여행. 3박 4일간 탈북주민 강씨 아주머니 일행 방문을 마치고 다시 산둥성으로 향했다. 마을을 떠나는 우리 일행을 배웅하기 위해 아이들이 따라나섰다. 큰 도시로 가는 버스가 들어오는 마을 어귀에까지 나오는 데에는 수십 리 길을 걸어야 한다. 아이들은 어느새 꽃단장을 하고 재잘거리며 우리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길섶에 끝없이 늘어선 나뭇잎이 찰랑거린다. 며칠 전 우리를 위해 밤을 지새우며 매미를 잡았던 아이들을 뒤로 한 채 무거운 발걸음을 재촉했다.

오늘 만나는 분은 재중동포 박정호 선생님이다. 박 선생님은 2005년 한국에서 추방당하기  전까지 우리 사무실에서 없어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중국 한족 노동자가 3만 여 명 넘게 거주하는 안산시 원곡동. 그러다보니 우리 센터에도 중국 한족 노동자분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이 사실. 박 선생님은 우리 사무실에서 거의 하루 온종일을 보내며 통역과 번역, 그리고 노동부와 법무부 방문을 도맡다시피했다.

탈북자 강씨 아주머니네 마을을 떠나는 날 밤새껏 매미를 잡아준 아이들이 배웅을 나왔다. 아련한 길 너머로 아쉬움이 뿌옇게 잦아든다. 황톳길따라 잰걸음으로 따라온 마을의 아이들.(단 두번째 줄 통통한 애는 동행한 한국인 일행)
▲ 매미를 잡아준 아이들 탈북자 강씨 아주머니네 마을을 떠나는 날 밤새껏 매미를 잡아준 아이들이 배웅을 나왔다. 아련한 길 너머로 아쉬움이 뿌옇게 잦아든다. 황톳길따라 잰걸음으로 따라온 마을의 아이들.(단 두번째 줄 통통한 애는 동행한 한국인 일행)
ⓒ 차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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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선생님은 중국에서 외항선을 타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시며 젊은 시절을 다 보냈다. 2000년 경, 부산항에 입항했을 때 배에서 바라다 본 부산의 야경이 자신을 '미치게 하여' 배에서 몰래 도주하였다고 한다. 그 후 '노가다 판'에서 전전긍긍 세월을 보내다 우리 사무실에서 마련한 가을 내장산 단풍관광으로 센터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라스팔마스!"
박 선생님은 외항선을 타고 전 세계 주요 국가를 그리도 많이 다녔다 하는데 딱히 어느 곳을 다녀보셨냐고 물어볼 때마다 돌아오는 답변은 오직 하나, '라스팔마스'다.

"그리고 또, 또 어디요?" 여태껏 아시아권을 한번도 벗어나본 적이 없는 나는 그의 세계일주 기행담을 잔뜩 기대하고 묻는다. 하지만 그의 입에선 늘 라스팔마스만 맴돌 뿐이다. 아마 라스팔마스에서 잊지 못할 로망스가 있었으리라 짐작하는 것으로 더 이상의 물음을 접었다.

내가 하는 일이 너무 좋아 보인다며, 언젠가부터 모든 일을 접고 우리 사무실로 아예 매일같이 출근을 해버린 박 선생님. 우리는 박 선생님이 봉사하는 3년여 동안 단 한 번도 이분에게 사례비나 수고비 등을 드린 적이 없다. 가끔 외국인노동자들이 왜 공장에 가서 일을 하지 않고 사무실에 와서 시간을 허비하느냐고 물으면, 그는 "나는 가정이 없으니 돈을 벌 필요가 없다"며 간단히 응수해버린다.

안산 외국인노동자의 집에서 선운사로 단풍여행을 갔을 때 박정호 선생님의 모습. 2004년. 두번째 줄 왼쪽에서 네번 째 분.
▲ 한국에 계실 때의 박선생님 모습 안산 외국인노동자의 집에서 선운사로 단풍여행을 갔을 때 박정호 선생님의 모습. 2004년. 두번째 줄 왼쪽에서 네번 째 분.
ⓒ 차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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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선생님은 간혹 저녁 늦게 불 켜진 내 사무실 위층 옥상에 올라 혼자서 술 한 잔을 기울인 채 상념에 잠기곤 한다. 그리곤 내가 퇴근할 즈음이 되면 사무실로 들어와서 이런 말을 하고는 집으로 돌아간다.

"차 국장님. 전 태어나서 처음으로 선생이라는 소리를 들어봤습니다요. 참말로 쑥스럽지만, 차 국장님이 저를 보고 박 선생이라고 불러준 게 한편으로는 진짜 쑥스럽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저... 제가 뭔가 중요한 사람이 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요."

말끝마다 '요'자를 붙여야만 표준 서울말이라고 배운 박씨의 특유한 말투에, 그가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을 외항선원 생활 속에서도 지켜왔음직한 순박함이 배어난다.

길림시가 고향인 박 선생님은 소학교를 채 마치지 못하셨다. 한족 소학교를 다니던 중 3학년 때 자신의 담임이었던 한족 교사가 조선족을 대놓고 무시하는 발언을 했다고 한다. 그는 분을 못 이겨 학교 창문을 남김없이 깨부숴버렸다. 그리고 그날로 그곳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그것이 박 선생님이 학교라는 곳과 인연을 같이 한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저는 못 배웠습니다요. 제가 뭘 알겠습니까요"를 늘 입에 붙이고 사시는 박 선생님은 실제로는 아주 탁월한 재치와 판단력의 소유자이다. 그는 늘 우유부단하고 어리석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어떤 순간적인 결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서 발휘하는 그의 재빠른 상황판단에 내가 도움을 입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서일까? 일자무식에 돈도 한 푼도 없다는 자신의 발언과는 달리 그의 주변에는 늘 젊은 아줌마들이 몰려다닌다.

드디어 청도에서 박선생님을 만났다. 한국에서 추방을 당하신 후 2년 만의 재회이다. 그동안 새 여자친구를 사귀시고 계셨다. 연태라는 지역을 처음으로 벗어나보셨다는 여자친구 양선생님과 함께
▲ 청도역 앞에서 박선생님 일행과 드디어 청도에서 박선생님을 만났다. 한국에서 추방을 당하신 후 2년 만의 재회이다. 그동안 새 여자친구를 사귀시고 계셨다. 연태라는 지역을 처음으로 벗어나보셨다는 여자친구 양선생님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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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에서 오신 한족 여자분인 유씨 아가씨와 3년 간의 열애 끝에 안타깝게도 끝내 이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2005년 4월, 박 선생님이 법무부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에 의해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자신은 법무부에 체포되어도 언제든지 한국으로 배를 타고 밀입국을 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며 너스레를 떠시던 박 선생은 그렇게 중국으로 추방을 당하였다. 밀입국을 하겠다던 그의 영웅담은 성사되지 못하고 중국 여기저기를 떠돌며 여태껏 방랑생활에 취해 있다.

앞으로 만나게 될 많은 귀환 외국인노동자분들의 경우 그분들의 댁으로 방문할 예정인데,
박 선생님만은 예외. 딱히 거주지가 없기 때문이다. 위해에서, 연태로, 길림으로 여기 저기를 떠돌며 몇 개월 주기로 가구 공장 등을 떠돌며 임시로 기거하는 상황이다. 그런데다가 어떻게든 다시 한국으로 오기만을 희망하고 있어서 중국에 정을 붙이지 못하고 있다.

박 선생님이 길림에서 출발한 지 하루가 지났고 대련에서 배를 타고 연태를 거쳐 칭다오에 왔다. 드디어 칭다오에서 박 선생을 만난다.

박 선생은 그 사이 새 여자친구를 사귀고 있었다. 안산시 원곡동에서 함께 지내던 여자친구와 헤어진 지 벌써 두 해가 더 지났으니 새 여자친구를 사귈 만도 하겠다. 새로 사귄 여자친구는 한족 여자인 양씨 아줌마. 5년 전에 이혼을 하신 분이다. 주근깨가 가득한 얼굴에 긴 곱슬머리를 뒤로 땋은 채, 원피스 면치마를  밑으로 삐죽이 내민 분홍빛 슬리퍼가 시골에서 갓 올라온 순박한 여자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고 있다.

삼륜차 아저씨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를 태우고, 한국인이 경영하는 한국식 호텔로 우리를 안내했다.
▲ 인력삼륜차 삼륜차 아저씨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를 태우고, 한국인이 경영하는 한국식 호텔로 우리를 안내했다.
ⓒ 차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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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을 반절이나 뒤덮은 굵은 안경을 쓴, 박 선생의 여자 친구 양씨는 지역 내 각종 스포츠 대회 때에 마스게임 선수로 동원되던 무용팀원이라 한다. 여태껏 연태라는 지역을 벗어나 본 적이 없다 한다. 청도에 한번 와보는 것이 소원이었다며 우리 일행에게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는 모습이 영락없는 시골 아주머니시다.
        
짧은 기간 동안 천진과 장춘, 연길 등 돌아봐야 할 가정들이 많았음에도 우리는 이 두 분을 위해 이틀의 시간을 산둥 관광에 보내기로 했다. 이번 기회가 아니고서는 다시는 청도에 나올 기회가 없을 수도 있다고 하기에.

우리는 계획에 없는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다. 산둥성에서 유명한 관광지라면 단연 곡부. 중국발음으로 취푸라고 하는 곳으로 공자의 탄생지이다. 청도 버스터미널에 가서 버스를 타고 곡부로 향했다.

중국의 버스는 간혹 버스 내에 화장실이 설치되어 있다. 하지만 화장실이라 해봐야 아주 산뜻한 수세식화장실이 아니라, 간이화장실처럼 되어 있다. 버스여행을 시작한 지 두어 시간쯤 되자 버스에서는 아주 역한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코를 틀어막고, 어떤 꼬마가 용변을 참지 못해서 실례를 했으리라 생각하며 어서 목적지에 도착하기만을 인내하며 기다렸다.

그런데 알고 보니 버스 안의 화장실에 어른이고 아이들이고 급한 사람들이 볼 일을 보고 있던 것이다. 칸막이도 없는 버스 안 간이 화장실. 덜컹거리는 버스 한 쪽에서는 승객이 용무를 보고, 또 한 쪽에서는 아무 생각이 없이 창 밖을 보며 고향을 찾아가는 중국인들이 갑자기 너무나 낯설게 다가왔다.

유학자 권혁범 선생님께서 우리를 반가이 맞아주셨다. 마침 북경에서 부인이 와있었다. 곡부한실호텔 www.gokbu.com
▲ 한실호텔 유학자 권혁범 선생님께서 우리를 반가이 맞아주셨다. 마침 북경에서 부인이 와있었다. 곡부한실호텔 www.gokb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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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부에 도착했다. 관광버스가 아니라서 그런지 곡부를 찾은 사람은 중국인 한국인 할 것 없이 오직 우리 일행뿐. 버스에서 내리는 우리를 향해 한 아저씨가 삼륜차를 몰고 부지런히 달려온다. 이것이 바로 말로만 듣던 인력삼륜차인가 보다. 곡부에 온 한국인 관광객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차린 삼륜차 주인아저씨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한실 호텔과 한국식당이 있다며 다짜고짜 우리를 삼륜차에 태운다. 너무 먼 길을 달려오느라 피곤한 우리는 경황이 없이 삼륜차에 몸을 맡겼다.

20여분쯤 달렸을까? 한글이 선명하게 새겨진 한국식 호텔이 시야에 들어왔다. 우리는 한실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이 한실호텔을 운영하시는 분은 바로 한국인 유학자 권혁범 선생님. 한국 성균관대학교에서 유학을 공부하고 잠시 곡부에 여행 차 들렸다가 아예 한국의 모든 살림을 정리해버리고 이곳에 정착을 해버리셨다. 이참에 두 아들도 베이징 대학으로 유학을 왔고 부인되시는 분은  북경에 머무르며 아이들 뒷바라지를 하고 계시다고 한다.

계획에 없는 여행을 하게 된 우리. 4명의 일행에 겨우 방 하나를 달라고 했으나, 전혀 개의치 않으시고 친절한 설명과 함께 우리를 방으로 안내해주셨다. 권선생님으로부터 곡부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듣고 여행을 시작했다.

곡부한실호텔 바로 옆에는 한국식 음식점이 있다. www.gokbu.com
▲ 한식당 곡부한실호텔 바로 옆에는 한국식 음식점이 있다. www.gokb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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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와 그 자손의 묘가 있는 곳. 총 10만 평이 넘는 세계 최대의 가족 묘이다.
▲ 공림 공자와 그 자손의 묘가 있는 곳. 총 10만 평이 넘는 세계 최대의 가족 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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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림 안에는 10만 그루가 넘는 고목이 있다. 우리는 공자 묘지를 지나 사람들이 자주 가지 않는 묘지공원까지 들어갔다.
▲ 공림 공림 안에는 10만 그루가 넘는 고목이 있다. 우리는 공자 묘지를 지나 사람들이 자주 가지 않는 묘지공원까지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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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부는 산둥성 서남쪽에 위치한 곳으로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중국식 발음으로는 취푸이다. 춘추시대 노나라의 도성이었으며, 세계 4대 성인 가운데 한 명인 공자가 태어난 곳이다. 도시의 역사가 무려 2500여 년이 된다. 도시 구석구석에 아주 오래된 가옥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곡부의 주요 관광명소는 공부, 공묘, 공림이다. 공부(孔府)는 공자의 자손이 살았던 저택 겸 관공서이고, 공묘(孔廟)는 공자사후에 세운 공자의 사당이며, 공림(孔林)은 공자와 그 자손의 묘가 모여 있는 곳이다.

거무튀튀한 잿빛 도로와 가옥들이 자칫 어떤 이들에게는 남루하고 퇴락한 변방의 도시쯤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중국을 세 번째 찾은 나에겐 여태껏 보아온 중국의 여러 도시 중에 가히 최고라고 할 수 있다. 아시아의 역사와 문화 곳곳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공자, 그의 숨결이 도시 곳곳에 그대로 숨어들었다. 길가에 가로수로 자라고 있는 향나무의 수령이 천년도 훨씬 넘었다고 한다. 시간에 쫓기며 바쁘게 움직이는 일행들 속에서 나는 공자라는 거인의 들숨과 날숨 속에 파묻혀 정신을 잃을 뻔했다.

시종일관 도시에 매혹된 나를 보며 박 선생님이 갑자기 말을 건넨다.

"차 국장님 그렇게 좋습니까요?"
"아 당연하죠! 최고예요 최고! 시간을 한 천년은 족히 거슬러온 것 같아요. 시간이 거꾸로 가는 것만 같고요.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공자님처럼 보여요."

좌측에 보이는 분묘가 바로 공자님의 묘지. 오른 쪽에는 공자 아들의 묘이다. 많은 관광객들이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생각했던 것보다 엄숙하지 않은 묘지 앞의 분위기.
▲ 공자 묘지 좌측에 보이는 분묘가 바로 공자님의 묘지. 오른 쪽에는 공자 아들의 묘이다. 많은 관광객들이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생각했던 것보다 엄숙하지 않은 묘지 앞의 분위기.
ⓒ 차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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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분한 나는 박 선생님에게 내가 얼마나 감격하고 있는지 충분히 설명하고 싶었지만 그럴수가 없었다.

"차 국장님. 저는 공묘보다는 종묘가 낫습니다요!"
"예? 아......"

그랬다. 외항선을 타고 세계 구석구석을 누비다 처음으로 찾아간 할아버지의 고향. 부산항에서 그가 도주했던 것은 비단 부산의 야경이 아름다워서만은 아니었으리라. 그를 울컥하게 만든 것은 깊은 밤 부산항에서 불었던 비린내 가득한 갯바람. 그 속에 실려 온 고향길의 유혹. 아버지에게 귀에 닳도록 들었던 할아버지의 고향 부산. 그래서 그는 아직까지 한국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박 선생님. 한국이 박 선생님을 추방했는데도 또 가시고 싶으세요? 동포를 버린 고국에요?"
"물론입니다요. 저는 중국이 정말 싫습니다요. 정도 안 가고요 별로 살고 싶지가 않습니다요."

소학교 시절 자신을 미워한 한족 담임 선생님에 대한 원한이 남아서일까? 아니면 그의 피에서 절규하는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환상 때문일까?

"박 선생님. 박 선생님은 한국에 가서도 일 안할 거잖아요. 또 우리 사무실에 와서 봉사하면서 세월 보내시게요?"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재중동포들이 그토록 한국에 오고 싶어 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한국이란 나라가 단지 돈을 벌기 쉬운 나라라서 그런 거 아닌가?'라고 혼자 생각하며 얄궂게 물었다.

"돈 벌어서 뭐합니까요? 저는 돌볼 애도 없고, 가족도 없습니다요. 저는 무조건 그냥 한국에 가고 싶습니다요. 한국! 공기도 좋고, 사람도 좋고, 그냥 다, 다 좋습니다요!"
박 선생님은 한국이 무엇이 그리 좋기만 한지, 한국 예찬론을 끊임없이 늘어놓기 시작한다.

그동안 외국인노동자들과 함께 문화체험으로 한국의 고궁 등 유명한 관광지에 가게 되면 유독 중국인들에서만 듣는 이야기가 있다. 경복궁에 가게 되면 자금성에 비해 너무 유치하다며 비아냥거리지를 않나, 남한산성에 소풍을 가면 만리장성하고 비교하며 지금 장난감 가게에 데리고 왔냐고 한다. 경주에 가서 불국사 다보탑을 보여주면, 시안을 들먹이며 아직도 발굴중인 병마용 이야기를 역시나 빼먹지 않고 거론한다. 한국은 작아서 유치하대나. 설악산을 가든, 내장산을 가든 언제나 '규모'의 절대적 기준만을 유일한 가치로 내세운다.

재중동포들이라고 해서 크게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한국을 은근히 무시하는 중국인 혹은 재중동포들의 대부분이 사실은 만리장성이나, 자금성, 시안을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나서 난 일체 이들의 말에 대꾸를 하지 않기로 했다.

"박 선생님. 이왕 중국에 머무르게 되셨으니, 일단은 이곳 생활에 한번 정을 붙여보세요. 이제 여자 친구도 생기셨잖아요. 이제라도 늦지 않았어요. 저분하고 결혼을 하세요. 그리고 가정을 꾸리고 단란하게 사실 생각을 해보세요. 나이 드시면 더 외로워질 텐데요."
"아 예. 알겠습니다요. 저 걱정은 하지 말고요. 차 국장님이나 빨리 장가갈 생각이나 하시면 좋겠습니다요."
"......"

30대 후반이 되도록 고향을 떠나본 적 없는, 박 선생님의 여자 친구 양씨가 우리의 대화에 아랑곳하지 않고 부지런히 구경을 하고 다닌다. 베이징에서 온 관광객, 심천에서 온 관광객. 그는 관광지보다도 관광지에 온 다른 지방의 중국인들이 더 궁금한 모양이다. 하루 온종일 지나가는 여행객들을 붙잡고서는, 지방이 어딘지 직업이 뭔지 이런 질문을 귀찮도록 하고 다닌다. 밭에 나가서 일을 하지 않고 이렇게 여행을 다니며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꽤나 신기한 모양이다.

결혼하고 얼마 못 되어 이혼하신 박 선생님. 낳아놓은 자식도 없다. 외항선에 몸을 던져서라도 중국 땅에 발을 딛고 싶지 않으셨던 것일까? 30대와 40대를 그렇게 방랑하며 보낸 박 선생님. 이따금씩 여자 친구의 순진한 행동을 보며 웃음을 보이며 걸어가는 박선생님의 뒷모습이 더욱 외로워보였다.

내 발걸음이 점점 느려진다. 방랑끼 가득한 나. 나의 미래가 갑자기 나를 주춤하게 한다. 나도 저렇게 늙어갈까? 집도 없다. 자식도 없다. 가족도 없다. 그리고 모아둔 돈도 한 푼 없다.
   
늘 지금 여기를 만족하지 못하고, 피안의 세계를 갈구하며 어딘가로 떠나야만 하는 집시 같은 나날. 나의 훗날도 이럴까?

길가에 주저앉았다. 노트를 꺼내들었다. 며칠전 끄적거린 낙서가 내 가슴에 박힌다. '가로등은 멀리서 보면 아름답다. 그러나 가까이 가면 죽어버린 날파리 떼만 가득하다.' 내가 동경하는 삶이 가로등과 같은 일상이 되지 않기를 갈구했는데 그걸 어찌 장담할 수 있단 말인가?

여행을 가기 전 친구가 나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너는 방랑을 너무 좋아해서, 아마 객사할 거야!"
나는 친구의 이 말에 한참을 고민해야 했다. 그러나 난 결국 이렇게 결론을 맺기로 했다.

'그래 좋아. 난 객사할 거야. 바그다드 까페처럼, 어느 황량한 모래사막. 나를 위해 준비해놓은 고풍스런 까페에서 마지막 남은 원두커피 한잔을 마시면서 모래바람이 무성할 때 즈음 식어가는 커피잔과 함께 그렇게 우아하게 나는 객사할 거야.'

시간이 한참을 흘렀다. 스산한 바람이 잿빛 기와의 먼지를 머금고 부서지고 있다.
"차 국장님. 거기서 뭐해요. 빨리 와요!"
"아. 네. 다리가 좀 아파서 쉬느라고요."
나는 다시 일어서서 박 선생님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 한 마디를 건넨다.

"박 선생님. 그래도 저 여자친구와 빨리 이번 달 내로 결혼해요! 우아하게 말이죠! 아셨죠!"


태그:#재중동포, #중국방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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