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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맑고 푸르다. 원주 국제 걷기대회가 벌써 13회를 맞았다. 지난 27일 아침 일찍 일어나 부산을 떨며 준비했다. 걷기대회에 참가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에도 별 생각 없이 있다가 초등학교 6학년 아들 녀석이 20㎞ 참가를 신청했다는 말에 자극받아 덜컥 참가 신청을 한 것이다.

 

20㎞가 얼마나 먼 거리일까.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 거리를 달려본 적도 걸어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자동차 운전해서 휘익 지나간 정도가 전부였다. 어린 시절 어른들이 하신 말씀 들은 기억으로는 4㎞가 10리라 했으니 20㎞는 50리나 된다. 만만한 거리는 아니다.

 

“나도 따라갈까?”
“당신, 신청 안 했잖아.”

 

막 집을 나서려는데 아내가 따라가고 싶다고 했다. 신청도 안 하고 있다가 갑자기 따라오려는 이유가 궁금해서 물어보니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 신랑 혼자 걸으면 심심할 거 같아서 따라가 주려고.”
“왜 혼자야. 광수도 있는데.”
“걘 친구들이랑 가기로 약속했대.”
“그래, 그럼 같이 가자.”

 

아내와 함께 집결 장소인 따뚜 경기장으로 향했다. 도착해보니 벌써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가을 하늘 아래 걷기대회에 참가한 사람들의 다채로운 옷 물결이 마치 바람결에 흔들리는 가을 산의 단풍 물결인 듯했다.

 

 

간단한 개회식과 몸 풀기 체조를 한 뒤 출발했다. 행사장에 넓게 흩어져 있을 때는 몰랐는데 한꺼번에 경기장을 빠져나가니 꼬리를 물고 움직이는 사람들이 물결이 되어 흐르고 있었다. 사람들의 틈에 끼어 걷다보니 인파의 힘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걷기대회에 참가한 사람들에게는 배번이 지급되었다. 배번에는 국적, 이름, 걷는 거리, 하고 싶은 이야기 등이 적혀 있다. 일본, 러시아, 미국, 벨기에, 독일, 노르웨이, 타이완, 스위스 등 참가한 사람들의 국적도 다양했다.

 

신문 보도에 의하면 20여개 국가에서 참가했다고 한다. 단체로 혹은 개인으로 참가한 외국인들의 숫자도 많았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다양한 언어 때문에 외국 여행을 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다양한 국가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참가한 만큼 배번에 적힌 사람들의 글 또한 다양했다. ‘완보’란 글을 똑같이 써서 달고 걷는 노 부부, 이웃 나라의 평화통일과 세계평화를 바라는 마음을 쓴 일본인, ‘걷자, 그냥 걷자’ 혹은 ‘걷고 또 걷자’란 글을 달고 걷는 한국인, ‘비만 탈출’이란 비장한 각오를 달고 걷는 사람, ‘마음을 움직이는 힘 그것은 바로 배려입니다!!’란 글로 따뜻한 마음을 나누고자 걷는 여성 등등….

 

 

배번에 적힌 그 많은 글 중에서 가슴에 꼭 박힌 말이 있다. 대입 수학능력고사를 목전에 둔 고3 엄마들의 글이었다. 고3 수험생을 둔 엄마들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담고 있었다. 한 엄마는 ‘아들 수능 최선을 다해!’란 글을 달고, 또 한 엄마는 ‘아들 원하는 학교에 합격하길’이란 글을 달고 걷고 있었다. 수학능력고사가 보름 남짓 남은 지금 수많은 수험생 부모들이 저렇듯 간절한 마음으로 지내고 있을 텐데.

 

 

 

아무 글도 쓰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백지가 때로는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시내를 벗어나 1시간쯤 걸어 흥업 들녘을 지날 무렵이었다. 추수를 끝낸 들판에 황금 가을빛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 모습이 마냥 평화로워 힘든 줄도 모르고 아내와 도란도란 얘기하며 걷고 있었다.

 

그런데 뒤따라오던 외국인 몇 명이 우리를 앞질렀다. 걷다 보면 우리를 앞지르는 사람도 있고 우리가 앞질러 걷는 경우도 있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무심코 앞장서 걷는 외국인 여성의 모습을 보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여성의 한쪽 다리가 없었다. 없는 다리는 의족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걷는 속도가 아주 빨랐다. 함께 걷던 아내도 많이 놀란 표정이었다.

 

“세상엔 참 열심히 사는 사람들도 많아.”
“그러게. 저렇게 걷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
“우리도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맞아.”

 

 

그 여성의 배낭에 달린 배번에는 아무 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국적도 이름도 하고 싶은 이야기도 그냥 빈 공간으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배낭에 꽂힌 국기로 미루어 스위스에서 온 여성일 거란 추측만 할 뿐이었다.

 

“아무 글도 안 썼네.”
“썼다 해도 읽지도 못할 거잖아.”
“그래, 맞다.”

 

외국어로 쓴 글 읽고 뜻을 새길 능력이 못되니 글을 썼어도 이해도 못할 거라는 아내의 밀에 동감하며 웃었다. 하지만 백지 배번에 담긴 뜻이 무얼까 생각하니 각별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다리를 잃고 좌절했던 시절, 그 아픔을 딛고 일어서기까지의 고통, 국제 걷기대회에 참가해서 당당히 걷기까지의 피땀 어린 노력 등등….

 

시리도록 푸른 가을 하늘에 형형색색의 옷을 입은 각국의 사람들이 땀 흘리며 걷고 있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걷는 이들은 저마다 다른 꿈을 안고 걷고 또 걸었다. 그렇게 걷는 이들을 향해 가을 들녘의 단풍이 살랑살랑 손을 흔들었다.


태그:#걷기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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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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