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물 가운데 떠 있는 작은 섬, 남이섬의 기억은 참 오래되었다. 손으로 잡힐 듯한 작은 섬은 양파 몇 포기 심고 꿀벌 잉잉대는 '이니스프리의 호도'(湖島)나, 하루에도 의자를 뒤로 물러가며 몇 번씩이나 노을을 바라볼 수 있는 '어린 왕자'의 작은 별처럼, 그런 작은 섬으로 추억된다.

 

'강변가요제'라는 요란한 잔치가 한바탕 작은 섬의 고요를 깨더니 이제는 소모적인 행사를 넘어 문화의 보금자리로 만든다는 소식이 전해왔다. 잡지의 예쁜 사진으로 전해오는 앙증맞은 아이디어들은 이 작은 섬을 더욱 동화처럼 꿈꾸게 했다. 월급 10원을 자청하며 이 작은 섬을 꾸몄다는 어느 분의 생각이 너무 고맙고, 아름다웠다.

 

게다가 <겨울연가>의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이 작은 섬은 일약 한류의 바람을 타고, 외국인 관광객들이 으레 들르는 ‘성지’가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왔다. 솔직히 이때부터 조금씩 걱정되었다. 그런 걱정 반 기대 반으로 미적거리던 걸음을 뒤늦게 다 잡아 지난 10월 9일, 조금은 이른 가을에 남이섬을 찾았다. 

 

오래된 기억의 남이섬

 

 

주차장은 경기도 가평군에서 가깝지만, 정작 남이섬은 행정구역상 강원도 춘성군 남산면에 속한다. 배를 타고 건너는 선착장 주변에는 닭갈비 식당들이 울긋불긋 둘러싸고 있다. 이 정도의 풍경이야 으레 관광객들이 모이는 곳이면 있게 마련이니 못 본 척 넘어간다.

 

별인지 해인지 모를 문양과 달을 주제로 한 '남이 공화국(나미 나라)'의 국기 - 얼핏 청천백일기를 닮았다 - 를 매달고 배는 손 뻗으면 닿을 섬으로 향한다. 섬에 닿자, 커다란 엽전 모양의 돈 조형물이 반긴다. 남이 나라에서 쓰는 내부 화폐인 모양인데 사람보다 돈부터 문앞에 나와선 까닭이 궁금할 뿐이다.

 

남이 공화국이라니, 한 나라를 따로 꾸미자면 당연히 거기 걸맞는 화폐도 따로 있어야 할 법하다. 이 작은 섬을 하나의 문화적 해방구로 삼아 하나의 작은 국가로 꾸민 발상이 재미있다.

 

일주문 비슷한 입구를 지나자, 오른편에는 찻집이 있고 왼편에는 돈을 내고 타는 수레형 자전거가 있다. 검은 색안경을 쓴 기사(?)들이 오가는 손님들을 바라보는 눈빛이 흡사 시외버스 터미널이나 공항 택시정거장을 방불케 한다. 엽전 모양의 조형물이 문 앞에 선 까닭을 조금은 알 듯도 했다.


안내판에 그려진 남이섬은 옆으로 누운 반달이나 만두를 닮았다. 그 만두 속을 이리저리 꿰뚫은 길들이 지나치게 자상하다. 미로 찾기 놀이를 할만하다.

 

 

단풍이 아름다운 남이섬에 이리저리 오가는 사람들은 작은 섬이 수용하기에는 벌써부터 번잡해 보인다. 떼를 지은 중국인 관광객들이 <겨울연가>의 한 장면처럼 은행나무 길에 서서 사진을 찍는다. 아직 푸릇한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면 그만으로도 남이섬은 아름다운 감동을 줄 법하다.

 

오래전에 이 섬을 찾았을 때, 소리도 없이 노란 은행잎들이 부슬부슬 떨어져 발밑에 차곡차곡 쌓이는 걸 우두커니 바라보던 기억이 난다. 이따금 마른 열매들이 '툭' 떨어지는 소리를 제외한다면, 그때의 섬은 가을을 온전히 가을답게 비워놓고 있었다.

 

아직 은행잎이 물들지 않아서일까? 무언가 지금의 남이섬은 낯설었다. 번갈아가며 사진을 찍는 사람들 옆에 걸음을 멈추고 이리저리 살피자니, 이 작은 섬에 가을의 고요한 비임이 들어서기에는 너무 많은 것이 오밀조밀 들어차 있음을 알게 되었다.

 


서양 성채를 연상시키는 유니세프 고성이 있는가 하면, 건너편으로는 아궁이에 불을 때는 초가가 놓여 있다. 하나하나를 놓고 보자면 나름대로 제법 정취도 자아낼 법도 하지만, 남이섬이라는 전체의 틀에서 바라다본다면 그 조형물들이 왜 거기 있어야 하는지, 또 그것들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지 의아할 뿐이다.

 

 

허브 제품을 파는 가게 앞으로 지나가는 유치원생들의 걸음이 귀엽다. 그런데 아이들은 이곳에서 무엇을 보고 갈까. 과연 아무것도 꾸며지지 않은 채, 그저 시간처럼 흐르는 강물을 망연히 바라보며 이따금 떨어지는 도토리 열매 소리에 화들짝 놀라던 예전의 나처럼 그 정적의 아름다움을 지금도 느끼고 돌아갈까. 아니면 그보다 더 아름답고 아기자기한 감동을 주머니 속에 엄마가 넣어준 돈으로 바꾸어 맛보고 돌아가는 것일까.

 

 

섬을 가로지르니, 강과 만난다. 남이섬의 유명세를 타고 곁두리로라도 한몫 보려는 팬션이며, 가든이라는 해괴한 이름의 건물들이 들어서느라 건너편 산자락은 벌겋게 벗겨져 있다. 강을 끼고 도는 나무로 만든 길은 그런대로 아기자기하다. 강가마다 서 있는 방갈로들은 입이 떡 벌어지는 방값의 팻말을 달고 줄지어 서 있다. 도처에 손을 내미는 표지판과 쉴 새 없이 지나다니는 자전거와 수레들 틈 사이 화장실로 재빨리 몸을 피한다. 다행히 이곳은 아직까지 무료다.

 

흙덩이가 뭉텅이로 떨어진 굴뚝을 건성으로 달고 서 있는 흙집을 지나며, 비로소 나는 내가 만났던 예전의 남이섬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게 되었다.

이 작은 섬이 지닌 동화적인 상상력은 ‘작다’는 틀에서 시작된다. 한눈에도 내다 뵈는 작은 섬. 하루에도 몇 번씩 일주를 할 수 있는 섬이 잇대는 환상은 걸리버 여행기에 등장하는 소인국을 닮았다. 

 

따라서 이곳의 모든 인위적 조형물과 장치는 최소화하고 축소할 필요가 있다. 궁둥이가 옆으로 삐져나올 정도의 작은 협궤열차… 라면 하나 겨우 끓일만한 작은 화산(火山)… 장미 한 송이와 여우 한 마리… 장치들이 작을수록 섬은 거대한 환상의 날개를 타고 하나의 왕국으로 뭉게뭉게 그 꿈을 부풀린다.

 

 

이 섬의 아름다움은 오밀조밀 꾸며진 장치나 인공적인 시설 그리고 작위적인 프로그램이 아니다. 적어도 이 작은 섬이 주는 아름다움은, 오래된 나무들이 서 있는 길과 고요히 추억처럼 멈춘 강이다. 남이섬을 위한 최대의 배려는 이것들이 있는 그대로 놓여 있도록 사람의 손을 줄이는 노력이며 그저 오래된 나무 등걸에 얹은 긴 의자 몇 개면 훌륭하다.

 

그러기에 이 작은 섬의 현실은 지나치게 번잡하고 사람의 손때가 너무 묻었다. 무언가 꾸미고 보여 주어야 한다는 강박감이 오히려 보는 사람을 거북하게 한다. 월급을 10원이라도 받아야 한다면, 가뜩이나 작은 섬을 더욱 비좁게 하는 오밀조밀한 의도들을 내려놓고 이 작은 섬과 나무와 강이 주고받는 고요한 비임의 대화에 귀 기울이기를 바란다.

 

"예전의 작고 고요하던 섬을 돌려주세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남이장군의 묘가 있는 이 섬이, 비록 메뚜기도 한철이라고 어느 드라마의 대중적인 인기에 힘입어 적잖은 벌이와 유명세를 타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사라진 뒤에는 무엇으로 이 ‘오밀조밀한 장치와 의도’들을 써먹게 될지 벌써부터 걱정된다.

 

작은 섬이 글자 그대로 작은 아름다움을 잃지 않게 하자면, 지금처럼 끝없이 몰려드는 사람들에 희색이 만면하여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데에만 급급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장사치나 할 짓이 아닌가. 적어도 문화의 섬을 만들겠다는 말이 아직도 유효하다면, 이 작은 섬과 이곳을 찾는 사람이 가을이 내려놓는 나뭇잎 소리와 별들이 강물에 내려앉아 조개껍질 비비는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는 고요함은 남겨 두어야 하지 않을까.
 

청평댐에 강물이 가로막혀 수몰되기 전만 해도 가평읍으로 육로로 이어지다가 물에 갇혀 '황홀한 고립'을 맞이한 이 작은 섬을 위해 두어 마디 부탁을 드린다.

 

"이 작은 섬이 외롭게 그대로 놓아두세요."

"예전의 작고 고요하던 섬을 돌려주세요."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추후 '남양주뉴스'에도 실립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남이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수동면 광대울에서, 텃밭을 일구며 틈이 나면 책을 읽고 글을 씁니다. http://sigool.com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