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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산을 찾는 날은 항상 가슴이 설렌다. 우리나라에선 길을 나서면 어느 곳에서나 만나는 것이 산이지만 그 산들은 저마다 다른 모습과 정감으로 다가온다. 산이라고 해서 다 똑같은 산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난 10월23일 경북 청송에 있는 주왕산을 찾은 날도 그랬다. 주왕산은 그 경관이 금강산에 비견할만하다 하여 경북의 소금강이라 불리는 산이 아니던가. 더구나 주왕산은 난생 처음 찾는 산이었으니 어찌 가슴이 설레지 않겠는가.

 

그 설렘 때문이었을까. 서울에서 서둘러 출발했지만 고속도로에서 길을 잘못 드는 바람에 주왕산 입구에 도착하니 11시가 넘어 있었다. 그래도 다행이었던 것은 주왕산 입구에 마중 나와 있던 안동에 사는 3명의 친구가 안내 겸 동행이 되어 준 것이었다.

 

“자! 오늘은 이 고장 친구들을 따라가기만 할 테니까 앞장서세요.”


본래 등산의 베테랑이기도 한 그들을 앞세우고 등산에 나섰다.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지만 유명세 때문인지 주왕산 등산로로 가는 길은 온통 음식점과 농산물, 그리고 토산품을 파는 가게들이 즐비했다.

 

등산객에게도 문화재관람료 꼭 받아야 할까?

 

“저 바위 봉우리 참 대단하구먼.”
주왕산의 상징처럼 맨 앞쪽에 우뚝 솟아 버티고 선 바위봉우리가 장엄한 모습이다. 그 봉우리를 바라보며 잠깐 걸어 들어가자 입장권을 파는 매표소와 함께 길을 가로막은 울타리와 몇 사람의 장정들이 서 있다.

 

 


이곳이 상의매표소다. 매표소 안쪽 오른편에는 신라문무왕 12년에 의상대사가 처음 창건하였으나, 조선조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현종13년(1672)에 재건한 대전사보광전이 있었다.

 

“아니 등산로를 따라가면 절에는 들어가지 않아도 되겠구먼, 왜 모두에게 입장료를 받지? 절 앞에서 절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나 받을 일이지.”
주왕산의 대표적인 사찰인 대전사는 길 오른편에 비켜서 자리 잡고 있어서 등산객들이 꼭 들어가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문화재 관람료는 내가 모두 지불하지.”
절에 들어가지 않고도 등산이 가능한 지형인데도 입장료를 받는 것이 미안했던지 독실한 불교신자인 일행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의 입장권까지 도맡아 사왔다. 문화재 관람료는 1인당 2천원씩이었다.

 

다른 일행들은 곧장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고 예의 불교신자인 일행과 나만 대전사 경내를 대충 둘러보며 부지런히 앞에 간 사람들을 뒤쫓았다. 대전사 보광전 뒤쪽으로 올려다 보이는 뫼산(山)자 모양의 기암(旗巖)이 더욱 웅장한 모습으로 다가선다.

 

“저 앞쪽에 보이는 봉우리가 장군봉입니다.”
대전사를 지나서 왼편으로 개울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넜다. 기암과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조금 낮게 솟아 있는 봉우리가 장군봉이었다. 장군봉으로 가는 길가의 밭에는 수확을 끝낸 참깨가리 세 개가 형제처럼 나란히 세워져 있는 모습이 정답다.

 

 


장군봉을 오르는 길은 상당히 가파르고 힘들었다. 특히 철제계단을 오르는 것이 더욱 지치게 만들었다. 계단길 주변의 바위에는 투박하게 말라버린 바위 솔들이 주먹을 움켜쥐고 힘들어하는 모습처럼 조금은 안쓰러운 풍경이다.

 

“저 아래 좀 내려다보세요. 대전사와 골짜기 풍경이 굉장히 아름답지요?”
왼편으로 장엄하게 솟아 있는 기암과 장군봉 사이를 타고 흐른 골짜기가 대전사를 지나 아래로 흘러내린 풍경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절 이름과 산 이름은 왜 바꿨을까?

 

“그런데 절 이름이 왜 하필 대전사지요? 난 웬 대전시가 여기와 있나 했네요?”
“글쎄요. 연유는 잘 모르겠는데 신라 때 창건했다는 본래의 절 이름은 전해 내려오지 않고, 고려 때 나옹화상이 주왕의 아들 대전도군의 명복을 빌기 위해 대전사라고 이름을 바꿨다는 것만 전해지고 있답니다.”

 

절의 이름을 바꿨을 때는 그만한 타당한 이유와 깊은 뜻이 있었겠지만 자세한 내용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았으니 헤아릴 길이 없었다. 장군봉에서 간식을 들며 잠시 쉬어 가기로 했다. 나무 그늘 밑에 앉으니 가을바람이 서늘하다. 주왕산의 연봉들은 조금씩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저 멀리 능선 길 끝에 제일 높은 곳이 보이지요? 저 높은 곳이 주왕산의 정상입니다. 주왕산의 정상은 다른 산처럼 뾰족하게 높이 솟아 있지 않은 것이 특징입니다.”


우리들이 간식을 먹으며 쉬고 있는 동안 반대편으로 올라온 등산객들 몇이 우리들이 올라온 방향으로 내려간다. 우리들의 산행시간이 상당히 늦어진 때문이었다.

 

해가 지기 전에 정상에 올랐다가 내려가려면 서둘러야 될 것 같았다. 일단 내리막으로 조금 내려갔다가 다시 능선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바람이 서늘하고 하늘도 맑아 산행하는 기분이 그야말로 상쾌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가을은 산행하기가 가장 좋은 계절이라고 했던가 보다.

 

정상까지는 능선길의 연속이었다. 약간씩 오르내리는 길이 높낮이가 거의 비슷하여 힘들이지 않고 걸을 수 있어서 체력소모가 아주 적었다. 그런데 정상이 가까워질수록 태양의 높이가 낮아지고 있는 것이 문제였다.

 

힘들지 않고 쉬운 길이어서 걸음을 빨리하여 정상에 닿았다. 특별할 것이 없는 정상의 풍경이었지만 멀리 바라보이는 조망이 일망무제로 넓어 보일 뿐이었다.

 

“자! 서두르자고, 태양이 두 뼘밖에 안 남았어, 어두워지기 전에 내려가려면 서둘러야 되겠어.”

성질 급한 일행 한 명이 빨리 내려가지고 재촉을 한다. 능선 길을 되짚어 돌아오다가 왼편 골짜기로 접어들었다.

 

 


골짜기는 벌써 산그늘에 가려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골짜기는 상당히 깊고 길었지만 길이 평탄하고 걸음이 빨라 곧 제3폭포에 이르렀다. 가을이어서 수량이 많지 않아 약간은 초라했지만 폭포는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폭포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다시 하산을 계속했다.

 

바위로 병풍을 둘러친 것 같은 협곡 풍경

 

골짜기의 방향이 서쪽으로 향하고 있어서 산등성이에 걸린 태양빛을 받은 골짜기의 풍광이 더욱 밝고 아름답다.

 

“우와! 이 산에 이런 곳이 다 있었어. 저 바위 협곡 좀 보라고, 우리들이 혹시 꿈을 꾸고 있는 것 아니야?”
앞장서 내려가던 일행이 탄성을 터뜨린다.

 

하늘을 가리고 우뚝우뚝 솟아 있는 바위절벽 사이의 협곡에 들어서자 완전히 다른 세상에 와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 협곡이 바로 주왕산의 백미(白眉)인 주방천 중류골짜기지요, 저기 뾰족하게 솟은 바위가 시루봉인데 이쪽에서 보면 마치 사람의 얼굴 모양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그럼 저쪽의 저 바위절벽도 이름이 있겠네요.”

 

“네. 저 곳이 바로 학소대지요. 옛날 저곳에는 청학과 백학 한 쌍이 둥지를 틀고 살았다 하여 학소대로 불렸는데, 어느 날 백학이 사냥꾼이 쏜 화살에 맞아 짝을 잃은 청학은 날마다 슬피 울면서 바위 주변을 배회하다가 자취를 감추었다는 슬픈 전설이 깃들어 있는 곳입니다.”

 

이렇게 대단한 바위협곡에 전해오는 전설이 없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주왕산은 멀리서도 바라보이는 기암과 장군봉등의 바위봉우리도 유명하지만 이 골짜기의 바위협곡이 더 유명하다고 한다.

 

 


그래서 조선후기의 실학자 이중환도 그의 저서 택리지에 주왕산을 가리켜 “깊은 골짜기가 온통 기암괴석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져 가슴이 뛰고 눈을 놀라게 하는 산” 이라고 기록했다지 않았던가.

 

“이 산의 이름이 본래 바위들이 병풍처럼 둘러 세워져 있는 산이라는 석병산(石屛山)이었는데 주왕의 전설이 전해지면서 주왕산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주왕산의 유래와 전설

 

때는 이 지역을 신라가 지배하고 있을 때였다. 중국 당나라에서 후주를 계승한 천자를 자처하며 군사를 일으킨 주도라는 사람이 전쟁에서 패하여 멀리 서해를 건너 이곳 석병산으로 피신했다고 한다.

 

당시 신라와 동맹을 맺고 있던 당나라에서는 신라에 주왕을 잡아달라고 요청했다. 신라조정에서는 마장군의 형제들로 진압군을 편성하여 이곳 석병산으로 보내 주왕을 화살로 쏘아 죽이고 그의 군사들을 격퇴시켰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었다.

 

“이곳 협곡을 보면 석병산이라는 이름이 딱 어울리는데 그 전설 때문에 이름이 바뀐 모양이군요?”
그런 셈이었다. 주왕의 전설 때문에 산 이름이 바뀐 것이다. 산세에 맞춰 지어진 산 이름이 전설에 밀려 다른 이름으로 바뀐 것이다.

 

“결국 전설이 산세를 밀어낸 셈이네, 거참!”
일행은 아무래도 산 이름이 아쉬운 모양이었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입구에 들어설 때 바라보였던 뫼산(山)자 모양의 기암도 주왕이 볏짚을 둘러쳐 노적봉처럼 신라의 마장군을 속였는데, 결국 그것이 가짜임이 들통이 나서 마장군의 화살을 맞고 죽은 곳이 주왕굴이라고 한다. 그때 마장군이 노적봉으로 속인 봉우리에 장군기를 세워서 봉우리 이름을 기암(旗巖)이라고 부른다는 것이었다.

 

바위협곡에는 신라왕실의 전설이 깃들어 있으며 협곡으로 넘어질 듯 솟아오른 급수대, 주왕의 아들과 딸이 달구경을 했다는 망월대, 그리고 협곡 사이에서 쏟아져 내리는 제1폭포가 절경을 자랑하고 있었다. 또 협곡 사이의 바위틈에서 자란 작은 단풍나무들이 빨갛게 물든 모습도 아름답기 짝이 없었다.

 


옛날 거대한 중국대륙을 지배하고 있던 당나라에 맞섰다가 실패하고, 이 땅에 피신했던 주도라는 망명객이 숨어들어 은거했다가 죽은 슬픈 전설 때문에 석병산이라는 이름 대신 주왕산이 되었다는 이 산은 설악산 월출산과 함께 남한지역의 3대 바위산으로 손꼽히는 산이다.

 

신비롭고 위압적이며 많은 전설을 안고 있는 바위협곡을 통과하여 골짜기를 걸어 내려오는 도중에 날이 저물었다. 해가 진 골짜기가 금방 어둠으로 뒤덮였다. 그렇지만 골짜기는 길이 넓고 잘 정비되어 있어서 어두운 밤길을 걷기에도 별 문제가 없었다. 골짜기를 빠져 나온 우리 일행은 근처 식당에서 맛있는 닭백숙으로 저녁을 먹고 안동으로 향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이승철, #주왕산, #바위협곡, #대전사, #시루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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