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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나가던 가을이 공양물로 낙엽을 올린 듯 부처님 앞에 놓인 청수다기에 낙엽이 떠 있다.
지나가던 가을이 공양물로 낙엽을 올린 듯 부처님 앞에 놓인 청수다기에 낙엽이 떠 있다. ⓒ 임윤수

마음에도 단풍이 드는 계절이다. 굳이 마중을 나가지 않아도 마음만 열면 짊어진 적 없는 바랑이 가득 채워질 만큼 알록달록한 단풍이 가슴으로 물들어오는 시월상달이다. 들녘에서는 황금빛 농부의 마음이지만 산등성이에 서면 천년고찰을 장식하던 능란한 단청장이가 되는 게 요맘때 계절이다.

계절은 발걸음도 없이 산 고개를 넘는다. 헉헉거리는 숨참도 없고, 뚝뚝 떨어트리는 땀방울도 없이 훠이훠이 불어오는 바람처럼 산 능선으로 올라서더니 솔바람 물소리를 따라 미끄럼을 타듯 가을 산으로 내려앉는다.

산하를 채색하기 위해 쉼 없이 봄부터 마련했을 그 고운 빛깔들을 짊어지고 설악산 꼭대기로 올라섰던 가을 객은 설악산을 넘고 오대산을 넘어 남쪽으로 남녘으로 붓칠을 하며 내려오고 있다.

 낙엽에서 공양미 삼백 석 같은 계절의 불심을 보게 되니 산사의 풍경은 이래서 더 좋다.
낙엽에서 공양미 삼백 석 같은 계절의 불심을 보게 되니 산사의 풍경은 이래서 더 좋다. ⓒ 임윤수

지팡이 대신 바람을 짚고, 걸망 대신 아침이슬만 짊어졌는가 했더니 언제 챙겼나 모르게 알록달록한 물감들을 잔뜩 챙겼다.

어느 것에도 욕심내지 않던 계절이지만 가을을 단청할 물감을 챙기는 데는 욕심 좀 부렸나보다. 산하를 물들일 단청재료가 가득한 바랑, 가을을 짊어진 계절나그네가 훌쩍 지나가기만 하면 거기가 단풍색이다.

챙길 땐 욕심스럽게 챙긴 듯하더니 운수행각을 일삼는 납자의 발걸음처럼 구름이 되고 바람이 되어 훌훌 단풍 색 흩뿌리며 계절을 탁발한다.

청수다기에 올려진 가을은 낙엽

부처님께 올린 청수다기에도 낙엽이 담겼다. 이른 새벽, 목탁소리로 도량을 돌고 아침예불을 드리며 올렸을 청수, 푸른빛이 돌만큼 파르라니 깎은 머리조차도 단정하고 정갈한 마음으로 올렸을 비구니스님의 마음인 양 맑은 눈물방울을 닮은 청수다기에 낙엽 하나가 그렁그렁한 모습으로 떠돌고 있다.

지나가던 계절이 부처님께 올린 가을 공양인가 보다. 가진 게 없는 계절이다 보니 가을날 곱게 빚은 낙엽 한 장을 공양물로 청수그릇에 올렸나보다.

어수선한 계절에 벌컥벌컥 물을 마시다가는 부처님일지라도 어쩜 물 사래들려 캑캑 헛기침할까봐 버들잎 하나 띄워 주던 그런 마음으로 낙엽 한 장을 청수에 띄웠을지도 모른다.

다기 속의 낙엽은 일엽편주다. 동쪽으로 바람이 불면 동쪽으로 방향을 잡고, 서쪽으로 바람이 불면 서쪽으로 돌아앉는다. 바람이 불어와도 거스름 없이 맞아들이니 다기 속 청수는 오롯한 맑음이다.

동백나무는 영근 씨앗을 자랑하고, 철지난 봄꽃나무는 철부지처럼 꽃을 피웠다. 번뇌 막아줄 물고기는 잃었을지언정 다가오는 계절에 ‘뎅그렁’ 거리며 마음풍경을 울리니 대웅전 용마루에 걸렸던 가을 햇살이 우르르 쏟아지며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 임윤수

낙엽에 마음실어 청수에 띄워보니 가을 빛 단풍들이 가슴으로 넘쳐만 난다. 눈앞에 아롱이는 삼삼한 가을 산을 한꺼번에 모아보고 한꺼번에 담아보니 만가지색이 탈색되어 맑디맑은 청수였다.

시월을 보내는 하루하루는 산하를 물들이는 단청장이의 붓질이다. 지나가던 계절조차도 이렇듯 정갈하게 가을 낙엽을 공양하고, 그 낙엽에서 공양미 삼백 석 같은 계절의 불심을 보게 되니 산사의 풍경은 이래서 더 좋다.

덧붙이는 글 | 사진 중 청수다기는 어제(14일) 대전 계족산 용화사에서 찍은 것이며 슬라이드의 나머지 사진들은 전에 찍어 놓은 자료 사진을 이용한 것입니다.



#단청#청수#낙엽#다기#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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