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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벼 베인 논
 벼 베인 논
ⓒ 이형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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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장마 끝의 가을이 짧기만 하다.

서리를 앞세우고 성큼 다가선 겨울 냄새에 마음이 바빠진다. 짐을 꾸리는 가을을 행여 인사도 못하고 헤어질까 싶어 배웅을 나서 본다. 자전차를 타고 가볼까 하다가 그도 등을 떠밀 듯하여 그저 투벅투벅 걸어보기로 한다. 바랭이 줄기에 매달려 있다가 풀쩍 뛰는 메뚜기 한 마리가 "나처럼 해 봐"라고 놀리는 듯했다. 맞다. 들을 뛰는 메뚜기, 하늘을 나는 새들이며 모두 맨발, 맨 날개로 잘만 돌아다니지 않던가.

나와 만나는 작은 여행

콩메뚜기
 콩메뚜기
ⓒ 이형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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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안에서 휙 지나치느라 눈길 한번 돌아보기 힘들었던 풍경들이 오감(五感)으로 다가온다. 훌쩍하니 여위어가는 도랑의 물소리며, 서늘한 바람이 스칠 때마다 엄살이라도 부리듯 요란한 소리를 내며 몸을 떠는 옥수숫대가 그러하고, 어둑한 밭에서 깻단을 터는 고소한 냄새며, 앞마을 슬레이트 지붕 위로 감도는 푸른 연기도 새롭다.

걷지 않고는 만날 수 없는 소리와 빛깔과 촉감들을 마음껏 만난다. 이 좋은 걸 알면서도 조석으로 차에 얹혀 만나지 못한 까닭을 스스로 자신에게 설명하기도 쉽지 않다. 바쁘다는 말도 이제는 스스로 듣기에도 궁색하다. 게으름, 무관심, 안이함…. 결국은 아무 생각도 없이 살아간다는 자기 진단에 이르고서야 쓴웃음을 짓고 만다.

걷는다는 것은 이렇게 자신에게마저 멀어진 자신을 돌려세우는 일인가 보다.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내게 말을 걸고, 내가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도 모르는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는 작지만 깊은 여행이 아닐까. 그렇다면 단연 그 여행은 늦은 가을이 어울린다. 그것도 벼를 벤 논이랑이나 밭두렁이 아련한 그리움의 굴곡으로 구부러지는 어둑해질 무렵이 좋다.

엉겅퀴씨
 엉겅퀴씨
ⓒ 이형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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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시멘트로 바른 마을길이지만 가장자리에 선 풀들이 까만 씨를 말리고 있다. 작게 그 앞에 다가가 숨이라도 내쉬고 나면 어디론가 먼 여행을 떠날 채비를 갖춘 홀씨들이 기대감에 잔뜩 부풀어 있다. 여름내 진보랏빛으로 날 황홀케 하던 엉겅퀴의 홀씨들이다. 아마 먼 여행 뒤에 어디에선가 누군가의 가슴을 또 진보랏빛으로 멍들도록 황홀하게 하리라.

도깨비 바늘
 도깨비 바늘
ⓒ 이형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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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곁을 살피자니 오랜만에 만나는 어린 날의 동무가 있다. 이런 볕 좋은 가을날이면, 마른 씨를 화살촉처럼 잡고서 동무들의 구호물자 스웨터에 던지면 백발백중 화살처럼 꽂히던 ‘도깨비바늘’이라는 씨앗을 만나게 되었다. 바로 그 곁에서는 아주까리 잎사귀 뒤에 콩메뚜기 한 마리가 숨어 있다. 온종일 신고 있던 고무신 뒤꿈치가 찢어지도록 쫓아다니던 메뚜기를 여기서 다시 만난다. 모든 게 떠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내가 멀리 떠나 있었을 뿐이다.

개울
 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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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하얀 조약돌을 맞비비는 소리가 들려온다. 여남은 계집아이들이 조잘거리는 소리 같기도 하고, 갈 숲에 숨어 우는 박새 울음 같기도 하다. 개울물 소리였다. 황순원의 ‘소나기’에 나오는 징검다리가 겨우 두어 개쯤 박힌 작은 개울이다. 소년이 얼굴을 비추어 보고 손으로 움키던 개울처럼 내 얼굴을 비춰 본다. 서리 맞은 머리의 사내가 지친 얼굴로 내다본다. 그래도 조잘거리며 흐르는 물소리가 어찌나 듣기 좋은지 맥없이 징검돌에 쭈그리고 앉는다.

쓰러진 벼
 쓰러진 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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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말소리에 몸을 일으킨다. 마을의 노인 내외분이 쓰러진 벼를 베고 있다. 말로나마 몇 마디 거들어 드리니, 바깥 노인은 대통령이 이북에 마냥 퍼 주니 걱정이라며 장탄식을 한다. 그냥 먼산바라기로 웃고 말지만 말 못하는 내 탄식은 노인보다 더 깊다. 막걸리라도 한통 들어다가 그 시름을 나누어, 개마고원에서 감자 거둘 이야기라도 나누고 싶지만 해는 짧고 땅거미는 발이 빠르다.

여뀌
 여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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깻단을 베어 놓은 밭두렁을 조심스럽게 걷자니, 여뀌가 떼를 짓고 있다. 가을이면 여뀌도 제법 예쁜 태가 난다. 누구네 전원주택을 또 지으려는지, 목장 곁의 논에는 산더미처럼 흙이 쌓여 언덕을 만들어 놓았다. 그 곁에서 콤바인이 익은 벼를 베고 있었다. 기계로 두어 시간이면 베어내는 가을걷이고 보니, 곁에서 바라보기도 싱겁기만 하다. 막걸리 한 통, 새참 한 그릇 구경도 못한다.

추수
 추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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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길에

긴 비에 올 부추 농사는 늦게까지 잇는다. 하얗게 꽃을 매단 부추밭 너머로 모처럼 축령산이 맑은 모습을 드러낸다. 여름내 물놀이 행락객들이 들끓고, 지나는 차 안까지 들러붙던 삼겹살 냄새가 끊긴 수자골 개울은 모처럼 쓸쓸해졌다.

부추밭
 부추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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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망질로 번쩍거리는 피라미들을 건져내던 개울에는 누군가 쌓아 놓았는지 징검다리가 가운데를 흘려보낸 채 저무는 해에 잠겨간다. 가만히 서 있어도 서늘해지는 가을 저녁에 올 들어서 마지막으로 내는 미나리꽝의 일꾼들이 썰렁하게만 느껴진다.

저물녘의 개울
 저물녘의 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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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저문 들녘을 터벅터벅 걸어 집으로 돌아오며 혼자 생각한다. 걸으며 자신과 만났는지, 만나서 무엇을 이야기했던가. 메뚜기처럼 나는 아주까리 넓은 잎 뒤로 잠자러 돌아간다. 스무나무 꼭대기로 날아가는 콩새들처럼 나는 집으로 돌아간다. 새들과 메뚜기들은 이 늦은 가을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여행을 떠나려나 보다.

이 흰 바람벽에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은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추후 '남양주뉴스'에도 실립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걷기, #가을, #수동, #물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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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동면 광대울에서, 텃밭을 일구며 틈이 나면 책을 읽고 글을 씁니다. http://sigo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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