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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의 순환

 

오지 않을 것 같은 가을이 성큼 다가오더니만 금방이라도 겨울이 올 것같이 날씨가 싸늘하다. 물골에는 어제(19일) 첫 얼음이 얼어 가을빛을 자랑하던 구절초의 꽃이 시들고, 화단에서 연잎을 닮은 이파리로 화사한 꽃을 자랑하던 한련초의 이파리도 오그라들었다. 한 번 피어나기 시작하면서 시들지 않을 듯 피어나던 백일홍도 몸부림치며 끝물의 빛깔을 내고 있다. 이제 곧 겨울이 올 것 같은 느낌이다.

 

배추모종을 심을 때만 해도 모종이 시원찮아 괜한 수고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우리 밭은 풍작이다. 풍작이 주는 기쁨은 지난 계절 흘린 땀방울들에 대한 보상이다. 배추값이 어떠하든지간에 설령, 똥값이 된다 해도 풍년을 바라는 것이 농부의 심성이다. 넉넉넉한 창고에서 인심이 나는 법, 넉넉한 배추를 보니 나누고 싶은 사람도 많아진다.

 

배추에 허리끈 묶어 주니?
 
그러나 배추농사가 끝난 것이 아니다. 수확을 하기 전에는 어떤 변수들이 작용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배추가 추위에 견딜 수 있도록 하고, 속을 꽉차게 하기 위해서 짚으로 배추를 묶어준다. 방금 추수를 마친 볏짚의 풋풋한 냄새가 좋다. 볏짚을 이어 배추를 묶어주면 배추의 월동준비 끝, 김장철까지 넉넉하게 지낼 수 있는 준비를 마치는 것이다.
 
생각보다는 어렵고 시간이 많이 걸린다. 배추가 커서 두 손을 다 사용해서 한아름 안고 묶어주어야 하는데다가 한 포기, 한 포기 묶는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일이 더디다. 배추를 묶으면서 한 아름씩 품으로 안고는 "배추야, 고맙다, 잘 자라줘라"하고 사랑의 메시지를 마음으로 보낸다. 그들도 알겠지.
 
한참을 묶고 있는데 농사일이라면 박사급이신 어머님이 배추밭으로 나오셨다.
 
"야야, 배추에 허리끈 묶어주니?"
"예?"
"이렇게 윗부분을 묶어줘야지 중간을 묶으면 뭐하냐?"
"난 배추 허리에 묶는 것인 줄 알고 배추 허리 찾느라 애 먹었는데요?"
"하하하, 재밌다, 재밌어. 역시 일은 함께 하는 맛이 있어."
 
박장대소를 하며 배추에 묶은 허리끈을 더듬어 위로 올려 이파리를 모아준다. 허리띠가 아니라 머리띠를 해줘야 하는 것을.
 
 
자연스러움을 품으려면
 
솎아낸 배추의 속은 고소하고 감칠맛이 돌아 된장없이 먹어도 맛났다. 자연이 주는 선물들에 대해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모종을 심는 것은 사람의 일이지만 그 모종을 자라게 하고, 결실을 맺게 하는 것은 자연이 아닌가!
 
'자연스럽다'는 말은 '자연을 닮았다'는 말이다. 자연을 닮았다는 말은 자연의 속성이 그 안에 들어 있다는 말과 통한다. 자연의 일부인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연스러움'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그 자연스러움을 얻기 위해서는 자연의 품에 안기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모든 생명마다 뿌리를 내리고 있는 대지에 어떤 인공적인 것들의 여과장치없이 닿는 일을 통해서 우리는 자연이 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인공의 것이 가미되지 않는 것들을 몸에 모시는 일을 통해서도 우리는 자연스러움을 품을 수 있는 것이다.
 
 
육체노동의 신성함
 
맨손으로 흙을 만지는 일은 그래서 신성한 노동이다. 삼림욕이 좋다고 하는데 그 역시도 맨살이 자연과 호흡하는 과정인 것이다. 인공의 천을 벗어버린 알몸으로 삼림욕을 하는 것이 가장 좋은 이유가 거기에 있다. 맨손으로 흙을 만지는 일은 온 몸에 자연이 순환하게 한다. 그것의 증거가 땀이다. 육체노동을 하면서 흘리는 땀, 그것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자연모심의 과정인 것이다.
 
김장배추를 한 포기씩 묶으면서, 어느새 실하게 자란 배추를 보면서 '자연의 시간'이 참으로 자연스럽다는 것을 느낀다. 그 '자연스러움'이란 천천히 기다려 주는 것이며, 조금씩 지경을 넓혀가다가 어느 순간 깜짝 놀라게 하는 것이다.
 
김장배추를 묶는 일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짚을 묶고, 배추이파리를 모루고, 배추를 묶는 일이 그리 쉽지 않다. 그러나 하나 둘 힘이 합해지니 일이 재미있어진다.
 
 
행복한 밥상공동체
 
아들은 논에서 짚을 나르고, 아버지는 배추를 묶기 좋게 짚을 엮어 주시고, 형님과 나는 배추를 묶고, 어머니는 김장용 배추로 쓸 수 없는 것을 솎아내고, 며느리들은 솎은 배추를 다듬고, 매형은 다듬은 배추를 나르고, 누님은 소금에 배추를 저린다.
 
저린 배추가 김치로 변신을 했을 때 밥상은 잔칫상이 된다. '밥상공동체'가 여기에 있다. 이런 행복이 우리 가족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충만하기를, 우리가 누리는 행복에 취해 이웃의 아픔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기를 기도했다.
 
 
계절살이와 흙의 마음
 
반짝 추위라고 했지만 물골에 불어오는 바람은 매서웠다. 몸을 움추릴 수밖에 없었다. '반짝 추위'를 통해서 겨울이 올 것을 암시하고 자연은 서둘러 오는 계절을 맞이할 채비를 할 것이다. 어느 하나라도 행여나 겨울이 오기 전에 월동준비를 하지 못할까봐 배려하는 것, 그것이 반짝 추위라 생각하니 우리 삶에 간혹 다가오는 원하지 않는 고난의 이유들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흙은 모든 씨앗을 품는 마음씨를 지녔다. 자기가 좋아하는 씨앗만 싹을 틔우지는 않는다. 잡초의 씨앗이라고 홀대하지 않고 품어주는 것이 흙의 마음이다. 흙의 마음은 바다를 닮았다. 바다가 더러운 물도 마다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과도 같다.
 
물골 김장배추, 그로 인해 깊어가는 가을 풍성함이 가득하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개인홈페이지 <달팽이 목사님의 들꽃교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배추, #김장, #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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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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